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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7) 김승호 보령제약그룹 회장 

성실과 신의로 약업보국 이룬 한국 제약업계의 개척자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자료 협조 보령제약그룹, 한국경영사학회
포브스코리아가 한국경영사학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7 번째는 10월 1일 창사 59년을 맞는 보령제약그룹이다. 중보 김승호는 보령제약그룹의 주춧돌을 놓아 그룹으로 성장시킨 정신적 지주이자 한국 제약업계의 개척자다. 그는 보령제약을 한국 굴지의 제약그룹으로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과 사회공헌을 일찍부터 실천해왔다. 김승호의 기업가정신을 보령제약 기업사의 주요 4가지 장면으로 집약해 조명했다.

▎중보 김승호는 보령제약을 한국 굴지의 제약그룹으로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과 사회공헌을 일찍부터 실천해왔다.
지금의 보령제약그룹을 만든 첫 번째 이야기는 보령약국을 개업한 중보(中甫) 김승호(金昇浩, 1932~) 회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중보는 충남 보령군 웅천면 태생이다. 타고난 근면 성실함에다 산골소년의 순박함을 간직한 그는 선비정신이 몸에 밴 부친으로부터 자신에게는 엄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운 유교적 문화를 전수받았다. 이는 중보의 기업인 인생을 관통하는 특징적인 태도(attitude)이기도 했다.

중보는 어린 시절, 큰형인 김영제가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향에 대창약방을 열게 되면서 약품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됐다. 숭문중학교 진학을 위해 상경한 그는 홍성약방을 경영하는 사촌형 김인호의 집에 기거하면서 틈틈이 약국 일을 거들었다. 6·25전쟁으로 학병으로 입대한 중보는 교관의 권유로 장교로 임관하게 되지만 호구지책의 직업 군인보다는 눈앞에 약국이 어른거려 고민하게 된다. 그를 아끼던 상관인 엄소령이 “자네의 성실함과 책임감이라면 나가서 굶어 죽지는 않을 거야”라며 그의 예편을 도와주었다. 입대 7년 만인 1957년에 민간인 신분이 된 중보는 다시 홍성약국을 찾아 약국 사업에 대한 의지를 키워 나갔다. 집안의 매형뻘 되는 김선기로부터 약업경영뿐만 아니라, 약업계의 동향까지 세세하게 가르침을 받았다.

1957년 10월 1일, 중보는 동대문시장이 인접한 종로 5가의 5평짜리 알토란같은 건물을 임대해 개업한다. 지금의 보령제약의 효시다. 약국 이름은 그의 고향 보령(保寧)을 잊지 않고자 하는 마음에서 지었다. 국민의 편안 함(寧)을 지켜준다(保)는 제약보국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중보는 개업 이후 신혼의 달콤함도 마다한 채 약국 경영에 온 힘을 쏟았다. 약국에서 숙식을 하는 경우가 많아 그의 아내 박민엽이 음식을 약국까지 머리에 이고 가져왔다.

신용과 성실로 성장한 보령약국


▎보령약국은 종로5가 약국거리의 원조이자 발상지다.
중보는 ‘준비된 약국인’이었다. 소매약국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차별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도매상으로부터 공급받은 가격에다 최소한의 이익만을 붙여서 팔았다. 그리고 서비스 정신으로 승부했다. 고객이 원하는 약이 없으면 자전거를 타고 서울 시내를 다 뒤지고 다녀서라도 반드시 구해 주었다. 상표 하나라도 떨어졌거나 비뚤게 붙여진 제품은 절대로 팔지 않았고, 아무리 사소한 약품이라도 하나하나 복용법이나 사용법, 부작용 등을 꼼꼼히 설명해 주었다. 약국 문이 다 닫힌 후에 갑자기 병이 난 손님이 급히 약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떤 약국보다 먼저 문을 열고 뒤늦게 문을 닫았다. 보령약국에서 약품을 사면 교통비나 점심값을 제하고도 가격이 싸다 보니 서울 외곽의 먼 지역에서도 고객들이 몰려왔다.

