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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투사 설립한 천양현 코코네 회장 

한국 벤처 일본 진출 돕는다 

글 최영진 기자·사진 오종택 기자
한국 IT 기업이 일본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역사를 쓴 천양현 전 NHN Japan 회장. 1000억원의 매출 목표를 이루고 난 뒤 일본에서 코코네라는 이름의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후배들에게 일본에서 성공의 과실만 따먹고 돌아왔다는 평가를 받기 싫어서다. 천 회장이 이번에는 한국에 창투사를 설립했다. 일본 시장에 도전하고 싶은 후배 창업가들을 돕기 위해서다.

▎NHN Japan을 통해 한국 IT 기업이 일본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 천양현 코코네 회장. 3월 초 한국의 후배 창업가들을 돕기 위해 ‘코그니티브 인베스트먼트’라는 이름의 VC를 설립했다.
그는 회사가 인정하는 샐러리맨이었다. 경원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ROTC(학군단) 장교로 전역한 후 모 증권사에 입사했다. 회사 내에서 ‘똑 부러지는 신입사원’이라는 칭찬이 자자했다. 하나를 시키면 알아서 두 개를 처리하는 눈치 빠른 사원이었다. 서류상에 기재된 수치의 오류도 잘 잡아냈다. 회사 임직원들은 일 잘하는 후배를 많이 챙겼다. 입사 1년 6개월이 된 사원을 영업소장으로 임명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회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초특급 승진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샐러리맨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책을 읽고 나서 한국이 아닌 다른 세상을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1990년대 초반이었다. 영업소장으로 영전한 샐러리맨은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홍세화 저)라는 책을 읽다가 ‘더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한국에서 배웠던 것들이 모두 맞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는 게 이유였다. 최루탄이 난무했던 대학 시절 선배와 책으로 배웠던 것이 진실인지 혹은 잘못된 것인지 직접 판단하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사람들이 많이 가는 미국과 유럽보다는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가치관이 비슷한 아시아 국가를 택했다. 일본이었다. “한국이 3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로 살았던 이유가 뭘까, 왜 일본은 한국보다 잘 살까?를 알고 싶었다”는 게 일본 선택의 이유였다.

1994년 1년 반 동안 직장에서 벌었던 월급과 쥐꼬리만한 퇴직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단지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서 택했던 일본행. 그곳에서 한국인 기업가로 성공스토리를 쓰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천양현(50) 코코네 회장의 이야기다. 3월 10일 서울 논현동에 있는 코코네 한국지점에서 천 회장을 만났다.

IT 업계에서 천양현 회장이라면 모르는 사람은 없다. 혹시 모른다고 해도 ‘한게임 Japan 창업자이자 NHN Japan 회장직을 맡았던 인물’이라는 소개가 이어지면 ‘아! 그 사람’이라며 무릎을 치게 된다. 천 회장은 일본에서 한국인이 창업한 IT 기업 최초의 성공 스토리를 일궈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에 이해진, 김범수가 있다면 일본에는 천양현이 있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초·중·고 동창인 김범수 카카오 의장과 ‘절친’이라는 것도 업계에서는 잘 알려진 일이다. “김 의장은 외향적인 성격이고, 나는 내성적이었다. 우리 둘이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인간은 뭘까’같은 존재론적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며 천 회장은 웃었다.

왜 일본은 잘살까? 의문 해결 위해 일본행

코코네(cocone)는 NHN Japan의 성공을 뒤로 하고 2009년 새롭게 창업한 스타트업이다. 코코네는 일본어로 마음(코코), 소리(네)에서 따왔다. ‘사람들의 마음 소리까지 소통할 것’이라는 의지를 담았다. 코코네는 ‘갑자기 들리는 영어’, ‘갑자기 말되는 영어문법’ 등의 어학 관련 서비스와, 모바일 아바타 서비스인 ‘포케코로’ 등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 “인지과학으로 석사학위를 땄다. 언어와 인공지능 등에 관심이 많고 이게 코코네의 서비스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코코네의 주력 서비스는 포케코로로 650만 명의 이용자가 사용 중이다. 천 회장은 코코네의 구체적인 매출액을 밝히지는 않지만, 매년 수백억원의 매출액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진다. 임직원 170명이 일하는 코코네는 일본 도쿄, 교토, 센다이, 한국 지점 4곳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소프트뱅크벤처스와 IDG벤처스로부터 약 80억원의 투자를 유치하면서 성장 가능성도 인정받고 있다.

