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백남준과의 세 번의 만남 

 

글·사진 윤석재 미디어포인트 대표
올해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타계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타계 10주년을 기념하는 그의 작품 전시행사가 한창이다. 30여 년 전 독일과 파리에서 만난 백남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거장 백남준과 만나 그를 인터뷰하고 사진을 촬영했던 윤석재 대표가 글과 사진을 보내왔다.

▎84년 12월 13일 파리 몽파르나스 거리에서 백남준.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영역을 개척했다.
1982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소르본느 대학 부설 어학원에서 불어를 배우던 시절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어학원과 기숙사를 쳇바퀴 돌 듯 왔다 갔다 하던 그 무렵 불어 초보 과정을 마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83년 2월에 처음으로 그 유명하다던 퐁피두 센터를 방문했다. 퐁피두 센터 지하 1층 바닥에 TV모니터 400여 대가 놓여 있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그의 거대한 인스탈레이션(설치)작품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도대체, 누가 저런 작품 발상을 했는지 참으로 궁금했다. 한참 후에 작품명과 작가명을 적어 놓은 표지판을 찾을 수 있었다. 작품명은 ‘트리칼라(TRI-C0LOR)’, 작가명은 Nam June Paik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백남준이 그 작품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나의 뇌리 속에서 백남준이라는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파리 8대학교에서 영화와 영상학을 전공하면서 나는 다시 백남준이라는 비디오 아티스트에 관하여,그리고 비디오 아트라는 생소한 장르를 학문으로 접하게 되었다. 학부의 커리큘럼은 아주 다양했는데 영화, 방송, 비디오, 시청각 등에 관한 과목을 2년 동안 마음대로 선택하여 학점을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영화를 주 전공으로 하면서 비디오 아트를 부전공으로 할 정도로 비디오 아트 강좌를 많이 들었다. 여기서 다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정식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학문으로서 접근하게 된 것이 달랐다. 프랑스 비디오 아티스트이면서 백남준 연구가인 쟝 폴 파르지에(Jean Paul Fargier) 교수의 강의를 들은 것이 결정적으로 백남준 비디오 아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게 됐다. 한 학기를 마칠 무렵, 나는 다행히도 쟝 폴 파르지에 교수로부터 독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품 활동 중인 백남준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어떻게 생각이 났는지 또 용기가 났는지, 나는 백남준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에 파르지에 교수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처음 전화는 ‘당연히’ 실패였다. 그는 시간이 안 나니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젊음과 패기 앞에는 염치도 좌절도 통하지 않았다. 전화를 계속하길 7번째. 백남준은 마침내 인터뷰를 허락했다.

마침내 백남준이 인터뷰를 허락하다


▎84년 12월 7일 파리 미국문화원에서 만난 백남준. 백남준은 시련을 이겨내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끝까지 가서 세계 예술계의 별이 되었다.
백남준은 독일 노이스(Neuss)에서 거처하고 있는 주소를 나에게 알려주고 찾아오라고 했다. 독일에 가기 전까지 나는 파리에 있는 미국문화원에 가서 백남준 비디오 아트 작품을 분석했다. 당시 미국문화원에서는 유매틱(u-matic :방송용 비디오테이프)으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잘 보관하고 있었다. 인터뷰 날 전까지 나는 미국문화원에서 백남준의 대표작이자 히트작인 글로벌 글로브(Global Groove, 1973년 보스턴 공영방송국 WGBH 방영), 조곡212(Suite 212, 1975년 뉴욕 공영 채널 WNET 방영), 과달카날 진혼곡(Guadalcanal Requiem, 1977년 뉴욕 공영 채널 WNET 방영) 등을 수차례 보면서 궁금하거나 질문할 것들을 메모했다.

잊을 수 없는 그날, 1984년 5월 16일. 나는 아침 일찍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독일로 갔다. 인터뷰 날 저녁 무렵에서야 난 그의 독일 집을 방문했다. 미리 준비해 간 질문서를 바탕으로 한 시간 이상 그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인터뷰가 다 끝나고 나서야 정말 중요한 질문을 빠뜨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왜 일본으로 유학을 갔는지? (백남준이 일본으로 유학할 때쯤 6·25전쟁이 터졌거나 전쟁 중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왜 쇤베르크 음악을 연구했는지?, 왜 독일에서 플럭서스에 가담하여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부수고, 여성 구두에 물을 담아서 마시고, 자기 팔을 칼로 그어서 자해를 하는 등 이해 못할 예술 행위를 했는지?, 마지막으로 파리 퐁피두 센터에 전시한 TV 400여 대 설치예술(Installation art)에서 제목을 왜 트리칼라(Tri-color)라고 했는지? (트리칼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컬러TV에서 쓰는 빛의 3요소인 R-레드, G-그린, B-블루인 프랑스 국기를 트리칼라라고 한다. 프랑스 퐁피두 센터에서 작품 전시를 했기 때문에 전자적 예술 메시지를 담은 트리칼라와 프랑스 국기 삼색기를 일컫는 트리칼라, 이런 이중적 의미를 갖는 제목을 붙였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된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빠뜨렸던 것이다. 당시 너무 패기에 넘친 나머지 백남준의 초기 비디오 인스탈레이션(혹은 비디오 조각) 작품과 미국에서 활동했던 작품들만 중심으로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난다.


