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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REPRENEURS | WILLIAM GRANT&SONS KOREA CEO KIM, IL-JOO 

“새로운 도전은 위스키만큼 짜릿하다” 

사진 김현동 기자
김일주 윌리엄그랜트앤선즈코리아 대표는 ‘한국 위스키시장의 전설’로 불린다. 그가 마케팅을 맡은 제품마다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형 위스키 윈저, 발렌타인 17년 등의 마케팅을 담당했고, 임페리얼 판매를 끌어올린 위조 방지 장치 ‘키퍼캡’을 개발했다. 그는 세계 3대 위스키로 불리는 ‘그란츠’ 론칭을 준비 중이다.

▎매일 위스키를 마시는 김일주 대표. 그는 나이 80세까지 룸살롱에 다니며 술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둥근 얼굴이지만 눈매가 매서워 첫인상이 차가웠다. 하지만 술 이야기를 꺼내자 아이처럼 좋아한다. 금방이라도 위스키 한 병 내올 태세다. 위스키업계의 산증인 김일주(54) 윌리엄그랜트앤선즈코리아 대표 이야기다. 지난 6월 11일 서울 송파동 본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김 대표는 1983년 백화양조베리나인에 입사하면서 위스키업계에 첫발을 뗐다. 우리나라에 위스키를 처음 선보인 백화양조베리나인은 두 차례 인수합병(M&A)을 거쳐 현재 디아지오코리아가 됐다. 서울사무소에서 마케팅을 담당했던 그는 이후 페르노리카코리아(옛 진로발렌타인스), 골든블루(옛 수석무역)를 거쳐 지난해 4월 윌리엄그랜트앤선즈 코리아 대표에 취임했다. 윌리엄그랜트앤선즈는 싱글몰트 위스키 글렌피딕과 발베니로 유명하다.

주류 업계에선 김 대표를 ‘위스키시장 전설’이라고 부른다. 국내에서 인기를 끈 위스키 상당수가 그의 마케팅을 거쳤다. 마케팅뿐 아니라 직접 개발한 제품도 있다. 임페리얼 위조 방지 장치인 ‘키퍼캡’과 저도주 위스키 골든블루다. 골든블루는 순하고 부드러운 술로, 최근 위스키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기분 좋은 호칭일텐데 그는 “잘못된 별명”이라고 말했다. 대신 ‘고물(古物) 김일주’로 불리길 원했다. 오래된 고(古) 자를 스스로에게 붙인 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모두 위스키업계의 산증인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 역정이 담겨있다.

첫 번째 고물의 의미는 ‘오랜 기간 한 곳에서 일한 사람’이다. 그는 32년 동안 4곳의 회사를 거치며 위스키 시장의 변화를 중심에서 겪어왔다. 1982년 조선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온 그는 술을 좋아해 주류회사에 지원했다. 매일 술 마시는 상상을 하며 1983년 백화양조 베리나인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그러나 회사 생활은 생각과 달랐다. 입사해 5개월까지는 아무런 실적이 없었고 위스키는 구경만 했다. 그는 “당시 영업사원은 업소 주인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던 시대였다”며 “유명 업소는 기존 거래처가 있고, 신생 업소는 주류회사에서 돈을 빌려 차린 후 거래하기 때문에 역시 끼어들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작은 업소를 찾아가 술을 마셨다. 작은 업소를 택한 것은 그나마 주인을 만날 수 있어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다보니 그 업소에 술잔이 몇 개 있는지 알 정도였다. 주인과 친해지면서 그들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됐다. 당시 주류회사에서 돈을 빌려 장사를 하는 업소 중 상당수가 부도 직전에 처해 있었다.


▎전 세계 가장 많은 위스키 원액을 보유한 영국 회사 윌리엄그랜트앤선즈. 올 연말에는 세계 3대 그란츠를 론칭한다.
어떻게 도울까 고민하던 중에 채무를 ‘분할 상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주류회사의 동의를 얻은 후 2년 동안 부도직전인 업소만 찾아 다니며 ‘분활 상환’ 방법을 알려줬다. 빌린 돈을 갚은 주인들이 그의 고객이 되면서 그는 ‘영업의 달인’이 되었다. 그 사이 회사는 두산씨그램에 인수됐다.

손 대는 술마다 대박 터져

1987년 마케팅부서로 발령이 났다. 영업맨에서 마케터가 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회사에서 그의 영업력을 높이 산 것이다. 하지만 마케터가 된 후 시련이 찾아왔다. 마케팅 담당이 외국인이어서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고, 마케팅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던 탓이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시 영업부로 보내주지 않으면 사표를 내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그는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회사를 그만 둘 일이 아니었다. 외국 사람들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자기 나라로 돌아가니까 잠시만 버티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5년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아침 7시에 나와서 1시간 반 동안 듣기 공부를 했다. 5년이 지나니 단어가 들리기 시작하고 7년이 지나니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2년 동안 마케팅 관련 서적도 많이 읽었다. 이론과 실무가 일치될 때마다 희열을 맛봤다. 그의 책장엔 마케팅 서적이 300권 정도 있다. 지금도 마케팅에 관한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사서 읽는다.

