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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삼국지로 본 사람 경영’(4) 장자방(張子房)의 후예들 

곽가(郭嘉) 조조가 가장 사랑했던 참모 

양선희 중앙일보 논설위원/ 『여류(余流) 삼국지』 저자
곽가는 일찍 죽은 탓에 소설이나 정사에서도 크게 비중 있게 취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삼국지 인물을 분석하면서 가장 관심 있게 보았던 조조 진영의 사람은 곽가였다. 조조는 “내가 대업을 이루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며 곽가를 특히 아꼈다.

▎곽가는 조조의 가장 젊은 모사였고, 조조와 일한 지 11년 만인 38세에 홀연히 요절한 비운의 천재였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남군으로 도망친 후 함께 살아 돌아온 참모·장수들과 술을 나누다 말고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한다.

“봉효야! 봉효야! 어찌하여 네가 먼저 갔느냐. 네가 살았더라면 오늘날 내가 이렇게 낭패를 당하지는 않았으리라. 슬프구나 봉효야, 괴롭구나 봉효야, 아깝구나 봉효야. 네가 어찌 나를 버리고 갔느냐. 네가 없으니 내가 이 신세가 되었다. 봉효야.”

조조가 일생일대 가장 처참한 패전을 당한 후 애타게 부르짖은 봉효(奉孝)는 바로 형주와 적벽으로 향하는 남정(南征) 바로 한 해 전에 죽은 곽가의 자였다. 그는 조조의 가장 젊은 모사였고, 조조와 일한 지 11년 만인 38세에 홀연히 요절한 비운의 천재였다. 필자는 조조의 책사들을 연구하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곽가가 오래 살았다면, 조조가 그렇게 대책 없이 제갈량에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조조에 의해 당시의 중원이 통일되었을지도 모른다.’

진수는 곽가를 평하면서 덕행을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계책을 짜고 도모하는 데서는 순유와 비슷하다고 했다. 또 유비 진영의 인물 중에선 법정과 비슷한 무리라고 평했다. 그러나 나는 진수의 평이 너무 박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생각이긴 하지만, 당대에 조조 진영에서 제갈량을 대적할 만한 상대는 죽은 곽가밖에 없었다고 본다.

결국 조조의 성취에 브레이크를 걸고, 삼국정립으로 가는 길을 열었던 정세 변화는 제갈량의 등장이 가장 큰 것이었으나 곽가의 부재 역시 한 몫을 보탠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조가 대성통곡하며 곽가를 부르짖은 것은 아마 그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곽가를 제갈량의 적수가 될 수 있었던 잠재적 인물로 보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곽가는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판단이 정확했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여 위세를 드높이며 북진을 하려고 도모하고 있을 때 조조의 모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그러나 곽가만이 “손책은 용맹하고 성정이 불같아 금세 활활 타오르나 행동이 경솔하고, 강동을 평정하며 원한을 많이 샀으면서도 방비를 잘 못하고, 천성은 급한데 꾀는 적고, 한낱 필부의 그릇이어서 무도하고 용맹하나 위엄이 없어 반드시 소인배들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실제로 손책은 나이 스물여섯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죽는다.

또 오환 정벌 당시 조조 진영의 모사와 장수들이 모두 등 뒤의 유표를 걱정하자 곽가 혼자서 “한담이나 즐기는 유표가 결코 뒤를 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시 그의 예상이 맞았다. 그런가 하면, 그가 잠시 성 밖에 나가 있는 사이 조조에게 의탁해있던 유비가 원술을 치겠다며 허도를 빠져나간 것을 알고 달려와 유비를 당장 조치하라고 조조에게 말한다. 그는 “유비는 새장에 가두어 두어야지 밖으로 내보내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역시 그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 그 후 유비는 무던히도 조조를 괴롭힌다. 사람을 이렇게 정확하게 판단하는 모사는 당시 인물들 중 곽가가 으뜸이었다.

둘째, 곽가는 무서우리만치 정확하게 정세를 판단했고, 그에 대응하는 계책이 독창적이고도 정확했다. 조조는 원소가 죽고, 여양에서 원담과 원상을 물리친 후 기주까지 쫓아왔으나 기주 함락이 여의치 않아 속을 썩이고 있었다. 이때, 곽가가 조조에게 말한다.