중보는 약국경영도 창의적으로 했다. 관행으로 굳어진 업계의 외상 거래 대신 현금으로 거래했다. 당장에 자금회전이 좋아지게 된 제약회사들은 보령약국을 최우선적인 거래처로 대접했다. 이로 인해 융통성 있게 약품 단가를 책정하여 적당한 이윤을 붙여 팔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보령약국은 종로통에서 가장 큰 소매약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중보는 안주하지 않았다. 1962년 3월 ‘보령약품’이라는 이름으로 도매업에 뛰어들었다. 도매업은 소매업과는 달리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관리기법이 필요했다. 중보는 조직구조를 영업부·경리부·창고부의 세 부서로 정비하여 짜임새 있는 영업활동을 펼쳐갔다. 그리고 약국 매장 내에 약품 진열대를 설치해 약품을 종류별로 구분했다. 이로 인해 신속하고 정확하게 약품을 관리할 수 있었고, 고객들이 내부의 정돈 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신뢰와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로서는 어느 약국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은 독특한 진열 방식이어서 견학을 오는 약국 경영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중보는 또 당시 어떤 약국에서도 없었던 전표제 관리 방식을 도입했다. 약사의 처방이나 고객의 요청에 의해 약품을 반출할 때마다 약사에게 일정한 서식의 전표에다 그 내용을 기재하도록 하고, 관리부서에서는 이를 넘겨받아 해당 약품을 창구로 내보내도록 하는 제도였다. 전표제를 도입한 후 재고 파악이 정확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져, 잘 팔리는 약품과 그렇지 않은 약품이 금방 확인되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중보는 약국경영을 시작한 지만 6년 만에 도매상의 확고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1960년대, 서울 시내에는 ‘종로5가를 지나는 사람 중 다섯에 하나는 보령약국 손님’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1970년대 이후에는 전국에서 도소매상이 모여드는 ‘약국거리’가 형성되면서 보령약국은 종로5가 약국거리의 원조이자 발상지가 되었다.

종로5가 약국거리의 발상지가 되다


▎(왼쪽) 일본 류카쿠산 기술자들과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맨 오른쪽)이 용각산 생산설비를 둘러보고 있다. / (오른쪽) 1967년 6월 시판된 보령제약의 용각산은 각종 미세먼지와 대기오염에 의한 호흡기질환을 관리하고 예방하는 의약품으로 40년 넘게 소비자의 사랑을 받는 장수의약품이다.
보령약국 이야기를 통해 중보의 특징적인 기업가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신의·성실경영이다. 중보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 믿음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성실한 자만이 남으로부터 이해를 구할 수 있고, 그 상호이해의 전제 아래 서만이 비로소 신뢰의 소중한 끈이 맺어진다”고 강조했다. 그의 신의성실주의 정신은 기업가 중보의 인생을 관통하는 생활철학이자 가장 두드러지는 기업가정신이다.

중보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한 고승희 단국대 경영학과 명예교수에 따르면, 상인이 신용을 얻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점포 안에서 얻는 것과 점포 밖에서 얻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점포 안의 종업원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고, 후자는 밖에 있는 고객으로부터 신용을 얻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융화되어 나타날 때 사업은 번창한다. 고승희 교수는 중보가 개성상인으로부터 이어진 이러한 한국의 상인정신을 투철하게 지니고 약국경영을 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고승희 저『 한국기업문화의 조명』 제9장 김승호의 창업정신과 보령문화)

중보는 고객이 찾는 약품이 없을 때에는 서울 시내를 누벼서라도 구해다 주는 열성을 보였다. 약국 직원의 생일에는 자상하게 생일을 챙겨주어 가족의 어버이와 같은 신뢰감을 얻었다. 점포 안의 종업원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밖에 있는 고객으로부터 신용을 얻은 것이다. 이는 훗날 그의 인본주의사상, 이타사상(利他思想)을 핵심으로 하는 중보사상을 형성하는 근본바탕이 되었다.

