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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진출 시동 건 김기석 로만손 대표 

글로벌 50대 패션그룹 꿈꾸는 트렌드세터 

오승일 포브스 차장 사진 오상민 기자
제이에스티나의 성공신화를 이끈 주역을 만났다. 김기석 로만손 대표는 순수 국내 브랜드로 전 세계 패션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패션업계의 트렌드세터다. 그의 꿈은 중국대륙 진출을 발판 삼아 해외 유수의 패션 브랜드들과 당당히 겨루는 패션그룹을 만드는 것이다.

▎시계 명가에서 글로벌 패션그룹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는 김기석 대표. 레드오션을 블루오션으로 만들어내는 탁월한 혜안으로 세계 시장에서 한국 패션 브랜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2003년 이탈리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김기석 대표는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로만손의 신사업팀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그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김 대표가 회사의 사활을 걸고 열정적으로 추진한 사업 아이템은 바로 주얼리. 이탈리아 왕가를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잡고 ‘제이에스티나’라는 주얼리 브랜드를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그는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이탈리아를 오가는 강행군을 했다.

사업 성공 여부를 섣불리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부담감도 크고 조바심도 났지만 김 대표는 더없이 행복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평소 ‘새롭게 도전할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하는 그는 남다른 안목으로 변화를 감지하고 대응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제이에스티나의 탄생 과정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김 대표는 “이탈리아 왕가의 생활 상을 속속들이 알기 위해 역사책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공부했고, 이탈리아 현지 디자이너들과 콘셉트를 상의해가며 2년을 꼬박 준비했다”고 말했다.

“제이에스티나는 이탈리아 왕가의 스토리를 주얼리에 녹여낸 국내 최초의 브랜드에요. 이탈리아의 공주이자 불가리아의 왕비였던 조반나 공주를 뮤즈로 탄생한 브랜드죠. 브랜드 이름도 조반나 공주의 이름에서 따 왔고 브랜드의 심벌도 그녀를 상징하는 티아라 왕관이에요. 브랜드의 컬렉션과 스토리는 조반나 공주의 라이프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한 것들이 대부분이죠.”

당시 국내 주얼리 시장은 예물용 고가 시장과 액세서리용 저가 시장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극과 극으로 양분된 주얼리 시장에서 스토리를 녹여내고 디자인이 강화된 제이에스티나를 들고 나서자 업계에서는 ‘미친 거 아니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어정쩡한 중간 가격대로는 시장의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주얼리 사업 성공 이끈 남다른 혜안


▎올가을 신상품인 라피네 느와 티아라 이어링.
김 대표는 기발한 발상과 절묘한 선택으로 이 같은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중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슈는 바로 피겨퀸 김연아 선수의 캐스팅이다. 2008년 김연아 선수를 처음 발탁할 당시 패션업계는 의아해했다. 가수, 배우 같은 연예인 모시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대다수의 선택과 달리 스포츠 선수를 기용한다는 것은 파격이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피겨스케이팅은 당시 국내에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스포츠였다”며 “하지만 빙판이라는 어려운 여건의 공간에서 빛을 발하는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이자 예술적인 감성으로 풀어낼 수 있는 스포츠가 바로 피겨스케이팅”이라고 말했다. “김연아 선수의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플레이가 티아라 여왕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졌어요. 당시 제이에스티나는 국내를 넘어 해외 진출의 물꼬를 터야 하는 상황이었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김연아 선수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고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김 대표의 열정과 신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김연아 선수의 모델 발탁은 패션업계에서 ‘신의 한 수’로 통했고 제이에스티나 제품들이 시장에서 대박을 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제이에스티나는 국내 액세서리 시장에서 선두를 다투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를 입증하듯 제이에스티나는 주얼리와 핸드백으로 지난해 매출 1307억원을 기록하며 로만손 전체 매출의 83%를 차지하는 핵심 사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 대표가 주도한 첫 번째 도전은 이처럼 오늘도 여전히 성공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고 있다.

주변에서는 김 대표를 두고 타고난 사업가라 평한다. 레드오션으로 보이는 시장을 비집고 들어가 결국에는 블루오션으로 만들어내는 탁월한 혜안을 제이에스티나의 성공으로 증명해 보였다. 김 대표를 주목해야할 이유는 또 있다. 로만손에서 탄생한 브랜드는 모두 순수 국내 브랜드다. 이 때문에 로만손은 패션업계에서 한국 브랜드의 가능성과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로만손은 1988년 김 대표의 친형인 김기문 회장이 설립한 회사다. 삼성시계, 아남시계 등 대기업이 주름잡던 국내 시계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겁 없는 후발주자는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해외 전시회에 출품하고 디자인과 기술을 개선했다. 결국 ‘주문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해외에서 성공을 거둔 후 금의환향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삼성시계가 퇴출되고 대우자판이 시계사업부를 정리하며 본격적인 물갈이가 시작됐을 때도 로만손은 1999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2001년에는 2000만불 수출탑을 수상했고, 2002년 스위스 바젤월드에 한국 최초로 명품관을 선보였다.