“기주에서 군사를 거두시고, 남쪽으로 가시어 형주의 유표를 정벌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모사들은 기함을 할 지경이다. 하나의 전쟁도 제대로 끝내지 못했는데 전선을 넓히자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조조는 계책을 묻는다. 곽가가 말한다.

“지금 저 원 씨 집안은 장자를 폐하고 막내아들을 후사로 내세워 형제간 권력다툼 중에 있습니다. 지금은 승상께서 계속 공략하여 가업이 위태로우니 저희들끼리 돕고 있는 것입니다. 승상께서 물러간다면 원 씨 형제들의 세력다툼이 점입가경으로 치달을 것이고, 저절로 자멸할 것이니 그 뒤 저들의 변화를 보아가며 그에 따라 적절히 대응한다면 평정하기 더욱 쉬울 것입니다.”

능히 제갈량을 대적할 만한 상대


▎곽가는 조조를 만나고 난 뒤 밖에 나와 기뻐하며 말한다. “조공이 진정 나의 주군이시다.”
조조는 이 계책을 받아들이고, 유표를 치러 간다. 그러자 곽가가 예상한 대로 원소의 아들 형제들끼리 난을 일으켜 점입가경으로 치달아 원담이 조조에게 항복해오고, 이후 조조는 일사천리로 원소의 근거지들을 병합한다.

또 조조가 원소의 근거지들인 기주·청주·유주·병주를 모두 아우르고 원소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원희와 원상이 오환으로 도망간다. 이때 조조 진영의 장수와 모사들은 회군을 주장한다. 조홍이 말한다. “원희와 원상은 회복하기 힘들 만큼 패하여 사막으로 도망하였습니다. 화근을 뿌리 뽑아야 하나 그들을 쫓아 사막으로 갔다가 유비와 유표가 빈틈을 타 허도를 기습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에 모두가 찬성하는데 곽가 혼자서 반대한다.

“지금 우리에게 화근이 되는 자들은 원상과 원희이지 형주의 유표가 아닙니다. 사막의 무리들은 거리가 멀고 험한 것을 믿고 별로 방비를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니 공격하면 무찌르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날 원소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은 오환이 원상과 원희 형제의 기력을 회복하도록 돕는다면 지금의 고생으로는 결코 만회할 수 없는 화를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유표가 유비를 잡아두는 것은 허도를 공략하기 위함이 아니라 제 땅을 지키려 하는 것뿐이니 우리가 허도를 비워두고 원정을 나선다 해도 유비는 아무것도 도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 조조는 곽가 홀로 제안한 이 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드디어 오환 정벌에 나선다. 그런데 가는 길에 고생이 너무 심하고, 게다가 곽가까지 병이 드니 조조는 불안해 회군하려고 한다. 그러나 곽가가 만류하며 말한다.

“지금 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고생하여 훗날의 화근을 제거하는 것이니 훗날의 더 큰 패업을 이루시기 위해 이 고생을 참으소서. 지금부터는 장비를 가볍게 하여 병귀신속(兵貴神速·용병(用兵)은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말고 신속하게 해야 한다)하게 하십시오”

조조는 곽가를 중간에 요양하도록 하고, 곽가가 이른 대로 오환을 정벌하고 원희와 원상을 요동으로 쫓아낸 뒤 결국 요동에서 그들을 잡아 목을 바치도록 한다. 그러나 이때 곽가는 병들어 죽는다.

셋째, 조조는 곽가가 마지막으로 개입했던 오환 정벌까지 승승장구하며 중원의 주요지역을 거의 평정하고 용병의 귀재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 용병의 이면에서 가장 많이 채택한 계책은 곽가의 것이었다. 실제로 여포를 공격할 때도 추위와 군량 문제 등이 겹쳐 회군하려 하는 것을 말리고 공격을 제안한 것도 곽가였고, 모두가 말리는 오환 정벌도 오직 곽가의 계책으로 밀어붙인다. 어찌 보면 조조의 승리는 곽가의 계책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곽가의 대책은 모험적이고 대담했지만 언제나 승리할 수 있는 방법만을 활용했고, 실제로 이를 통해 조조는 막대한 공적을 세운다.

