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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사람의 마음을 얻어라” 

 

사진 전민규 기자
국내 상업사진계에 한 획을 그은 세계적인 사진작가 준초이가 공간 디자이너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아들에게 사람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준초이는 사진기를, 아들 최유진은 대학 시절 만든 공간 조형물을 촬영 소품으로 활용했다. 현재 그들의 삶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다. 촬영장소는 서울 개포동 준초이 스튜디오.



10월 마지막 날 서울 개포동 준초이(Joon Choi) 스튜디오에서 사진작가 준초이(61·본명 최명준)와 첫째 아들 최유진(27)을 만났다. 짧게 깎은 머리와 자그만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예사롭지 않다. 신기하게도 웃을 때면 천진난만한 아이같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사진을 찍는 사진가로 알려진 준초이의 첫인상이다.

반면 훤칠한 외모의 아들 유진씨는 수줍음이 역력했다. 그는 미국 미술 명문대인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RISD)을 졸업하고 올해 광고회사인 이노션 월드와이드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그는 스페이스(공간) 디자인을 한다. 예컨대 홍보관을 설립할 때 기업의 가치를 사람들이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일이다. 요즘 주목받는 마케팅 방식이다. 준초이는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은 아들이 대견하고 걱정스러운 듯했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그의 얘기는 아들에게 들려주는 삶의 조언 같았다.

그렇다면 준초이가 성공한 비결은 뭘까. 그는 헝그리 정신을 꼽았다. 나무 키우는 법과 비슷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나무를 키우면 좀처럼 시들지 않아요. 흙 속에 손가락 두뼘 정도 넣어서 물기가 있는 지 확인해요. 흙이 바짝 메말랐을 때 물을 주면 나무는 한번에 흡수해서 잘 자랍니다. 습기가 있을때 물을 줘도 나무가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성장 속도가 느릴 뿐이지요.”

준초이는 사람도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검정고시를 봐서 국내 대학에 입학했다. 유학을 가려면 대학 졸업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0년대는 유학 자체가 힘든 시기였다. 그는 외무부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이 소식을 접한 김동리 중앙대 예술대학장이 추천서를 써줘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일본 땅을 밟았다는 기쁨도 잠시 경제적으로 고통 받았다. 초콜릿으로 점심을 때우며 불고기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도시코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는 일본 ‘오오사와 운송’이라는 커다란 토목회사 회장이었다. 도시코 회장은 일본대학 예술학부 입학을 도와준 황성규 중앙대 교수의 지인이었다.

“도시코 아주머니는 유독 저를 예뻐했어요. 일본에서 지낸 7년 동안 어머니처럼 챙겨줬어요. 타국에서 기죽으면 안된다고 옛날 외무부 장관을 신원보증인으로 세워주기도 했고요. 일을 할 때마다 데리고 다녔어요. 덕분에 사회에서 일하는 법이나 돈 버는 방법을 많이 배웠습니다.”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졸업한 그에게 중앙대 사진과 교수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안락한 캠퍼스를 뒤로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6년간 실력을 쌓은 후 1988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88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그 해 한국 경제는 성장 드라이브를 걸 때였다. 상업 사진을 전공한 그에게 기회였다.

삼성전자·제일제당·코카콜라 등 기업들이 앞다퉈 준초이를 찾았다. 제품 뿐 아니었다. 미국·유럽의 사진가가 아니면 촬영이 안된다는 특급 호텔의 촬영까지 그가 맡았다. 당시 준초이에게 무슨 광고를 많이 찍는지 물어보면, 그 시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상품을 알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이명박·조수미·황영기 등 유명인 고객

4~5년 전부터 준초이의 카메라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는 “인물처럼 매력있는 피사체는 없다”고 했다. 인물 사진은 복잡하고 다양한 사연이 담겨 질리지 않는다고 덧 붙였다. 그동안 수많은 유명인사가 그의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소프라노 성악가 조수미씨와의 만남이 기억에 남는다”고 얘기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촬영을 했어요. 순조롭게 촬영을 끝내고 그가 드레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순간 뭔가 놓친 것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다시 찍자고 하면 불평할 줄 알았는데 흔쾌히 수락하더군요. 그의 열정은 대단했어요. 로마 시내 한복판에서 짚시 음악가의 기타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냐고 물었죠. 역시나 그는 망설임없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당당히 춤을 추더군요. 홀린 듯 자신의 일에 빠져드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굵직한 기업의 CEO들도 기꺼이 모델이 됐다. “조태권 광주요그룹 회장과는 형제처럼 지냅니다. 촬영을 하면 카리스마가 느껴져요. 남자가 봐도 멋있는 분이죠.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은 젊은이들에게 소개하고픈 인물이에요. 잠깐만 얘기를 나눠봐도 열정적인 삶이 와 닿습니다. 5년 전 포스코 미술관에서 ‘백제의 미’ 전시회를 열면서 이구택 포스코 전 회장과 인연을 쌓았습니다. 이 전 회장은 철강 만드는 산업 현장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달라고 했어요. 흥미로운 프로젝트였지요. 1년 2개월 동안 전 세계 포스코 공장과 연구소를 다니며 촬영한 책자가 ‘포스코 심포니’입니다.”

역대 대통령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직접 그의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대통령 취임 일주일을 앞둔 시기였다. 청와대에서 수십 명의 작가를 수소문하다 그에게 의뢰가 왔다. 준초이는 단번에 거절했다.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을 찍으러 청와대까지 갔다 빈손으로 돌아온 기억 때문이다.

“대통령을 촬영한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입니다. 막상 청와대에 들어간 순간 숨이 탁 막히더라고요. 촬영 장비는 기본이고 촬영장소까지 완벽하게 준비돼 있었습니다. 촬영시간을 정확히 엄수해야 한다는 말에 못하겠다고 했죠. 억압된 틀 속에서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촬영 때도 마찬가지였죠. 여러 차례 부탁했지만 제 스튜디오가 아니면 안된다고 버텼죠. 결국 의견이 받들어졌습니다. 촬영 당일 스튜디오 일대를 통제한 채 이 전 대통령을 촬영했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개인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요즘 그는 많은 시간을 제주도 우도에서 보낸다. 7개월 전에 아예 이삿짐을 싣고 우도로 내려갔다. 전입신고도 했다. 해녀의 삶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그들과 동고동락하는 중이다. 그는 “해녀를 보면 삶·투쟁·인간·어머니·할머니 등 수많은 단어가 떠오른다”고 했다.

“해녀가 입는 잠수복은 마치 전투복 같습니다. 물질 갈 때 그네들의 표정은 인정사정이 없어요. 오랜 세월 바닷속에서 투쟁으로 살아남은 얼굴이에요. 여름 동안에는 스쿠버다이빙을 배웠습니다. 물속에서 촬영하려고 장비도 구입했고요. 칼바람 부는 겨울에 바다로 뛰어드는 해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싶습니다.”

준초이는 유진이 어렸을 때부터 촬영 현장에 데리고 다녔다. 아들이 보다 세상을 넓게 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들은 촬영 때마다 해녀처럼 투쟁하듯 셔터를 누르는 아버지를 봐왔다. “아버지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크세요. 한번 일에 몰두하면 흐트러짐 없이 몰입하는 편이지요. 뚝심이랄까요. 최고의 한 컷을 얻기 위한 노력이 느껴져요. 아버지처럼 인정받는 공간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201312호 (201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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