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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환 더홈 회장 

가치 있는 주거문화 전하는 가구업계 큐레이터 

오승일 기자 osi71@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대한민국 가구 역사의 산증인을 만났다. 조창환 더홈 회장은 한샘의 해외사업을 총괄하던 노하우를 바탕으로 국내 고급가구 시장을 이끌고 있는 백전노장이다. 그의 목표는 가구를 넘어 가치를 전하는 정직한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쇼룸에서 포즈를 취한 조창환 회장. 남다른 혜안으로 고급가구 시장을 리드하고 있는 40년 업력의 가구쟁이다.
한국의 근대적인 주거문화를 논할 때 한샘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다. 1970년 조창걸(77) 명예회장이 설립한 한샘은 한국의 주거공간에서 가장 뒤처진 부엌을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부엌가구 전문회사였다. 싱크대라 통칭되던 부엌가구 시장에 시스템 키친, 인텔리전트 키친이란 용어를 처음 도입, 비효율적인 부엌을 편리하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며 부엌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70년대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한샘의 부엌가구는 큰 인기를 끌었고, 1977년에는 해외로 눈을 돌려 중동과 미국에 국내 최초로 부엌가구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수출이 100만 달러를 넘어섰고 1984년에는 1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이런 성공을 기반으로 한샘은 사업영역을 주방에서 거실, 침실, 욕실, 서재 등 주택의 모든 공간으로 확대, 대한민국 주거환경의 혁신적인 변화를 주도하며 국내 1위의 종합 인테리어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당시는 부엌가구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어요. 부엌은 그저 부뚜막이나 아궁이의 개념이었죠. 벽돌을 쌓아 타일로 덮고, 상수도 시설을 갖춘 개수대를 설치한 것이 전부였어요. 그러던 것이 일본에서 스테인리스 싱크대가 개발되면서 변하기 시작했죠. 오리표 싱크를 비롯해 원앙표, 백곰표, 거북표, 백조표 등이 모두 부엌 싱크대를 만드는 회사들이었어요. 부엌장을 짜 넣는 것도 동네 목공소에 의뢰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죠. 이때 한샘이 부엌장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는데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거에요. 그리고 장을 짜 넣다 보니 공간 설계도 해야 했는데 이것이 인테리어 컨설팅의 시작이었던 셈이죠. 모두 창업주이신 형님께서 건축을 전공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난 7월 5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더홈 본사에서 만난 조창환(66) 회장은 한샘의 설립 초창기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샘 성공 터 닦은 수출사령관


조 회장은 조창걸 명예회장의 친동생으로 한샘의 성공 신화를 이뤄낸 일등공신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조 회장은 1977년 한샘에 입사해 무역부를 창설하고 해외수출업무를 주도했다. “1976년 군 전역 후에 금호실업이란 종합상사에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우연히 부엌가구를 수입하는 중동 바이어를 만나게 됐죠. 형님께 얘기해 첫 수출을 성사시켰고, 그 일을 계기로 한샘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당시 현대종합상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가던 중에 형님 사무실에 잠깐 들렀는데 형님께서 저를 붙잡고 두 시간 동안 설득하던 것이 기억나네요.(웃음)”

1970~80년대 국내 건설사들의 중동 진출 붐은 한샘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에 현지 법인을 설립한 조 회장은 해외사업의 중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오일 머니가 쌓이면서 중동 지역에서는 근대화된 집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어요. 사우디 건설 현장을 돌아보니 시장이 무궁무진하더군요. 그곳에서 5년 동안 법인장을 지내면서 주택 20만 호 중 5만 호에 부엌가구를 공급했죠. 전 세계 수많은 기업들이 오더를 따내려고 비딩에 참여했고 거기에 얽힌 에피소드는 수백 가지도 넘습니다. 아마 책으로도 몇 권은 쓸 수 있을 겁니다. 1976년 5억 달러 수출하던 것을 1983년에 300억 달러로 만들었죠. 수출 비중이 60%가 넘었어요. 마침내 1984년 한샘은 수출 1000만 달러를 돌파해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했고 저는 상공부 장관상을 받았어요. 그것이 바탕이 돼서 국내에 유통망을 확대하고 내수 시장도 개척할 수 있었죠. 정말 정신없던 시절이었어요.(웃음)”