그러나 오환 정벌 이후, 즉 곽가가 죽은 이후, 조조의 정벌 전쟁은 과거의 승승장구하던 때와는 달리 삐걱거린다. 적벽에선 대 참패를 하고, 마초와는 변변한 전투도 못하고 지키며 절절 매다가 가후의 이간책으로 겨우 마초 무리를 흩어버렸고, 한중도 장로가 멍청해서 거저 얻다시피 했다. 한중을 얻은 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촉의 유비를 치라는 사마의의 건의에도 “만족을 알아야 한다”는 둥 흰소리만 하다 결국 이내 유비에게 빼앗긴다.

사실 조조는 모든 전투에서 중도에 그만 두고 싶어 하는 성향이 강했다. 관도대전 당시는 그만 두고 싶어 하는 걸 순욱이 말렸고, 오환 정벌 당시도 돌아가려는 조조를 죽어가는 곽가가 말렸다. 한중에서도 철수하려다가 짙은 안개에 길을 잃었는데 찾아들어간 곳이 적군의 군영이어서 어영부영 얻었다. 곽가 사후 조조는 서량과 한중을 얻었으나 한중을 얻은 후 유비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렸고, 그로써 중원 통일 군주의 꿈도 물 건너갔다. 오환까지 정벌해 가며 북쪽을 안정시킨 것이 겨우 서량과 한중 정도 얻자고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중원 통일을 스스로 접었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공작이 되고, 왕이 되는 등 승승장구하며 세상의 온갖 권세를 다 얻었으니 굳이 촉과 오까지 얻지 않았다고 개인적으로 무슨 큰 불편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중원 통일을 하지 못함으로써 역사에서 내내 간웅이니 뭐니 하며 의심을 받았고, 욕을 먹었다. 유비와 제갈량 집단을 살려둠으로써 끝내 황실보다 강력한 군벌이 존재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었고 자기 후손들의 왕조를 위태롭게 만들기도 했다.

주군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능력자

마지막으로 주군이 그를 신뢰했다. 신하의 가장 큰 경쟁력은 주군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능력, 즉 주군의 신뢰다. 그런 점에서 곽가는 탁월했다.

적벽대전 참패 당시 가후는 동오정벌을 말렸고, 정욱도 손-유 동맹을 걱정했으며, 순유는 배를 붙들어 매어둘 때 화공을 걱정하는 등 조조의 참모는 수없이 옳은 계책과 간언을 올렸다. 그러나 조조는 하나도 듣지 않았다. 조조는 곽가의 튀는 간언은 모두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실행했으나 다른 모사들의 간언은 취사선택했다. 조조는 곽가에 대해선 확고한 믿음을 가졌으나 다른 모사들에 대해선 그만큼의 믿음이 없었거나 다른 모사들이 곽가처럼 주군이 안 하고 싶어 하는 것도 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그러한 믿음은 사람 잘 보는 조조가 처음 곽가를 만났던 순간부터 시작된다.

조조는 순욱의 추천으로 곽가를 만나고 난 뒤 말한다.

“내가 대업을 이루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

또 곽가가 죽고 난 뒤 천자에게 올린 표에는 곽가에 대해 이렇게 쓴다. “…신이 미처 책략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곽가는 쉽게 처리했습니다. 천하를 평정하는 데 그의 계략과 공적이 높습니다. …곽가의 공을 돌이켜보건대, 진실로 잊을 수 없습니다.”

또 곽가가 죽고 난 뒤 슬퍼하며 자신의 신하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은 나와 동년배인데 오직 봉효만이 가장 젊어 천하를 평정하고 난 뒤 그에게 뒷일을 부탁하려 하였는데…”

조조는 자신의 후사를 부탁할 이로 이미 곽가를 점찍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곽가는 실로 신하로서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워낙 인재가 많은 집단에 속해 있었고, 일찍 죽은 탓에 후세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지 살아선 제 뜻을 모두 주군을 통해 달성했다.