1963년 10월 1일, 중보는 보령약품을 개편, 보령약품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표이사가 되었다. 31세 때의 일이다. 소매약국에서 전국적인 도매상으로 성장해온 보령약국이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이듬해인 1964년, 중보는 보령제약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약을 만들기 시작한다. 중보는 서울 종로의 연지동 공장에서 첫 생산 제품 ‘오렌지 아스피린’을 출고하면서 “제약인으로서 결코 장삿속으로만 약을 만들지는 않겠다. 많은 이의 질병을 낫게 하고 고통을 덜게 해줄 수 있는 제약인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그 각오는 이후 그의 제약인생을 관통하는 화두이자 핵심이 되었다. 중보는 깐깐했다. 약품의 원료 구입부터 최종 출하 단계까지 꼼꼼히 점검했고, 포장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잘못되었으면 즉각 폐기 처분하고 다시 원점에서 생산하도록 했다. 중보는 의아해하는 직원들에게는 “우리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약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보령제약의 이름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용각산이다. 1966년 2월 26일, 중보는 상호를 보령제약주식회사로 바꿔 달고 본격적인 제약기업으로 도약을 시도한다. 우선 기술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외국과의 기술제휴를 시도하는데, 특히 생약제제에서 앞서가고 있던 일본에 주목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중보는 당시 국내에 소량 수입되고 있던 진해거담제 용각산(龍角散)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용각산은 18세기 중엽 일본에 갓 들어온 서양의학이 전통적인 약효와 접목되면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중보가 회고한 한 대목을 살펴보자.

인내와 도전정신으로 일군 용각산 신화


▎1991년 세계대중약협회 제 10차 총회에서 회장 자격으로 환영인사를 하고 있는 김승호 회장. 명실공히 한국 제약업계의 대표로 활동했다.
“일본 류카쿠산사에 기술제휴 의중을 묻자 자본금과 매출액, 직원의 수, 특히 생산 설비 등 상세한 자료를 요청했다. 나는 새로 건설할 서울 성수동 공장 설계도를 내놓았다. ‘이런 공장을 지을 예정이니까 믿어 달라’고 했다. 6개월 뒤 마침내 일본에서 실사단을 파견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들을 차에 태운 후 허허벌판으로 아직 땅도 고르지 않은 성수동 공장 부지로 향했다. “보십시오. 첨단 설비의 공장이 보이지 않습니까? 용각산이 한국에서 성공할 거라 믿는 사람에게만 공장이 보일 겁니다.” 차에 올라 탄 부사장이 한 마디 했다. “공장 잘 봤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류카쿠산의 후지이 야스오 사장과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했다. 마침내 1967년 4월 성수동 공장이 완공됐고 1967년 6월 26일 보령제약이 최초로 용각산을 생산했다.” 입이 딱 벌어지는 스토리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조선소를 짓기 위한 차관을 얻기 위해 영국은행 간부에게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던 배포와 비견되는 도전정신이다.

용각산 스토리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고비가 있었다. 제품을 생산했지만 이전에 일본 제품을 사용해 본 사람들의 입에서 ‘품질이 떨어진다’는 말이 나왔다. ‘본사에서 기술진이 나와 원래 사용하던 그 원료 그 기술로 그대로 만들었는데 품질이 떨어지다니?’ 문제는 국산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입견이었다. 미제나 일제라면 무턱대고 신뢰를 하던 시절이었다.

중보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다 걷어 들이세요!” 이미 약국으로 들어간 제품까지 전격 회수했다. 엄청난 금전적 손실이 따르고 어쩌면 회사가 문을 닫을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중보는 개의치 않았다. 기업 경영사로 보자면 스마트폰 갤럭시 노트7을 전량 리콜하기로 한 지금의 삼성전자를 보는 격이다. 회수된 제품을 면밀히 분석한 중보는 문제점을 제품의 디자인과 포장에서 찾았다. 악품 자체보다는 포장상태 즉, 알루미늄 용기와 상자의 질, 인쇄 상태가 일본 제품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중보는 새 용기를 만들 원료를 찾기 위해 영등포 일대를 열 두 시간 이상 샅샅이 돌아다닌 끝에 적정한 철공소를 찾아 용각산 포장 문제를 해결해낸다.