조 회장은 한샘 성장의 원동력이 된 또 하나의 일화를 소개했다. “쿠웨이트가 자신들의 국경 지역에 군사도시를 건설할 때였어요. 거기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땄는데 국내에서 자재를 조달하기에는 원가가 안 맞는 거예요. 원가율이 85%를 넘었죠. 고민을 하다 시선을 해외로 돌렸어요. 구매단을 두 개 만들어서 형님은 유럽을 다니고, 저는 미국을 돌면서 매일 통화했죠. 여러 군데를 접촉한 끝에 결국 자재를 반값에 살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해외의 자재가 훨씬 싸고 품질도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당시 국내에선 한두 개 업체가 독과점을 하다 보니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거든요. 가격은 둘째 치고 자재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죠. 근데 해외에 나가 보니 정말로 반값에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재를 수입해 15% 이윤을 붙여서 팔기 시작했죠. 한샘은 지금도 그렇게 자재만 팔아서 수백억원씩 매출을 올리고 있죠. 그걸 통해서 오늘의 기초가 만들어진 겁니다.”

중동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1985년부터 미국 시장 개척에 나선 조 회장은 미국 전역에 100여 개의 유통망을 개설하며 한샘의 성장에 힘을 보탰다. 이어 한국에 돌아온 그는 1990년 한샘디자인연구소 설립에도 기여했다. 한샘디자인연구소는 한샘이 종합 인테리어 기업으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한샘 디자인 경영의 모태가 됐다.

“제가 미국에 있던 1987년에 이케아가 필라델피아에 첫 매장을 열었어요. 거기에 형님을 모시고 방문한 적이 있는데 우리의 미래도 저렇게 돼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환경이 두 가지 변했어요. 하나는 한샘이 업계 1위가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출이 어려워졌다는 거였죠. 88올림픽 당시 굉장히 많은 스트라이크가 발생했고 인건비는 두세 배가 올랐어요. 한샘이 1위에 올랐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숙제가 된 거죠. 그때 내린 결론이 기술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생산보다는 유통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돌아와 만든 것이 디자인연구소에요. 그곳에선 디자인을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지, 인테리어 사업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연구했죠. 전 세계 모듈을 스터디해 보니 이케아 방식을 비롯해 마츠시다 방식, 홈센터 방식이 있더군요.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지금의 종합 인테리어 형태로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케아가 우리에게 하나의 개념을 준 셈이죠. 그렇게 해서 1997년에 국내 최대의 인테리어 전용 쇼룸을 개장하게 됐습니다.”

고급가구 브랜드로 제2의 도전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도리안 소파. 나뚜찌 이탈리아의 정교한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으며, 심플하고 우아한 실루엣이 인상적이다.
한샘에서만 28년간 몸담으며 격변의 시기를 함께 해온 조 회장은 2004년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이탈리아 명품가구 브랜드 나뚜찌를 국내에 소개하는 더홈을 설립해 전국에 54개 매장을 운영하는 종합가구업체로 성장시킨 것이다. 조 회장은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아파트형 주거문화에 적합한 양산형 모델들이 국내 가구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며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넓혀준다는 사명감으로 고급가구 시장에 뛰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한샘에서 오랜 시간 글로벌 비즈니스를 이끌며 고급 가구 시장의 성장 잠재력에 확신을 갖게 됐어요. 특히 부엌, 침실, 사무용 가구에서 거실 가구로 주거문화가 변화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 적중했죠. 나뚜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브랜드였어요. 1979년부터 꾸준하게 밀라노 박람회에 참가했는데 거기에서 나뚜찌를 처음 보게 됐죠. 나뚜찌는 세계적인 기업이에요. 당시 1조 매출에 1억 달러씩 흑자를 기록하고 뉴욕 증시에도 상장할 정도로 탁월한 회사였죠. 하지만 국내엔 이미 거래하던 회사가 있어서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2003년 말에 나뚜찌의 국내 거래처가 문을 닫으면서 저에게 다시 제안이 왔고, 형님과 의논 끝에 독립하게 됐습니다.”