내놓는 계책마다 달게 받아먹은 주군을 모시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곽가는 그 똑똑하고 영민한 주군 조조에게 올리는 계책마다 모두 통했다. 거의 제갈량의 계책이 유비에게 통했던 것 이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는 화려한 공적을 거두었다. 아무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막강한 원소 진영을 평정할 때도 그가 있었고, 오환까지 정벌해 원소 세력을 뿌리 뽑아 후환을 없앴다.

이런 성과를 거둔 핵심 경쟁력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다. 그는 멀리 있어 본 적도 없는 손책·유비·유표까지 정확하게 판단했으니 조조는 얼마나 잘 알았겠는가. 조조는 무척 똑똑하고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군주였다. 그러나 의심이 많아 좌고우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곽가는 이럴 때마다 조조가 마음에 걸려하면서도 의심하는 문제를 제대로 집어내고, 이를 타개할 계책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말하자면 가려운 데를 정확하게 찾아내 시원하게 긁어준 것이다. 손이 안 닿는 등까지도 제대로 긁어주는데 조조의 입장에선 ‘그 말이 바로 내 말’이니 안 따를 이유가 없었고, 볼수록 감탄할 따름이었다.

그는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자기 주군을 자기가 골랐다. 『삼국지』 위서 곽가전에 따르면, 곽가는 원소를 만난 뒤 원소의 모사인 신평과 곽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주군이 될 사람을 헤아려야만 100번 군대를 일으켜 100번 완벽하게 공명을 세울 수 있는 법인데, 원공은 인재를 등용하는 기틀을 알지 못하고, 일을 처리할 때도 요령이 적고 결단력이 없어 패왕의 대업은 정하기 어려울 것이오.”

그러고는 원소를 떠났다. 당시 원소는 누가 봐도 최고의 세력이었다. 지금의 삼성이나 현대차처럼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신의 직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군의 자질을 보고 던져버린다. 그는 애당초 패왕의 자질이 있는 사람을 고르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의 야심은 ‘킹 메이커’였다. 그러고 나서 조조를 만난다. 조조와 면접을 보고난 뒤 그는 밖에 나와 기뻐하며 말한다.

“조공이 진정 나의 주군이시다.”

그는 결국 자신의 마음에 드는 주군을 골랐고, 주군은 그의 재주를 맘껏 펼 수 있게 해주었고, 그 결과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를 거두었으니 신하로서의 삶에 무엇이 부족했을까. 그의 독창적인 전략과 판단력은 제갈량급이었고, 그에 대한 주군의 믿음과 지지 역시 제갈량급이었다.

독창적인 전략과 판단력은 가히 제갈량급

그럼에도 곽가는 역사가들로부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가 신하로서의 처세 중 한 가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오래 살지 못했다는 것. 일찍 죽었다는 점이다. 신하로서의 경쟁력 중 오래 살아남는 것은 절대적 경쟁력 중 하나다. 곽가전에 따르면, 곽가가 품행과 검약을 다스리지 않아 강직했던 진군(陳群)이 여러 차례 조정에 기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마디로 그의 생활 태도는 신중치 않고 방약무인하고 자유로웠다는 뜻이다. 그래도 조조가 곽가를 워낙 중시하는 터라 그의 태도는 고쳐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조조는 이를 통해 진군이 정도(正道)를 지키려 한다는 점을 알았기에 진군에게도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조조 역시 곽가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곽가가 워낙 울트라 수퍼S급 인재여서 조조는 야단도 못 치고,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곽가의 계책이나 논의 전개 과정을 보면 교만하거나 사리사욕을 추구하거나 오만방자한 부류는 아니었다. 그의 계책은 충직했고, 맑았다. 그러므로 그의 방약무인함은 술 마시고 노는 데 많은 정력을 낭비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자기 건강을 해치는 쪽으로 방약무인했던 것이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경쟁력이 없었으니 후대에도 박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양선희 -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매주 칼럼 ‘양선희의 시시각각’을 연재하는 중이다. 2011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이래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작품집으로『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 미디어), 『카페 만우절』(나남),『5월의 파리를 사랑해』(문예중앙) 등이 있다.

201612호 (2016.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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