중보는 포장 문제를 해결한 뒤 용각산의 품질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대대적인 TV 광고를 시작한다.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용각산은 미세한 분말의 순수 생약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바로 그 용각산 광고다. 당시 용각산 광고비는 단일 품목으로는 국내 최고를 기록했다. 용각산 스토리는 중보의 또 다른 기업가정신,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척자정신과 도전정신을 보여준다.

용각산은 이후 명실 공히 보령제약을 대표하는 제품이자 국내 약업계를 대표하는 생약제제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생약제제 개발로 미래 먹을거리를 찾고자 했던 중보의 통찰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중보는 기업가로서의 경영능력을 신장시킬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수강하는 주경야독에 매진한다. 경영 현장에서 체득되는 경험과 학술적으로 터득한 관리기법을 지혜롭게 조화시킴으로써, 기업성장을 이뤄내는, 진취적이고 학구적인 기업가의 모습이다.

겔포스의 성공과 수해 위기 극복


▎지금도 시판되고 있는 위장약 겔포스. 보령제약이 1974년, 프랑스의 비오테락스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해 판매를 시작했다.
사람의 인생에 고비가 있듯이 기업도 성장과정에서 크고 작은 위기를 겪게 마련이다. 그리고 기업가정신은 그 위기에서 빛난다. 세 번째 장면, 겔포스와 안양 공장 수해 극복에 얽힌 이야기다.

1974년 안양공장이 가동된 후 보령제약은 외국 제약회사들과 기술제휴로 체결한 약품들을 다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프랑스의 비오테락스사(社)와 기술제휴 및 원료공급 계약을 체결해 생산·판매한 위장약 겔포스가 보령제약의 새로운 효자약품으로 등장한다. 지금도 판매되고 있는 그 겔포스다. 하지만 겔포스의 역사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중보의 기억을 바탕으로 당시를 재구성해보자.

1977년 여름은 수도권에 30년 만에 가장 많은 비가 쏟아진 날이었다. 밤새 내린 비는 안양천을 범람시켰고, 그 거센 물줄기는 하천변에 위치한 보령제약 안양공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공장으로 달려가 물살을 헤치고 공장으로 들어간 중보의 목까지 흙탕물이 차올랐다. 보령제약 간판인 겔포스 라인을 비롯하여 모든 고가의 최신 설비는 물론, 약품과 원료가 모두 진흙으로 변해 있었다. 자식 같은 의약제품들이 흙탕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중보는 낙담했다. 하지만 그 절망의 순간에도 보령제약 몇몇 직원들은 정신을 차렸다. 시키는 사람도 없는데 하나 둘, 옷을 입은 채 가슴까지 차는 물속으로 들어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제품들을 주워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중보가 목이 메었다. 중보가 물에 잠긴 책상 위에 올라섰다. “오늘 우리가 이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회사 문을 닫는다 해도 저는 행복합니다. 바로 이 진흙 속에 사우 여러분들과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진 남은 모든 것을 다 팔더라도 여러분들이 구멍가게라도 열 수 있는 돈을 마련하겠습니다.” 사장의 그 말을 듣고 여직원들부터, 그리고 나이든 직원들까지 모든 직원들이 눈물을 훔쳤다. “만약 우리가 다시 일어선다면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멀리 갈 것입니다. 저 혼자 가면 빠를 수도 있지만 멀리 가지는 못할 겁니다. 비록 늦게 가더라도 언제나 함께 멀리 가겠습니다.” 중보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정부 피해조사단의 예측으로는 최소한 1년의 복구 기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지만, 보령제약은 단 4개월 만에 공장을 정상 가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일은 보령제약 소비자들의 도움이었다. “평생 용각산을 애용하는 소비자입니다. 부디 힘을 내십시오.”, “보령이 없어지면 제 쓰린 속(겔포스)을 어떡합니까?” 전국에서 격려전화와 편지, 성금이 답지했다. 그렇게 보령제약은 다시 일어섰다.