이런 오기만으로 김 대표가 잘 나가는 마케터가 된 건 아니다. 특유의 성실함도 한몫했다. 마케터가 되고 처음 2년 동안은 평일엔 집에 간 적이 없다. 이후에도 퇴근하면 거래처에 가 매일 술을 마셨다. 술을 많이 마시면 아침에 출근을 못할까봐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잤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보니 몸은 골병이 들었다. “죽더라도 회사에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산업재해 보상이라도 받을 테니까.” (웃음)

두산씨그램 시절 김 대표의 첫 번째 히트작 ‘윈저’가 나왔다. 한국인 입맛에 맞는 위스키를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기획했다. 론칭까지 딱 1년 걸렸다. 윈저가 큰 인기를 모은 건 당시 국내 시장에 없던 ‘프리미엄 위스키’였기 때문이다. 고급스런 패키지와 캐러멜 향이 크게 어필했다.

2000년 진로 발렌타인스 마케팅담당 이사로 옮긴 그는 ‘발렌타인 17년’을 국내에 성공적으로 론칭했다. 그가 세운 콘셉트는 ‘최고가 아니면 마실 수 없는 술’이었다. 발렌타인 17년은 호텔이나 고급 바에만 팔았다. 우리가 납품대금을 현금으로만 받자 술집에서도 손님에게 현금만 받았다. 그게 소문이 나면서 어떤 술이길래 그러냐며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2001년에는 국내 최초로 위조 방지 장치 ‘키퍼캡’을 ‘임페리얼’에 도입했다. 이 신기술 덕분에 임페리얼은 당시 시장 1위였던 윈저를 단숨에 꺾었다. 진로발렌타인스는 2005년 진로가 지분을 정리하면서 페르노리카코리아로 바뀌었다. “당시 발렌타인은 최고의 술인 동시에 가장 많이 팔리는 술이었다. 페르노리카에서는 한국 시장의 성장성을 보고 본사 체제로 바꿨다.” 2011년엔 수석무역 대표로 취임했다. 36.5도 저도주 위스키 ‘골든블루’를 부산지역에 론칭했고, 지난 5월부터 전국에 판매하고 있다.

“80세까지 룸살롱서 술먹고 싶다”

두 번째 고물의 의미는 ‘오랫동안 술을 마신 사람’이다. 전남 무안 출신인 그는 고구마 농사를 짓던 부모 덕에 술과 남다른 인연이 있다. 1970년대는 쌀이 귀하던 때라 고구마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많았다. 주로 삶아 먹거나 밀주로 만들어 먹었다. 초등학생 시절, 우연히 아버지가 남긴 술을 마셨는데 배가 부르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후 몰래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고3 때부터는 대놓고 마셨다. 대학때는 친구들 사이에서 ‘술꾼’으로 불렸다.

주량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김 대표는 “알 수 없다”며 술과 관련된 일화를 들려줬다. 페르노리카에서 일하던 시절, 영국에서 온 임원들 사이엔 경고문이 있었다. ‘서울에 가면 시에나 킴(Sienna Kim)을 조심해라.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 다음날 일어날 수 없다. 어쩌면 서울에 있는 내내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국내 위스키와 수입 위스키의 차이는 원액과 물의 비율에서 나온다. 국내산은 한국인 입맛에 맞게 제작해 향이 부드럽고 알코올 도수가 낮다. 막걸리는 4~5도, 소주는 높아야 25도라는 걸 생각하면 된다.”

세 번째 고물의 의미는 말 그대로 ‘망가진 몸’이다. 지난해까지는 주중에 매일 위스키 1~2병씩 마셨고 올해부터는 반 병씩 마신다. 그는 안주를 많이 먹어 ‘살찐 고물’이 됐다고 한다. “몇 년 새 몸무게가 20㎏ 늘었다. 현재 직원 7명과 내기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3개월 동안 10㎏ 감량이 목표다. 현재까지 4㎏가 줄었다. 아직까지는 내가 1등이다.” 그의 소원은 여든 살까지 룸살롱을 다니는 것이다. 그때까지 룸살롱을 다닐 수 있으면 몸이 건강하다는 것, 인생을 술과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윌리엄그랜트앤선즈는 글로벌 3위 주류회사로 연 매출은 2조원 수준이다. 국내에서는 2009년 ‘BLK 무역’이 보따리 장사처럼 글렌피딕 몇 상자를 수입해 선을 보였다. 2010년 11월 영국 본사가 100% 지분을 가진 외국계 기업으로 바뀌었다. 그는 “윌리엄그랜트앤선즈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위스키 원액을 보유한 곳이다. 다양한 도전을 할 수 있어 이 회사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주류회사는 트렌드에 민감한 곳이다. 최근 싱글몰트 위스키 유행에 대해 김 대표는 두 가지로 분석했다. 하나는 ‘고급화된 입맛’이다. 물에 섞어 희석한 술을 먹던 사람들이 원액의 진한 맛과 고급스런 향을 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사교 모임으로 술을 마시기’ 때문이다.

위스키 시장이 과거 접대 문화와 함께 성장했다면 이젠 사교의 매개체로 변모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내년엔 블렌디드 위스키가 다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을 조심스레 내놨다. 지난 5년 동안 대기업들의 접대비 축소, 위스키 가격 인상 등 부정적인 요소들이 시장에 반영돼 고전했지만 지금이 바닥이라는 분석이다.

김 대표는 연말께 새로운 도전을 시도한다. 세계 3대 블렌디드 위스키로 꼽히는 ‘그란츠’를 선보일 예정. 그란츠는 시바스 리갈, 발렌타인, 조니워커와 컬리터나 가격대에서 비슷한 수준이다. 현재 국내 위스키 시장의 87%를 차지하고 있는 임페리얼과 윈저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다. 지난봄엔 아이슬란드 수제 프리미엄 보드카 ‘레이카’를 론칭했다. 5년 이내에 디아지오와 페르노리카를 따라잡는 것이 목표다.

201407호 (201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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