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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REPRENEURS | DAEJOO·KC GROUP CHAIRMAN PARK, JU BONG 

‘덤프트럭’ 한 대로 1조원 사업가 되다 

사진 오상민 기자
박주봉 대주·KC그룹 회장은 25년 넘게 쉼 없이 달렸다. 1988년 운송업체를 시작으로 철강 사업을 했고, 2001년엔 공기업인 한국종합화학을 인수했다. 여러차례 위기가 왔을 때도 연구개발에 힘썼다. 최근 개발한 알루미늄 범퍼를 현대자동차그룹에 남품하고, 국내 최초로 고순도 알루미나를 생산한다.

▎박주봉 대주·KC그룹 회장이 성장 발판을 마련한 전남 목포의 케이씨 공장이다. 24시간 가동돼 저녁에도 공장 불빛이 일대를 환하게 비춘다.



중견기업 업계에서도 박주봉(56) 대주·KC그룹 회장은 ‘신화’적인 인물로 손꼽는다. 25년 전 덤프트럭 한 대로 시작해 모기업인 대주중공업을 비롯해 KC(이하 케이씨), 대주이엔티, 한국알루미나 등 6개 기업을 갖고 있다. 그룹의 지난해 말 기준 매출액은 약 1조400억원이다. 사업은 크게 철강, 화학, 물류, 건설 등 4개 분야다. 박 회장은 “2~3년 안에 각 분야에서 세계 1등 제품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얘기했다.

그의 성공 비결엔 부지런함을 빼놓을 수 없다. 매일 오전 6시엔 그룹 본사가 있는 인천으로 출근한다. 2000여 명의 직원 중 가장 빨리 온다. 하루 전날 과음으로 회의에 늦겠다 싶으면 아예 사무실에서 잔다. 사업을 한 이후로 시간 약속을 어겨 본 적이 없다. 그의 전용차만 봐도 알 수 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회사와 현장을 둘러 보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미니밴인 카니발이다. 고속도로 버스전용차선을 이용할 수 있어서다. 지난 5월 30일 박 회장의 업무 일정에 맞춰 전남 목포시 대불국가산업단지 내 케이씨공장에서 그를 만났다.

공장은 39만6694㎡(12만 평) 부지에 조성돼 있다. 공장을 둘러보려면 1시간은 족히 걸린다. 공장 한 켠에 붉은산이 눈에 띄었다. 수산화알루미늄 원료인 호주산 황토가 산처럼 쌓여 있던 것. 이곳은 정부가 1973년에 세운 국내 유일의 수산화알루미늄 제조 회사다. 쉽게 설명하면 수산화알루미늄은 물 정화부터 비누, 치약 등 생활필수품의 원료로 쓰인다. 여기에 기술이 접목되면 액정화면(LCD)·반도체 기판 등 고부가 소재로 바뀐다.

하지만 회사는 5년 넘게 만성적자에 시달렸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공기업 민영화 1호가 됐다. 누구도 한 해 200억원씩 적자가 나는 기업을 끌어안긴 힘들었다. 2001년 과감히 인수에 나선 이가 박 회장이다. 주변에선 끝까지 만류했다. 운송업과 철강사업만 했기에 종합화학은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그는 미국과 일본에서 정년 퇴직한 전문 기술자를 초빙해 기술 개발에 몰두했다. 신제품 개발에 힘입어 2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기쁨도 잠시, 경쟁사인 일본 업체들이 일제히 덤핑 공세에 나섰다. 케이씨는 가격 경쟁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김해종 대주·KC그룹 사장은 “그 순간에도 박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고 들려줬다. “그는 국회를 비롯해 정부 각 부처를 찾아다니며 덤핑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냈습니다. 끝내 일본 기업은 덤핑 판정을 받고 높은 관세를 부과받았어요. 케이씨는 8개월만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케이씨의 기술력은 빠르게 발전했다. 2010년엔 한국광물자원공사와 합작 투자해 한국알루미나를 세웠다. 수산화알루미늄보다 고부가 소재로 LCD, 반도체 기판 등에 사용되는 특수알루미나를 개발했다. 박 회장은 “그동안 LCD 제품 원료를 수입해 쓰던 삼성코닝(현 코닝)은 국내 중소기업이 제품을 개발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워했다”고 들려줬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여의도 IFC빌딩의 뼈대인 철골 공사를 대주중공업이 맡았다.
약 1년여의 테스트를 거친 뒤 제품을 삼성코닝에 대량 납품했다. 이 뿐이 아니다. 지난해 7월엔 국내 최초로 고순도 알루미나를 생산했다. 케이씨를 비롯해 포스코와 삼성전자가 투자한 포스하이알에서 5년간의 연구 개발 끝에 국산화에 성공했다. 고순도 알루미나는 발광다이오드(LED)는 기본이고 반도체·전기차 등 차세대 산업의 핵심 소재다.