중보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보령제약은 더욱 강해졌고, 어떠한 어려움에 내몰린다 해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나는 큰 빚을 졌다. 여생을 그 빚을 갚는 데 쓰리라 결심한 것도 그때였다.” 보령제약은 1979년 1월부터 한 달도 빠짐없이 생일 조찬회를 열어왔다. 매월 셋째 주 월요일 아침 본사 식당에서는 그 달 생일을 맞는 임직원들을 초대하여 조촐한 파티를 열고, 미역국과 케이크 등 생일 음식을 나누었다. 참석한 임직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중보가 시작한 생일 파티는 이후 4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보령제약의 문화가 됐다. 중보의 인본주의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1988년 6월 30일, 중보는 보령제약의 기업공개를 실천했고, 우리사주조합을 결성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하는 각오와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보령제약은 수해 위기극복을 통해 모든 사원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나아가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소중한 기업문화를 가지게 됐다. 중보는 말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위기가 온다. 한 기업도, 한 나라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구성원, 국가의 국민들이 위기의식을 나눌 때 공존은 이루어지며, 나아가 공영을 누릴 수 있다.”

위기를 극복한 보령제약은 튼실하게 성장했다. 제약업계에서 차지하는 중보의 위상도 높아졌다. 중보는 2014년 제42회 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보건 향상을 위해 기여해 온 점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중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인본주의에 입각한 공존공영과 제약보국


▎보령제약그룹 사회복지법인 보령중보재단은 보령제약그룹 창업 50년을 맞은 2007년 김승호 회장이 사회기여활동을 보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사재를 출연해 설립했다. 현재 저소득층, 다문화가정, 장애아동 등을 위한 교육 및 지원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사업의 범위를 점차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1991년은 보령제약의 또 다른 도약이 시작된 해다. 계열사를 늘려 보령제약그룹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중보 자신이 한국제약협회 정기총회에서 제13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한국 제약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또한 260개에 이르는 제약업체를 대표하는 세계대중약협회장도 맡게 되면서 중보의 기업가활동이 국내를 떠나 글로벌로 확대된다. 이제 중보의 기업가정신의 대미를 장식할 공존공영과 제약보국을 이야기할 차례다. 중보는 1991년 신년사를 통해 “기업은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 속의 조직체이고 개인이 모인 집단인 만큼 공존공영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며 중보사상의 핵심인 공존공영을 강조한다. 아울러 그룹의 위상에 걸맞은 새 터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94년 2월, 원남동에 지하 7층, 지상 18층의 보령빌딩을 완공한다. 여기에서 중보는 보령인들에게 창업자의 새로운 메시지를 전한다. “물은 쉼 없이 먼 길을 달리면서 스스로를 맑게 만들어 간다. 고인 물은 결국 썩고 말듯이 변신을 위한 자기개발과 자기혁신을 게을리 한다면 시대의 낙오자가 되고 만다.” 중보가 강조한 자기 혁신은 이후 신약 개발로 이어진다.

그리고 2010년 9월 9일. 보령제약의 첫 번째 글로벌 신약 ‘카나브’가 마침내 신약 허가를 받는데 성공한다. 1962년 ‘오렌지 아스피린’을 생산한 지 48년 만에 보령의 이름으로 신약을 개발한 것이다. 카나브는 12년의 노력을 통해 개발되었다. 신약은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신약을 개발할 수 있는 기업은 전세계적으로도 50개가 되지 않는다. 환자들의 약값 부담을 덜어줄 뿐 아니라, 두 자릿수 이상의 빠르고 우수한 혈압 강하 효과를 나타내는 카나브는 글로벌 신약으로 인정받으며 보령제약과 한국 제약기술의 위상을 높여주고 있다.