천 회장의 이름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NHN Japan의 성공 덕분이다. 한게임 Japan을 모태로 만들어진 NHN Japan은 ‘일본에서 한국 IT 기업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속설을 깬 최초의 기업으로 꼽힌다. 2008년 NHN Japan은 일본에서 매출 100억엔을 기록하면서 업계를 놀라게 했다. “성공의 비결? 그동안 게임이나 여타 서비스가 일본에 많이 진출했지만, 현지화가 미흡했다. NHN Japan은 현지화를 해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2009년 6월 천 회장은 NHN Japan의 1000억원 매출 기록을 올리자마자 ‘졸업’했다. 주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여전히 성장가능성이 높은 기업을 떠나 스타트업 창업이라는 허허벌판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NHN Japan을 떠난 이유가 궁금하다”는 기자의 질문에 “한게임 Japan을 창업해 일본에 뛰어들 때 목표가 1위를 해보는 것이었다. 게임으로 1위를 한 후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며 천 회장은 웃었다.

NHN Japan 매출 1000억원 목표 이루고 ‘졸업’


▎코코네 주력 서비스로 꼽히는 모바일 아바타 서비스 ‘포케코로’ 앱의 스크린 샷. 일본 여성 유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좌) / / 일본 도쿄에 있는 코코네 본사. 디자이너가 많기 때문에 남성보다 여성 직원이 더 많이 일하는 기업으로 꼽힌다. / 코코네 제공
‘새로운 도전’은 천 회장의 인생을 설명해주는 단어다. 입사 1년 6개월 만에 고속승진을 할 정도로 인정받은 직장을 내던진 것도 그 때문이다. “1년 6개월 동안 번 돈은 일본에서 6개월 어학원 수강료와 1개월 집값 밖에 안됐다”고 천 회장은 회고했다. 일본에 간 후 3년 동안 하루에 잠을 5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공부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새벽에 집에 들어갔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게 새벽이었다”고 말했다. 막노동부터 시작해 서빙, 신문배달 같은 각양각색의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기 전 수중에 돈이 없어서 공원에서 노숙 생활을 한 적도 있다.

“고생하는 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게 더 값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 회장이 일본에 간 것은 ‘인간’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입학한 곳은 일본 와세다대학교 사회심리학 연구소였다. 이곳에서 공부를 하다 일본의 명문 사립대로 꼽히는 게이오대학에서 인지과학을 공부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과 전공자도 아니고, 컴퓨터도 몰랐지만 인지과학을 배우고 싶었다. 인지과학을 공부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군대까지 다녀온 터라 함께 배우는 동기생들은 천 회장보다 7살이나 어렸다. 공부하랴 아르바이트 하랴 힘든 날들을 보냈지만, 공부로는 뒤처지기 싫었다. 그는 “열악한 상황이어서 그런지 악착같이 공부를 하게 됐다”며 웃었다. 그 결과는 놀랍기만 하다. 게이오대학 정책미디어 석사과정을 졸업할 때 그의 석사 논문은 최우수논문상에 선정됐다. 학교에서는 박사 과정을 추천했다. “박사 학위를 따면 학교 강단에 설 수 있는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천 회장은 회고했다.

하지만 천 회장은 1998년 한국에 돌아왔다. 어머니의 암투병 소식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일본에서 이룬 것들이 모두 끊어질 수 있다. 게이오대학은 그를 위해 편의를 봐줬다. 게이오대학 내에 있는 한 연구소 연구원 타이틀을 달아준 것. “언제든 돌아와서 공부해라라는 의미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는 쉬지 못했다. 돈을 벌어야만 했다. “당시 MRI, CT 등은 의료보험 적용을 받지 못해서 부담이 엄청 컸다. 돈을 벌기 위해서 어머니 병간호를 하면서 PC방도 열었다”고 회고했다. 천 회장이 서울 강북 지역에 문을 연 PC방은 강남에서도 손님이 원정을 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서비스 질을 높였기 때문이다. 술이 취한 손님이 컵라면을 거부하자 집에서 라면을 끓여 배달해 단골손님으로 만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99년 천 회장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김범수 의장과 함께 한게임을 창업했다. “일본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김 의장이 창업을 제안했지만, 그때는 거절했다. 다시 김 의장이 사업 제안을 했고, 그때 창업 멤버로 참여했다”고 천 회장은 설명했다. 당시 광대역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시절이었다. “컴퓨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인터넷 환경이 좋아지는 것을 보고 사업성을 느꼈다.” 무엇보다 당시 IT 업계를 경험해봐야 할 것 같은 생각도 창업에 뛰어든 이유였다.