교실서 자며 아르바이트로 학비 마련

공장을 둘러본 후 2층 회장실로 이동했다. 예상외로 소박했다. 방안엔 책상과 가죽소파가 전부였다. 문득 그의 신발에 시선이 머물렀다. 한눈에도 디자인은 투박했지만 튼튼해보였다. 박 회장은 구두 밑창을 보여주며 “아주 튼실해서 쉽게 닳지 않는다”고 했다. “우연히 서울역 근방에서 찾아낸 신발 가게에요. 주인이 발 사이즈를 재서 딱맞는 신발을 만들어줍니다. 발이 편안해요. 게다가 가격이 5만원입니다. 괜찮죠. 한번 사면 3~4년 신는 거 같아요. 가끔 일 잘하는 직원들에게 선물로 사주기도 하고요.” (웃음)

박 회장은 근검절약 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어린시절 배고픔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전남 장흥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부친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났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박 회장 홀로 서울에 남았다. 당시 서울 성북구 용문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는 “남들처럼 교복 입고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고 했다.

집이 없던 그는 학교에서 지냈다. 수업이 끝나면 구두닦이, 오뎅과 떡볶이 장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모았다. 일이 끝나면 교실 책상이나 의자에서 쪽잠을 잤다. 가끔은 친구집을 돌며 신세를 지기도 했다. 겨울엔 서울 중구 평화시장에서 미싱사의 시다(보조) 일을 했다. 밤 늦도록 쪽가위로 실밥을 잘라면 공장 켠에서 재워주는 조건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년간 학교에서 살았다. 일화도 있다. 그는 용문중학교에서 처음으로 ‘전국학생달리기대회’에서 1등을 했다. 1등에겐 학비가 면제된다는 소식을 듣고 3~4개월 동안 죽도록 연습한 결과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달리기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다. 나중엔 학교에 육상부가 생길 정도였다.

박 회장은 사업을 하면서 “10여년 전 중·고교 담임을 수소문해 만났더니 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들려줬다. 스승의 날마다 찾아뵙고 식사를 대접한다고 덧붙였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은 어느 덧 여든이 다 됐는데 저만 보면 눈물을 흘리세요. 대견하다고요. 그때 선생님이 많이 챙겨줬어요. 옛날엔 불우이웃돕기 하면 봉투에 쌀을 담아 제출했습니다. 그러면 담임은 학생들 몰래 제 주머니에 봉투를 넣어주셨지요.”

고생한만큼 성공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그는 “되돌아보면 항상 자신과의 싸움이었다”며 “꼭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수백 번 다짐했다”고 들려줬다. 그 기반이 된게 바로 8t 덤프 트럭이었다. 제대 후 인천의 한 해운회사에 취직해 1년간 모은 전 재산 200만원을 쏟아부었다.

“한국석탄공사에서 무연탄 수입을 담당하는 지인이 귀띔해준 창업 아이템이었어요. 인천 부두에서 무연탄을 싣고 서울 등지의 연탄 공장에 나르는 일입니다. 당시 약 300대가 경쟁했어요. 남들보다 일감을 많이 받으려면 빨리 줄을 서야 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하니 오후 3시까진 와야했어요. 아예 2시부터 운전 기사를 깨워서 부리나케 달려갔지요. 항상 1등이었어요. 남들이 하루에 5번 운반할 때 적어도 8번 이상 물량을 받았어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의 인연

박 회장은 “당시엔 돈 버는 재미에 피곤한 줄 몰랐다”고 했다. 열심히 노력한만큼 큰 돈을 벌었다. 3년이 지났을 때는 덤프 트럭뿐 아니라 철근을 운송하는 카고 트럭까지 약 50대를 보유한 회사가 됐다. 대주중공업의 전신인 대주개발의 시작이었다. 점차 운송 영역도 넓혀갔다. 철근 운반을 맡으며 인천제철(현 현대제철) 협력업체가 됐다. 문제는 물량 확보였다. 특히 경비가 비싼 카고 트럭은 물량이 중요했다.