중보의 공존공영 정신은 사회공헌활동에서 빛난다. 보령제약그룹은 오래 전부터 국민 건강과 사회공헌을 위한 순수비용만으로 순이익의 15% 이상을 쓰고 있다. 이 비용은 다양한 부문에 쓰여진다. <의협신문>과 공동으로 보령의료봉사상을 제정해 ‘한국의 슈바이처’를 찾아내 시상하고 있다. 남수단 톤즈에서 인술을 펼치다 마흔 여덟의 나이로 아까운 생을 마감한 고 이태석 신부도 2007년 보령의료봉사상을 수상했다. 보령제약과 한국암연구재단이 공동 제정한 ‘보령암학술상’은 국내 종양학 연구 분야만을 대상으로 하는 유일한 상이다. 구순열, 구개열을 앓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특수 젖꼭지를 나누어주고 있는 사업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2008년에는 사회복지법인 보령중보재단(이사장 김승호)을 설립해 도움이 필요한 더 많은 이들을 돕고 있다.

중보는 2009년, 큰 딸인 김은선(58)에게 보령제약의 경영권을 물려준다. 김은선 회장은 취임 후 보령제약을 제약업계 10위권에 올려놓았고,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 파워 여성 기업인 50인에 매년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 무엇보다 ‘인본주의에 입각한 공존공영의 실현’을 위해 애쓰면서 말이다.

신뢰의 결과가 바로 풍년이더라


▎서울 원남동에 자리잡고 있는 보령제약그룹사옥. 보령의 글로벌 기업 의지를 담아 1994년 완공됐다.
이제 중보의 기업가정신에 대한 글을 마칠 때다. 중보는 어떤 기업가였는가? 그리고 보령제약은 어떤 기업인가? 중보의 육성으로 직접 들어보자.

“기자들이 내게 성공한 이유가 뭐냐고 자꾸 물어보는데, 나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공한 기업인이 아니라 성실한 기업인’일 뿐이라고요. 보령약국은 개업 초기부터 종로5가 약국거리에서 누구보다 먼저 약국 문을 열고 누구보다 늦게 약국 문을 닫았습니다…

단비가 내리면 농사꾼은 바빠집니다. 아무리 새벽이나 한밤중이라도 서둘러 논밭에 나가 물을 고이게 하고, 농작물 하나하나가 그 단비에 목을 적시게 하니까요. 농부는 무척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고객을 가족처럼 아끼면 성실해집니다. 연구 활동에 매진하고, 제품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합니다. 특히 어떤 불법이나 탈법도 저지르지 않지요. 그것이 결국 고객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인 걸 알기 때문입니다.

고객들을 신뢰하고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기업이라면, 어떤 위기에 빠졌을 때 고객들이 나서서 물건 팔아주기라도 할 것입니다. 신뢰 받는 농사꾼이 이웃의 도움을 받듯이. 결국 정직과 성실함의 결과는 신뢰입니다. 그 신뢰의 결과는 바로 풍년이고, 그 기업은 언젠가 대풍을 거둘 것입니다.” 오늘의 CEO들에게 들려주는 ‘중보정신’의 핵심이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자료 협조 보령제약그룹, 한국경영사학회

[박스기사] 중보 김승호의 기업가정신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한 중보 김승호(오른쪽). 중보의 생활철학으로 굳어진 이 4가지 기업가정신은 ‘중보정신’의 줄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중보의 기업가정신은 ‘보령정신’으로 승화되었다.
신의성실: 중보는 “성실함 하나만으로 신뢰라는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재산을 얻었으니, 보령약국을 통해 나는 일생에 얻을 재산의 상당부분을 얻은 셈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공존공영: 중보는 “기업가의 길을 걷기로 한 후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류건강을 위한 기업이념의 구현과 공존공영의 정신을 생활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중보는 공존공영의 정신으로 회사와 사원 그리고 고객이 삼원일체가 되는 기업풍토를 조성했다.

도전정신: 신약개발을 추진하고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기업가적 기상이 모두 도전정신에서 나왔다. 계열사를 늘리고 기업 확장의 승부수를 던지게 하는 개척자적 모험심도 도전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제약보국: 제약기업 경영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에 헌신하겠다는 제약보국 사상은 김승호의 기업가정신을 형성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201610호 (201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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