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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환 아이리버 대표 

디지털 명가 재건한 명승부사 

오승일 포브스 차장 ·사진 오상민 기자
휴대용 하이파이 오디오 아스텔앤컨(Astell&Kern)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아이리버의 박일환 대표. 그에겐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쉽지 않은 고음질 음향기기 분야에서 그가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이태원의 스트라디움에서 만난 박일환 대표.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으로 아이리버의 재건을 이끌고 있는 그는 부드럽고 차분한 말투로 상대방에게 진심을 전하는 따뜻한 리더였다.
2011년 9월 어느날, 갓 취임한 신임 대표와 개발자들이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회의실에 집결했다. 주력 제품인 MP3 플레이어를 접고 휴대용 하이파이 오디오를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MP3 플레이어가 컬러 브라운관 TV라면 휴대용 하이파이 오디오는 3D 스마트 TV에 가까웠다. 음원을 재생시키면 아티스트와 오케스트라가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 사운드 자체가 달랐다. 노력에 노력을 더하면 제품은 만들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구매층이 한정돼 있다는 것, 그리고 높은 가격대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열띤 토론의 말미에 신임 대표가 힘주어 말했다. “하이파이 오디오는 음악 마니아들이 선호하는 영역이자 우리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랬다. 반드시 찾아야 할 길이었다. 그 길을 찾지 못하면 모두가 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회사는 천국과 지옥을 경험했다. 2000년 중반까지 회사는 글로벌 시장에서 MP3 플레이어의 신흥강자로 군림했다. 2004년에는 매출이 4500억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폭발적인 수요가 거짓말처럼 꺾이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매머드급 태풍이 불어 닥쳤다. 애플이 MP3, 전화, 인터넷을 한데 모아 놓은 아이폰을 출시한 것이다.

신임 대표는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려낼 묘책을 찾아야만 했다. 2012년 10월 세상에 나온 휴대용 하이파이 오디오는 회사가 던진 마지막 승부수였다. 한손에 들어갈 정도의 앙증맞은 크기였지만 성능은 내로라하는 고가의 오디오 장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 깨끗했다. 출시된 지 3개월 만에 전 세계에서 1만5000대가 팔려나갔다. 한국은 물론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등에서 음악 깨나 듣는다는 사람들이 다투어 지갑을 열었다. 마침내 회사는 2008년 이후 6년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기적같은 반전이었다.

휴대용 하이파이 오디오 아스텔앤컨으로 벤처 신화를 새롭게 써가고 있는 박일환(58) 아이리버 대표 이야기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던 아이리버의 극적인 턴어라운드(turnaround)는 경기 침체로 추진력을 상실한 국내 중소벤처기업들에게 신선한 자극과 희망이 되고 있다.

아이리버의 재도약을 이끈 박일환 대표는 30년 가까이 컴퓨터 분야에 종사해온 IT 전문가다. 음악과 전혀 무관한 일을 해오다 아이리버 대표를 맡아 내리막길을 걷던 회사를 짧은 시간에 흑자로 전환시킨 스토리는 한편의 드라마다.

고음질 오디오로 부활을 노래하다


▎아스텔앤컨의 첫 2세대 모델인 AK100Ⅱ. 1세대에는 없었던 와이파이 기능을 추가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성능을 자랑한다.
4년 전, 아이리버에 합류한 박 대표가 맨 처음 한 일은 본업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혁신의 유전자를 지닌 기업답게 고유의 능력을 끄집어내는 데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며 “고급 음질을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시장 환경과 아이리버가 세계 최고 수준의 포터블 기술을 가진 것을 고려해 고민하다보니 휴대용 고음질 플레이어를 떠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전 아이리버가 뭔가 더 할 수 있는 기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당시 아이리버가 잘하던 3가지 제품이 있었는데요. MP3, 전자사전, PMP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제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았죠. 스마트폰 때문에 설 자리를 잃은 거예요. 열심히 일했는데, 하던 일을 열심히 하면 죽는 세상이 하루아침에 온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잘하던 걸로 돌아가되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편리한 기능을 갖춘 MP3 플레이어가 갖지 못한 것이 바로 음질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음질이 좋은 휴대용 기기를 만들어 보자는 마음으로 출발했죠.”

회사를 살릴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는 티어드롭(tear drops, 눈물방울)으로 정했다.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적인 소리를 내는 제품을 만들어내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박 대표는 “티어드롭이라는 이름에는 신사업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는 과정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MBC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를 보게 됐는데,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더군요. 그런데 집에서 TV로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죠. ‘현장에서 노래를 들은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반응이 왜 이렇게 다를까?’ 하고 의문을 갖게 된 것이 티어드롭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요.”