박 회장은 며칠을 꼼꼼이 따져보니 아예 철근을 생산해서 운반하는 게 이득임을 깨달았다. 그의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1년 후엔 부산의 낙동대교 프로젝트를 따낼만큼 성장했다. 지금까지 용산·청량리 민자역사, 현대차 울산 공장, 당진화력발전소 등 굵직한 건설에도 참여했다.

사업이 빠르게 성장한 데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90년대 초반 대전광역시 서구에서 현대건설이 정부청사를 지을 때 박 회장은 자재를 운반하는 사업을 맡았다. 새벽에 출근에 밤새 일하는 그를 현장에 방문한 정주영 회장이 눈여겨 봤다.

정 회장은 현장 소장에게 박 회장에 대해 물어봤다고 한다. 협력업체 중에서도 가장 일을 잘한다는 얘기를 듣고 즉시 박 회장을 불렀다. 정 회장은 악수를 건네며 “고생 많다”고 격려했다. 그리고 소장에겐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를 키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예상보다 빨리 기회가 왔다. 정 회장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지역 유세를 다니면 주민들은 아파트, 백화점, 다리 등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정 회장은 국민의 애로사항을 적극 수용했다. 불똥은 현대건설에 튀었다. 단기간에 건물을 세워야했기 때문이다. 건물의 뼈대를 세우는 철골사업 입찰에선 대주중공업이 유리했다. 박 회장이 쌓은 신용이 한몫했다.

박 회장은 당시 정 회장의 공약에 맞춰 아파트 건설부터 부산 현대백화점 설립 등 다양한 건설 사업에 참여하며 경험과 실력을 쌓았다. 약속도 지켰다. 공사 일정을 맞추기 위해 밤에 야간 조명을 켜고 일했다.

지금도 현대가와 인연을 맺고 있다. 대주중공업 운송사업의 고객 중 한 곳이 현대자동차그룹이다. 현대차의 울산공장과 아산공장에서 생산되는 완성차를 울산항 자동차 전용부두에 옮기는 일이다. 올해엔 기아자동차의 주요 거점인 평택항 자동차 하역 사업도 따냈다. 전체 규모는 현대자동차그룹 물량의 15% 수준이다.

박 회장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대주중공업의 미래 먹거리로 자동차 부품에 투자한다. 조금씩 성과가 나고 있다. 기존 철구조물 사업을 기반으로 자동차 머플러(소음기)용 스테인리스 파이프를 만들었다. 최근엔 알루미늄 범퍼도 개발했다. 우선 알루미늄 소재라 가볍고, 만일의 충돌에서도 범퍼가 충격을 흡수한 후 빠르게 원상 복귀돼 차체의 손상을 줄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이 범퍼가 지난 5월 말 현대자동차그룹의 수출 차량에 채택됐다.

박 회장의 카니발 트렁크엔 운동화와 반바지가 있다. 출장길에 멋진 길을 발견하거나 잠시 짬 날 때 달리기 위해서다. 그는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만큼 뛰고 나면 기분이 상쾌하다”고 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날엔 시골길을 달린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리고 배고픔을 참으며 달렸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박 회장이 끊임없이 달리는 이유는 한 가지다.

회사를 잘 키워 직원들과 이익을 나누기 위해서다. 사회에도 환원할 계획이다. 2012년엔 인천시 동구 송림동의 공장 부지 5000㎡를 인천시 동구에 주민복지용으로 기부했다. 금액으로 따지면 70억원 상당이다. 충남 당진의 대주중공업은 지역발전기금으로 6억2000만원을 기탁했다.

인천장학회 이사인 그는 앞으로 장학재단을 꾸릴 생각이다. 어린시절 자신처럼 형편이 어려워 학창시절을 힘겹게 보내는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201407호 (201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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