2000년 천 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6명의 직원과 함께 한게임 Japan을 설립했다. 당시 한국의 IT 기업이 일본에서 성공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개인 사정상 일본에서 계속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게 아쉬웠기 때문인지, 일본에서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고 천 회장은 회고했다.

그는 게임의 현지화를 첫 번째 사명으로 삼았다. 3년만에 10만 명의 회원수를 기록했다. 2004년 네이버 Japan과 한게임은 합병을 했다. 일본 사업은 천 회장의 몫이었다. 6명으로 시작했던 한게임 Japan은 4년 후 800여 명의 직원이 일하는 거대 IT 기업으로 발전했다. 매출 목표액 100억엔을 기록한 것은 한게임 Japan 설립 후 8년이었다. “김 의장도 NHN Japan을 떠난 상황이었는데, 우리 두 사람은 항상 아름답게 떠날 때가 언제인지를 이야기하곤 했다. 그때가 떠날 때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1위를 해보자는 목표를 이루고 그는 코코네 창업에 나선 것이다. “코코네의 매출에 만족하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코코네의 성공을 물어본다면 1% 정도라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고, 코코네도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답변했다.

6년 후면 천 회장의 일본 생활은 한국에서 살았던 때보다 길어진다. 일본이 제 2의 고향처럼 느껴진다. 일본 도쿄에 있는 코코네 사옥에 들어설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자신처럼 일본에 도전하고 싶은 후배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코그니티브 인베스트먼트에는 이희우(왼쪽) 전 IDG벤처스 대표도 동참했다. 이 전 대표는 ‘쫄투 (쫄지말고 투자하라)’ 진행자로 유명하다.
3월 초 한국에 ‘코그니티브 인베스트먼트(Cognitive Investment)’라는 이름의 창투사를 설립한 이유다. 천 회장이 창투사 의장을 맡았고, 이희우 전 IDG벤처스코리아는 대표를 맡았다. 김동환 전 소프트뱅크벤처스 이사는 코그니티브 인베스트먼트 부사장을 맡고 있다. 자본금 50억원은 천 회장이 전액 부담했다. “자본금을 회수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창업가 후배들이 성장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창투사가 됐으면 한다”고 천 회장은 밝혔다.

창투사 대표를 맡은 이희우 전 IDG벤처스 대표는 VC 업계에서 20여 년간 일한 베테랑이다.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국내 벤처캐피탈의 효시로 꼽히는 KTB네트워크에 입사해 벤처 투자에 입문했다. “학교를 다닐 때 우연하게 영화배우랑 밥도 먹을 수 있는 직업이 투자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 투자도 하고, 재미있는 경험도 할 것 같아서 창투사에 들어갔다”고 이 대표는 말했다. 이후 KTB네트워크, 리얼미디어 코리아 등을 거쳐 텐센트, 샤오미 등에 투자한 글로벌 VC인 IDG 한국 지사 대표까지 맡았다.

이 대표가 스타트업계의 유명 인사가 된 것은 2011년 말부터 유튜브를 통해 방송하고 있는 ‘쫄투(쫄지말고 투자하라)’ 때문이다. 창투사 대표로서 많은 창업가를 만났고, 기술력과 미래성이 있는 창업가들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방송이다. 그의 바람대로 이 방송을 통해 투자를 받은 창업가들도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이 방송을 통해 200여 개의 스타트업을 소개했는데, 이들이 투자 받은 규모가 1000억원이나 된다”고 설명했다. 쫄투 출연 이후 엑시트에 성공한 스타트업도 5곳이나 된다고 전했다.

‘이익의 70% 사회 환원’약속 지키겠다

세 명의 VC 공동창업가들은 이익의 70%는 사회에 환원한다는 약속을 맺었다. “성공한 기업가라면 사회에 어떻게 환원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뜻에 동참하는 이들이 있다는 게 멋있지 않나!”라며 천 회장은 웃었다. 천 회장은 “매주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의장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창투사 이름에 ‘코그니티브(인지적인)’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천 회장의 주요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이 앞서고 있는 인공지능, 머신 러닝, 휴머노이드 로봇 등 인지과학에 특화된 창투사가 되고자 하는 천 회장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세돌 9단과 구글 알파고의 대국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은 신규 창투사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했다. 이번 대국으로 인공지능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코그니티브 인베스트먼트도 덩달아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코그니티브 인베스트먼트의 첫 행보는 250억원 규모의 펀드 결성이다. “한국과 일본의 스타트업에 투자를 해 한일 간의 가교 역할도 할 것”이라고 천 회장은 강조했다.

- 글 최영진 기자·사진 오종택 기자

201604호 (201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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