아이리버가 험난한 기술 개발 끝에 선보인 신제품 ‘AK100’에 대해 소비자뿐만 아니라 오디오 업계 전문가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해외 박람회에서 디자인상과 기술상을 휩쓸었고, 해외 음악전문지와 커뮤니티에서 극찬을 받았다. 부피가 큰 고가의 기기로만 듣던 고해상도 음원(Mastering Quality Sound, MQS) 파일을 휴대전화보다 작은 포터블 기기로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아이리버는 후속 제품들을 잇달아 선보였고, 2014년 전체 매출의 54%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회사가 정상화되고, 초심으로 돌아온 아이리버의 다음 목표는 혁신적인 뮤직 컴퍼니가 되는 것이다. 박 대표는 이같은 비전을 “지나치게 고가에 형성된 오디오 시장을 정상화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음악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로 설명했다.

고대 그리스어로 별(아스텔), 독일어로 중심부(컨)를 뜻하는 아스텔앤컨은 아이리버의 장점과 정체성을 모두 담고 있다. 이는 아이리버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다룰 줄 아는 임베디드 시스템(embedded systems)을 보유했기에 가능한 결과다. 다시 말해 개발자가 단순히 단말기를 만드는 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원의 품질을 가늠할 귀까지 갖췄다는 뜻이다. 이는 글로벌 IT기업들이 막대한 기술과 자본을 쏟아도 단 시간에 결코 진입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박 대표는 “아날로그 기술은 디지털 기술과 달라 복제가 불가능하다”며 “우리의 과제는 소리의 정보를 좀 더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스텔앤컨을 디지털 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소리 자체는 디지털일 수 없어요. 오디오 시스템에서 다루는 파일들이 디지털일 뿐이죠. 소리가 지닌 정보를 아날로그 파형으로 바꾸고 왜곡 없이 원음을 보존하면서 들을 수 있는 크기로 키워야 하는데요, 그 작업이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아스텔앤컨에 들어간 기술은 매킨토시의 진공관 앰프가 그렇듯 아날로그 시그널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크기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건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 기술이죠.”

고음질 음향기기 사업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아이리버는 다시 한 번 부활을 위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지난해 10월 서울 이태원에 스트라디움(stradeum)이란 공간을 마련한 것.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구성된 스트라디움은 음악 감상은 물론 공연, 쇼 케이스, 음악 발표회, 녹음 작업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춘 음악 문화 공간이다. 세계적인 명품 현악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와 오디움(odeum, 음악당)을 합성해 좋은 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란 뜻을 담았다.

아이리버의 생존전략? 나음 아닌 다름

박 대표는 고음질 음원 감상에 대한 경험을 대중화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리버의 성장에 중요한 모멘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저렴한 가격보다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에 사람이 더 모여드는 것처럼 고음질 음악 대중화를 통해 사업적인 성과를 내겠다는 각오다. 국내에서 1년 정도 노하우를 축적한 뒤 일본 도쿄, 중국 베이징 등에 추가로 스트라디움을 설립할 계획이다.

“스트라디움은 음악이 무엇이고, 음악이 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물입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이 공간에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리버 대표가 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제게 회사를 살릴 전략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제겐 전략 대신 꿈이 있었어요. 기업으로 말하면 비전이죠. 그런데 그 꿈은 제 개인의 꿈이 아니라 우리의 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실행력이 더해지면 회사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죠.”

2014년 8월, SK텔레콤의 자회사로 편입된 아이리버는 조만간 SK텔레콤과의 협업을 통해 웨어러블 형태의 앱세서리(애플리케이션과 액세서리의 합성어)를 선보일 예정이다. 박 대표는 “2016년은 아이리버와 SK텔레콤의 시너지 효과를 본격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바로 나음과 다름입니다. 나음은 기존 생각의 확장이고 다름은 생각을 확 바꾸는 것인데요. 나음만 추구하다 보면 결국 모두가 똑같아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진정한 발전이 없어집니다. 그저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이제 더 이상 생존을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앞으로도 나은 것보다는 다른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아이리버의 진정한 턴어라운드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것이 초심, 즉 벤처 정신으로 재무장한 아이리버가 앞으로 계속 걸어가야 할 길이다.

- 글 오승일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오상민 기자

201601호 (201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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