창업 이듬해 로만손에 합류한 김 대표는 성공가도를 달리던 김 회장의 헌신과 열정, 그리고 개척정신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배웠다. 김 회장은 무거운 샘플 가방을 들고 전 세계를 누빈 ‘무역업계의 전설’로 통하는 인물이다. 너무나 사업에 올인한 나머지 가방을 들고 다니던 오른팔이 왼팔보다 2~3㎝ 더 길어졌다는 일화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김 대표는 “형님이 회사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내가 결정권자라면 이렇게 해보겠다’는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했다”며 “항상 내 의지를 담아서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기회가 바로 스위스 시계의 공세에 밀려 정체기를 맞은 시계 사업의 대안으로 추진한 제이에스티나였다. 그리고는 얼마 후 더 큰 기회가 찾아왔다. 주얼리 사업을 통해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2007년 로만손의 전체 사업을 총괄하는 대표이사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대표직에 오르고 나니 주변에선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했지만 오히려 설레고 기뻤다”며 “내 의지와 구상을 가지고 결정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전준비에 철저한 소통형 CEO


▎지난해 말 상하이에 현지 법인을 설립한 제이에스티나는 올해를 중국대륙 진출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사진은 상하이 뉴월드다이마루 백화점의 제이에스티나 매장.
김 대표는 취임 전부터 구상해왔던 로만손의 비전을 자신의 집무실 한쪽 벽에 적어 붙였다. ‘2025년 글로벌 50대 패션그룹으로 도약’이 바로 그것이다. 단독 경영에 나선 지난 8년 동안 김 대표는 로만손의 몸집을 3배 이상 키우며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현재 로만손이 전개하고 있는 주요 아이템은 손목시계를 비롯해 주얼리, 핸드백, 향수 등이며 지난해 158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김 대표는 여느 기업의 CEO들처럼 4/4분기 실적과 흐름을 보고 이듬해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1/4분기에 이미 내년을 구상할 정도로 철저한 준비와 분석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시장을 분석하고 준비하는 김 대표에게 도전과 변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즐거운 일상이다. 그는 “철저히 준비하는 만큼 도전에 여유가 생긴다”며 “직원들 역시 한해 두해 목표가 이뤄지니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단순한 사전준비뿐만 아니라 후속조치 또한 김 대표에게는 중요한 부분이다. 서류 만들고 결재 기다리는 시간에 현장을 챙기라는 뜻에서 결재도 따로 받지 않는다는 김 대표는 제이에스티나가 탄생한 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매장을 찾아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선한다. 일선 현장에서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시장에 반영하고자 하는 열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게 먼발치서 한동안 매장을 지켜봅니다. 고객들이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무엇을 보는지, 어떤 제품이 인기가 좋은지, 직원들의 서비스 상태는 어떠한지를 체크하죠. 그리고 어떠한 변화와 조치가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직원들을 만나 제가 느낀 점들을 설명합니다.”

사실 김 대표의 이 같은 부지런함과 꾸준함은 일찍부터 몸에 밴 것이다. 농촌의 유복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김 대표는 아버지의 권유로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태풍이 불거나 폭설이 내려도 단 하루를 거르지 않고 무려 7년을 해왔다고 한다. 아홉 살짜리 꼬마가 중학교 2학년이 돼서야 아버지는 신문 돌리기를 그만두도록 허락했다. 그는 “지금도 왜 그렇게 오래 시켰는지 모르겠다”며 “확실한 것은 그 일을 계기로 시작한 일은 꾸준히 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인 셈이다.

세 번째 도전을 위한 새로운 여정


김 대표는 ‘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꿈이 있는 이에게는 작은 시련도, 큰 시련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제 경우만 해도 그렇죠. 회사에 어려움이 와도 꿈이 있으니 한껏 의연하고 차분해질 수 있더라고요. 또 직원과 회사의 꿈이 공유된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직원들과의 모임에서도 꿈과 도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시계·주얼리 전문 브랜드로서 우뚝 섰지만 김 대표는 아직 단 한 번도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이제 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로만손에 제 모든 열정을 다 바쳐왔습니다. 함께한 시간이 벌써 26년이나 됐네요. 로만손은 지금까지 두 번의 성공기를 거쳤습니다. 비교적 뒤늦은 출발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시장을 석권한 시계 사업과 새롭게 출발한 제이에스티나의 성공이 바로 그것이죠. 두 번의 성공과 철저한 준비로 초석을 다져온 만큼 세 번째 도전도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믿습니다.”

제이에스티나는 해외 진출을 추진하면서 첫 번째 시장으로 미국을 선택했다. 선진 시장에서 제대로 배우고 붙어보자는 판단이었지만 한류 열풍 속에 중국에서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서두르지 않고 면세점 판매 동향을 살피면서 몇 년 동안 서서히 준비를 해왔다. 대책 없이 중국에 덜컥 진출했다가 실패한 수많은 국내 패션 브랜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해 말 모든 채비를 마친 김 대표는 상하이에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제이에스티나에게는 올해가중국대륙 진출의 원년인 셈이다.

“6~7년 전부터 해외시장 진출을 추진해오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2011년 뉴욕 플라자호텔에 매장을 연 것과 면세점 사업을 확대해온 것이 밑거름이 됐죠. 이미 지난 2월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뉴월드다이마루 백화점에 첫 매장을 낸 데 이어 올해 안에 베이징 신광천지와 상하이 강후이 백화점에 입점할 예정입니다. 이들 백화점은 중국에서도 최고급으로 손꼽히는 명소인데요. 이곳에서 제이에스티나는 아르마니, 코치 등 해외 명품 브랜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시계, 주얼리, 핸드백에서 향수, 화장품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글로벌 종합패션그룹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는 김 대표. 그의 새로운 도전을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12년 전 이탈리아 왕가를 공부할 때처럼 또 다시 중국의 트렌드를 익히고 현지에 적합한 마케팅 방법을 찾아야 한다.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김 대표의 표정에선 신사업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준비된 자의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어깨는 무겁지만 여전히 도전할 수 있기에 그는 지금 행복하다.

- 글 오승일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오상민 기자

201510호 (201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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