▎84년 5월 16일 독일 노이스 자택에서 만난 백남준. 필자의 첫 인터뷰였다.
그래도 인터뷰 뒤에 나는 글을 정리해 중앙일보가 발행하는 당시 『계간 미술』이라는 전문지에 기고했다. 백남준은 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으로 한국인들에게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라고 정식으로 소개되었다. 당시 백남준 신드롬이 태풍처럼 세차게, 그러나 아주 짧게 대한민국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의 기고는 그런 당시 영향도 작용했다. 나는 또 백남준과의 인터뷰를 불어로 번역해 나의 비디오아트 쟝 폴 파르지에 교수에게 리포터를 제출하고 학점을 따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기도 했다.

누보레알리즘 창시자 피에르 레스타니와 백남준


▎84년 12월 13일 파리 몽파르나스 거리에서 만난 백남준과 누보레알리즘의 창시자 피에르 레스타니(오른쪽).
84년 1월 1일 벽두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한 백남준은 84년을 마감하는 12월, <바이바이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을 시연하기 위해 파리를 방문했다. 84년 12월 5~7일, 3일간 파리 주재 미국문화원에서 백남준의 <바이바이 미스터오웰>의 퍼포먼스가 있었다. 나는 3일간 줄곧 미국문화원으로 가서 백남준의 비디오 퍼포먼스를 지켜 보았다. 퍼포먼스가 끝난 직후 역시 기사를 작성해 한국의 전문 잡지사에 기고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백남준의 곁으로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 갈수 있었고, 당시로서는 난해한 그의 작품 세계에도 좀 더 근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84년 12월 13일, 다시 백남준을 이번에는 파리에서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며 ‘물방울 화가’로도 불렸던 김창열 화백도 함께 동석한 인터뷰였다. 당시 필자는 젊고 패기만만했고, 미술에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기에 두 거장을 모시고 인터뷰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인터뷰 장소는 파리 몽파르나스에 위치한 유명한 카페 ‘라 쿠폴La Coupole’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백남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궁금해서 따라 나갔더니 백발의 한 중년의 서양인 신사에게 백남준이 다가가서 인사를 하는게 아닌가. 나중에 백남준이 내게 귀띔해주었는데, 자기가 만난 사람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라는 유명한 예술평론가라고 했다. 세월이 꽤 흐른 뒤 비로소 알았지만 그는 누보레알리즘의 창시자였다. 당시 백남준이 왜 그렇게 인터뷰 도중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서 그를 만났는지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피에르 레스타니는 당시 패기만만한 내가 알고 있던 그런 유명인사가 아닌, 백남준이 뛰어나가 마중나가야 할, 차원이 훨씬 다른 유명인사였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비디오 아트 개척


▎84년 12월 7일 쟝 폴 파르지에 교수와 파리 미국문화원에서 대화하고 있는 백남준.
유학 후 귀국한 나는 한동안 KBS 서울올림픽 방송 제작국에서 올림픽 방송 특수영상(컴퓨터그래픽 3D 애니메이션) 제작의 미션을 받고 근무를 했다. 당시 나는 비디오 아트에서 조금 먼 업무를 하고 있었다. 백남준을 다시 만난 것은 그를 마지막으로 본 후 10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1994년, 신라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아무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백남준과 나는 맞닥뜨렸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몇 층에서 정지하는 듯 하더니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어디서 본 듯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 보았다. 백남준 역시 10년이 지났는데도 나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약간 더듬거리며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의 20대 청춘 시절, 특히 파리 유학 시절, 나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의 당시 조우로 나는 비디오 아트 전문가가 되었고, 한동안은 비디오 아티스트 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나는 끈기가 없었다. 그 후로 한참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다시 나는 영상예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한 우물을 파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백남준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다.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아티스트다. 그는 수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영역을 개척했다. 그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엄청난 시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시련을 이겨내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끝까지 가서 세계 예술계의 별이 되었다. 이것이 세계의 예술학자들도 비디오 아트하면 백남준을 태두로 평가를 하고 그의 작품들이 세계 유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유다.

- 글·사진 윤석재 미디어포인트 대표

201608호 (201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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