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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10) 마르틴 루터 

혁명보다 더 어려운 개혁으로 세계의 종교·정치 지형을 바꾸다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최고경영자(CEO)는 끊임없이 혁명, 그리고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개혁을 해야 한다. 마르틴 루터(1483~1546, 우리나라 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의 표기는 말틴 루터)는 종교개혁으로 유럽 역사에 혁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profile : 1483년 독일 광산업에 종사하는 가문에서 출생 / 1501년 에르푸르트대 인문학부 입학 / 1505년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 입회 / 1507년 사세 서품. 비텐베르크대에서 가르치기 시작. / 1510년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 대표로 로마를 방문. / 1512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음 / 1521년 교황 레오 10세 루터를 파문 / 1525년 수녀 출신인 카테리나 폰 보라와 결혼. / 1534년 독일어 성경 완역 / 1546년 별세. / 사진 : 김환영
마르틴 루터는 유럽을 넘어 전세계 종교·정치 지형을 바꿨다. 모든 혁명·개혁의 메시지가 그러하듯 루터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우리가 잘나서 구원을 얻는 게 아니다. 구원은 신(神)의 선물, 은총이다. 신은 우리에게 단 한 가지를 요구한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루터는 왜 개혁가(reformer)로 나서게 됐을까. 어쩌면 다음 말에 답이 있다. “당시 교회는 롤모델이 아니었다. 부패와 속됨과 탐욕과 권력욕이 있었다. 루터는 이런 상황에 항거했다. 그는 총명한 인물이었다.” 이 말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말이다. 당시 교회에는 성직매매와 족벌주의도 만연했으며 상당수 성직자들이 끔찍할 정도로 무식했다.

무명의 신학자, 면벌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다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못으로 박는 루터(1872년 작품). 루터의 종교개혁은 유럽 역사에 혁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은 면벌부(免罰符)의 판매였다. 예전에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던 면죄부(免罪符)는 라틴어 ‘indulgentia(영어로는 indulgence)’의 악의적인 오역이라는 의견에 따라 요즘 면벌부(免罰符)로 대체되고 있다.

면벌부는 ‘천국행 티켓’이 아니었다. 면벌부의 보다 정확한 번역은 대사(大赦)다. 대사는 “고해 성사를 통하여 죄가 사면된 후에 남아 있는 벌을 교황이나 주교가 면제하여 줌”을 의미한다.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고해성사로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지만 천국에 가기 전에 죗값을 치러야한다. 이를 면제해주는 게 대사인데 당시 ‘헌금’을 참회나 성지순례와 더불어 대사의 한가지 조건으로 삼는 폐단이 있었다. 특히 12세기~16세기 교회는 면벌부 판매로 군사비를 마련하고 대성당을 지었다.

1517년 10월 31일 오후 2시. 33세였던 무명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에 있는 성(城)교회의 문에 면벌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 ‘95개 논제’를 붙였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위는 아니었다. 늘 있는 일이었다. 당시 교회의 문은 일종의 게시판이었다.

‘95개 논제’를 붙였다는 것은 팩토이드(factoid), 즉 ‘근거가 없는데도 일반적으로 사실로 여겨지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독일 가톨릭 사학자 에르빈 이제를로(1915~1996)는 1961년 이 사건이 신화에 불과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우선 이 사건에 대해 루터는 아무런 글도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95개 논제’의 중요성이 주는 것은 아니다. ‘95개 논제’는 대학에 배포됐다. 루터는 95개 논제가 포함된 서신을 1517년 10월 31일 독일 교회의 우두머리인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보냈다. 대주교는 1517년 12월 루터의 서신을 로마로 보냈다. 이단적 내용이 포함됐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1521년 4월 18일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 서게 된다. 그는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은 안전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며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처음 루터가 요구한 것은 공개 토론이었다. 그가 바란 것은 가톨릭 교회의 개혁이었다. ‘95개 논제’를 발표하고 몇 달 후 루터는 교황에게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당신을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목소리로 대하겠다”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루터와 교황청의 관계는 계속 악화됐다. 루터는 가톨릭 교회를 “바빌론의 탕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불렀다. 루터는 또한 교황이 ‘남색자’에 여장을 하고 즐거워하는 ‘트랜스베스타잇(transvestite)’이라고 주장했다. 또 가톨릭 미사는 미신이라고 했다. 결국 갈등은 종교개혁에 따른 가톨릭 교회과 개신 교회의 분리를 낳았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없었으면 트리엔트 공의회(1545~63)를 통한 가톨릭 교회의 개혁도 또한 없었을지 모른다.