1959년 설립된 나뚜찌는 123개국에 1200개 매장을 거느린 세계 소파 시장 점유율 1위 업체다. 이 회사는 업계에서 R&D 비용을 가장 많이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디자이너, 컬러리스트, 인테리어 전문가, 건축가 등 150여 명이 세계의 디자인 트렌드를 연구하고 그에 맞는 재료를 선별한다. 특히 해마다 6000개 이상의 스케치를 쏟아내고 이중 채택된 120개 정도를 상품화한다. 트렌드를 선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총 생산량 가운데 유럽에 61%, 북미에 31%, 아시아에 8%를 공급하고 있다.

“나뚜찌의 경쟁력은 숙련된 장인들이 고집스럽게 만들어내는 가죽의 품질이에요. 세계 최고의 가죽을 만들어내기 위해 공장을 알프스 산맥에 두고 그곳의 깨끗한 물만 사용합니다. 사람의 피부에 직접 닿는 가죽에 통기성과 신축성을 불어넣기 위해서죠. 또 하나는 조화인데요. 나뚜찌는 거실 공간을 창조하고 그 안에 문화를 만들어내는 거실 디자인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가구의 편의성과 함께 거실 인테리어를 완성하는 것이죠. 나뚜찌의 철학은 주거공간의 하모니 즉, 조화라고 할 수 있어요. 디자인과 기능의 완벽한 조합을 통해 생활공간을 조화롭게 완성시키고자 노력하죠.”

최고의 리빙 큐레이션 그룹이 목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복합 전시장. 나뚜찌 이탈리아와 나뚜찌 에디션스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플래그십 스토어다.
거친 물소가죽 일색이었던 국내 소파 시장의 트렌드를 바꾼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 회장은 ‘시장을 보는 안목이 남다른 것 같다’는 기자의 칭찬에 ‘안목이라기보다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더 적절할 거 같다’는 겸손으로 화답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세상은 반드시 이 길로 갈 텐데 현실에 안주한다면 답은 뻔합니다. 고생이 따르더라도 옳은 길을 선택하면 결국 이기게 되죠. 제 경험은 1977년부터 쌓여온 거예요. 지난 40년간 전 세계가 어떻게 가구를 만들고 있고, 어떤 형태로 움직이는지 지켜봐왔죠. 세계가 이미 정해진 길로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왜 가는지도 알고 있죠. 근데 국내에는 이런 사실이 소개가 안 되고 있다는 게 안타까워요. 공급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전 세계 시장의 60%가 이미 메모리폼 매트리스인데 비해 국내는 아직도 스프링 매트리스가 대부분이에요. 폼 매트리스는 이제 겨우 10% 정도에 불과하죠. 왜 그럴까요. 국내 시장의 53%를 점유하고 있는 선두기업이 신규 시장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당장의 이익에 급급해 어려운 길을 가지 않으려는 거죠. 더홈에서는 2011년부터 돌레란이란 폼 매트리스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를 계기로 조금씩 시장이 열리니까 지금은 너도나도 뛰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조 회장은 정도경영을 추구한다. 외형적인 성장에만 치중하기보다 올바른 방법으로 투명하게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소비자들이 반드시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직원들에게도 항상 매너리즘을 버리라고 강조한다.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혁신이 없이는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예측하면서 진취적으로 대응할 것을 주문한다.

“올해 더홈의 매출 목표는 350억원이며 3년 후에는 500억원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브랜드를 두세 개 더 늘린다면 조만간 1000억원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소파와 침대를 시작으로 아이템을 계속 늘려나갈 계획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조화로운 주거문화를 제안할 수 있는 큐레이션 기업으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최근 조 회장은 회사를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시켰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실무보다는 신규 사업에 주력하기 위해서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신성장동력을 발굴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잦은 해외 출장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조화로운 공간을 위한 제품을 찾고, 그에 맞는 유통 방법과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조 회장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그의 일 욕심은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 오승일 기자 osi71@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201608호 (201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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