루터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그 시대의 산물이다. 어떤 인물을 이해하려면 그의 시대를 알아야 한다. 공포가 드리운 불안한 시대였다. 거듭되는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루터 또한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믿었으며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다.

루터는 국제정치 상황 덕분에 생명을 보존했다. 독일·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 등지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들끓었다. 특히 바티칸이 부과하는 가혹한 세금 때문에 로마에 대한 반감이 고조됐다. 독일이 포함된 신성로마제국은 수백개 단위로 쪼개진 상태였고 삭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1463~1525)와 같은 제후들이 루터를 후원하고 보호했다.

출판 시대의 개막도 종교개혁 성공에 한몫

출판 시대의 본격 개막도 종교개혁의 성공에 한몫 크게 했다. 루터는 『구텐베르크 성경(1455년경)』 출간 후에 태어났다.(얄궂게도 구텐베르크는 면벌부도 인쇄했다.) 인쇄술과 출판업자 덕분에 ‘95개 논제’는 14일 만에 독일 전역, 4주 만에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10년 동안, 600만~700만 팜플렛이 쏟아졌다. 그 중 4분의 1이 루터가 쓴 것이었다. 루터는 엄청난 다작으로 유명했다. 30여 년간 2주에 한 번 책이나 팜플렛을 발표했다. 약 1500단어 분량의 팜플렛도 있었는데 읽는 데는 10분 걸렸다. 종이 한 장으로 인쇄할 수 있었고 접으면 8페이지가 됐다. 책은 인쇄하는 데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리는데 팜플렛은 하루나 이틀에 찍을 수 있었다. 루터와 그의 적들은 서로를 인용해가며 논박했다. 그 시대의 <100분 토론>, <썰전>이었다. 여론전의 승리자는 루터였다. 루터에게는 ‘중세적인 인간’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의 덕을 본 것도 루터다. 루터의 테제는 유럽 전역의 휴머니스트 학자들에게 유포됐다. 도시의 발달도 인쇄술 발달과 맞물렸다. 루터의 지지기반은 도시였는데 당시 독일말을 쓰는 지역에 3000개의 크고 작은 도시가 있었다.

루터는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권위 있는’ 혹은 ‘권위주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성난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분노했을 때 기도도 더 잘하고 설교도 더 잘한다.” 바로 그러한 루터의 성격 덕분에 종교개혁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양심과 종교의 자유, 관용의 정신 꽃피워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 / 사진 : 김환영
물론 루터에게도 인간적인 흠이 있었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쏟아진 루터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분노·조바심·공포, 시기심과 증오와 우울함으로 고통 받았다. 투쟁적인 성격에 고집이 세고, 성미가 고약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루터는 사탄의 존재를 굳게 믿었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벌어지는 일은 모두 사탄의 짓이라고 몰아붙였다. 사탄의 하수인인 마녀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들 마녀들에게 아무런 동정심이 없다. 나라면 그들을 모두 화형시키겠다.” 자신의 주장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농민전쟁(1524~1526)에 대해 냉담했던 것과 유대인들을 맹공했던 것이 특히 오점으로 남는다.

루터는 수많은 ‘흑역사’ 신화의 주인공이다. 죽을 때는 참회하고 다시 가톨릭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설도 유포됐다. 술꾼이었다는 말도 있다. 루터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 데 확실치는 않다. “맥주를 마시는 사람은 일찍 잠자리에 든다. 오래 자는 사람은 그만큼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니 맥주를 마시자!”

루터는 엄청난 유산(legacy)를 남겼다. 그가 번역한 구약·신약 성경은 독일어의 표준이 됐다. 루터의 성경 번역은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여기서 한가지 오해는 불식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가 신자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성경을 사슬로 묶어 놨다는 주장은 사실과 좀 거리가 있다. 당시 귀했던 성경을 훔쳐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또 루터는 최초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 아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각국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독일에서만 17개 판본의 독일어 성경이 있었다.

루터 자신은 ‘편협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결과로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그리고 관용의 정신이 국가와 사회에 뿌리내렸다. 근대 교육의 발달에도 일조했다. 종교개혁 이전의 학교는 성직자와 엘리트를 위한 교육 기관이었다. 그는 1530년 <학생들을 학교에 있게 하는 일에 관하여>에서 특히 여성 교육을 강조했다. 16세기 말이 되면 독일 농촌의 학교에서도 남녀 성비가 균형을 이뤘다. 20세기 섹스혁명의 기원도 루터라는 주장이 있다. 아주 엉터리 주장은 아니다. 루터는 성(性)에 대한 솔직한 태도로 유명했다. 부부사이의 적절한 횟수를 묻자 루터가 “주 2회면 혼외정사의 유혹으로부터 충분히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는 주장이 있다.

만약 교황이 루터의 이의 제기를 수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니면 반대로 루터가 보다 유화적인 태도로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루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은 종교개혁 이전에 가톨릭 교회 신학 전통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루터 신학과 가톨릭 공식 신학 또한 충분히 공존할 수 있었다. 예컨대 현대의 해방신학은 주류 가톨릭 신학과 갈등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공존한다.

세상에 쓸모 없는 게 역사적인 가정이다. 종교개혁은 일어났고 유럽 종교전쟁(European Wars of Religion, 1524~1648) 기간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유럽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년)와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향해 나아갔다. 서로 이단이라며 피흘리며 싸웠지만 결과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상식이 됐다. 아이러니다. 유럽이 전세계로 팽창한 결과 세계는 다문화사회, 다종교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그 뿌리는 루터가 촉발한 종교개혁이다.

루터교, 장로교나 침례교보다 가톨릭에 더 가까워

루터를 살피면 서구가 세계를 지배하게 된 이유가 보인다. 종교개혁으로 서부유럽 국가들은 민족주의, 문해력, 높은 교육 수준, 자유, 전쟁 수행으로 발전한 군사력을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 앞서 확보했다. 대단한 헤드스타트(head start)를 누리게 된 것이다.

50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역사적인 허탈감’을 느낀다. 면벌부 수입으로 1506년부터 1626년까지 증축된 성베드로대성당은 세계적인 관광 명승지로 우뚝 서있다. 가톨릭 교회 신자가 13억, 개신교는 8억, 그중 ‘장자(長子) 교회’인 루터교회 신자는 7000만에서 9000만이다.

루터교회와 가톨릭 교회 간의 화해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전되고 있다. 가톨릭 내에 반(反)루터 기류는 아직 남아 있다. 가톨릭 일각에서는 한때 ‘종교개혁’이 틀린 용어이며 ‘종교혁명’이 맞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혁명은 나쁜 뉘앙스가 담긴 말이다. ‘가톨릭은 루터교회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함께 경축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가톨릭 신자들도 있다.

가톨릭 수뇌부의 생각은 다르다.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는 “나는 가톨릭과 루터회의 500여년 분리를 바로잡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매일 기도한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루터회 공동 종교개혁 기념식 참석을 위해 지난 10월 31일 스웨덴을 방문했다.

분열 국면과 통합 국면이 있다. 분열 국면에서는 비슷할수록 다툼이 심하다. 통합 국면에서는 비슷할수록 일치가 더 쉽다. 가톨릭 입장에서 루터교는 장로교나 침례교보다 가톨릭에 더 가깝다. 사실 루터는 매우 ‘가톨릭’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수사가 된 것은 1505년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에게 수사가 되겠다고 약속한 때문이었다(하나님과 한 약속이 아니었다). 루터는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이 보내는 편지에 가장 가까운 성인의 축일을 기입했다. 1999년 두 교회는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조만간 성만찬·성찬식을 상호 인정할 수도 있다.

옛 동독도 루터와 화해를 시도했다.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루터를 농민전쟁에 반대한 적으로 매도했던 동독 정부는 근로 정신을 강조한 루터에게서 이용가치를 발견했다. 동독 정부는 루터와 관련된 교회, 수도원, 도서관을 상당한 비용을 들여 리모델링했다.

[박스기사]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 아내는 남편이 기쁜 마음으로 집에 오게 만들고 남편은 자신이 집을 나올 때 아내가 애석함을 느끼게 만들라.
● 여러분은 여러분이 한 말뿐만 아니라 하지 않은 말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 기도는 짧을수록 좋다.
● 성직자들은 신앙에 최대 장애물이다.
● 죄인이 되고 열심히 죄를 지어라. 하지만 보다 강하게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를 크게 기뻐하라.
● 하나님은 복음을 성경뿐만 아니라 나무와 꽃과 구름과 별에도 적으신다.
● 젊은이들이여 만약 여러분이 지혜롭다면 악마는 여러분에게 아무 짓도 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은 지혜롭지 않기에 우리 늙은이들이 필요하다.
● 천국에서 웃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나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
● 모든 사람은 두 가지는 홀로 해야 한다. 믿는 것과 죽는 것이다.
● 오로지 피흘림만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인다.
● 기도하라. 여러분을 대신해 하나님이 걱정하게 하라.
● 내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었지만 모두 빼앗겼다. 내가 하나님 손에 맡겨 놓은 것들은 아직 모두 갖고 있다.
● 가능하면 평화를,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리를.
● 이성은 신앙의 적(敵)이다.
●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神)은 재물, 쾌락, 그리고 자만심이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201701호 (201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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