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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의 와인 이야기 (12)] 미국 와인의 역사 (2) 

금주령도 막지 못한 최고급 와인 집념 

이석우 와인 칼럼니스트 sirgoo.lee@joongang.co.kr
‘세계적인 고품질의 미국산 와인’의 꿈은 금주령으로 인해 질식되는가 했지만, 첼리체프, 에이머린, 몬다비 등과 같은 와인 매니아들 덕분에 20세기 후반 들어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최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나파 밸리에 있는 셰이퍼 반야드 전경.
유럽 최고급 와인들과 겨루겠다는 미국 와인업계의 원대한 꿈은 1919년 금주령의 통과로 꺼지는 듯 했다. 1820년대부터 기독교 단체와 여성 단체를 중심으로, “음주가 가정폭력의 원인이며, 심지어 정치적 부정을 조장한다”는 주장이 서서히 힘을 얻기 시작했다. 금주 운동의 지지를 받아 당선된 연방 의원들은 1919년 미국 헌법을 개정하여 주류의 제조, 판매, 유통을 금지시키는 수정헌법 18조를 통과시켰다. 1933년 말 또 한번의 개헌을 통해 수정헌법 18조가 폐기되기까지 14년간, 미국 와인업계는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1920년 금주령 발효 직전에 1000여 곳이나 되던 미국의 와이너리는 1934년 금주령 폐지 직후 150여 곳으로 대폭 줄었다. 이들은 법에서 예외적으로 인정한 “의사의 처방에 따른 주류” 또는 “종교적 의례에 사용되는 주류”를 생산하면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다. 미국인들은 술을 아예 안 마시거나 혹은 법망을 피해 유통되던 독주에 입맛이 길들어져서, 금주령 폐지 이후에도 와인은 외면 받는 음료가 되어버렸다.

조르쥬 드 라뚜르와 앙드레이 첼리체프


▎1. 영화 <아메리칸 셰프> 에 등장하는 미국 나파밸리 조르쥬 드 라뚜르 와인. / 2. 필자가 6년 전 시음한 보우리우 빈야드의 1969년산 조르쥬 드 라뚜르 프라이빗 리저브 까베르네 소비뇽. 앙드레이 첼리체프가 직접 양조한 1969년산 빈티지는 시음 당시 40년이 넘은 세월 동안 병속에서 숙성되어 다소 쇠락한 느낌을 받았지만, 여전히 블랙베리와 자두 등 검은 과일의 풍미가 살아있었다.
하지만 금주령의 암흑기 속에서도 고급 와인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곳들이 있었다. 프랑스 이민 1세대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조르쥬 드 라뚜르(Georges de Latour)는 1900년 미국 나파의 러더포드(Rutherford) 지역에 약 5000평의 농장을 매입해 ‘보우리우 빈야드’(Beaulieu Vineyard)를 설립했다. 그의 꿈은 고향 프랑스에서 마시던 고급와인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금주령이 발효된 이후에도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가톨릭 교회에 와인을 납품하면서 와이너리에 투자를 지속적으로 했다. 금주령이 폐지되고 1938년에 그가 고용했던 와인메이커가 갑작스럽게 은퇴하자, 그는 새로운 와인메이커를 찾고자 프랑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러시아 출신의 와인양조 전문가 앙드레이 첼리체프(Andre Tschelistcheff)를 만났다.

첼리체프는 제정 러시아 말기인 1901년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후 그는 체코와 프랑스에서 와인양조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국립 농경제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중, 조르쥬 드 라뚜르의 영입제안을 수락, 1938년 보우리우 빈야드의 수석 와인메이커로 부임하게 된다. 첼리체프는 곧바로 프랑스에서 배운 과학적인 와인 양조 방법들을 보우리우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가 도입한 오크배럴 숙성이나 젖산 발효와 저온 발효 등의 기법은 보우리우의 와인 품질을 극적으로 향상시켰다. 프랑스 최고급 와인에 버금가는 미국산 와인을 생산하겠다는 라뚜르와 첼리체프의 집념은 1940년 보우리우 빈야드의 최고급 와인인 ‘조르쥬 드 라뚜르 프라이빗 리저브 까베르네 소비뇽’(Georges de Latour Private Reserve Cabernet Sauvignon)의 출시로 구현되었다. 이 와인은 이후 30여 년간 미국의 최고급 와인을 상징하게 되었으며 1990년대에 등장한 나파 컬트 와인의 효시가 되었다. 첼리체프의 업적은 보우리우 빈야드 와인들의 품질향상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나파 지역을 넘어 오리건주와 워싱턴주 등 미국 서부지역에서 와인을 만드는 다른 생산자들과 와인 관련 지식을 공유하며 미국 와인의 우수성에 대한 믿음을 전파하였다.

첼리체프의 업적이 와인 양조 실무에서의 개혁이라고 한다면, 미국 와인업계의 과학적·이론적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품질향상에 기여한 공로는 매이나르드 에이머린(Maynard Amerine) 교수가 이끈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데이비스 분교의 와인양조학과의 차지다. 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에이머린은 1936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데이비스 분교에 신설된 와인양조학과 연구조교로 취직했다. 이후 에이머린과 그의 제자들은 식물, 기후, 그리고 와인의 성분 분석을 통한 과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금주령 직후 침체되었던 미국 와인업계의 성장을 이끌었다. 특히 이들은 나파에 적합한 비티스 비니페라 품종을 찾기 위해 양조용 포도의 생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기후, 특히 일조량과 온도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나파 전역을 다섯 등급으로 분류하여 각 등급에 맞는 품종을 권장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전통적인 와인생산 국가에서는 과거의 오랜 경험과 관행을 바탕으로 와인을 만들어 왔었다. 이러한 유럽의 경험과 관행이 없었던 미국으로서는 에이머린 교수와 그 제자들이 제공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양질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타고난 세일즈맨 로버트 몬다비

양조의 실무와 이론을 바탕으로, 막상 미국인들의 식탁 위에 일상적으로 와인을 올려놓는 데 기여한 인물은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다. 아버지의 와인 양조사업을 동생 피터와 같이 이어받아 운영하던 몬다비는 1965년 독립하여 이듬해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를 설립하였다. 금주령이 폐지된지 30년이 넘었지만, 당시 미국 대중에게 와인은 그저 술의 한 종류로만 인식되어 있었다. 몬다비는 타고난 세일즈맨답게 미국 전역을 돌면서 와인을 즐기는 것이 문화와 예술을 감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주장했다. 몬다비의 활동을 통해 와인에 대한 인식이 바뀜으로써 와인 판매의 저변이 확대될 수 있었다.

17세기 유럽 이주민들로부터 시작되어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까지 이어져 내려온 ‘세계적인 고품질의 미국산 와인’의 꿈은 20세기 전반 금주령으로 인해 질식되는가 했지만, 첼리체프, 에이머린, 몬다비 등과 같은 인물들 덕분에 20세기 후반 들어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되었다.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 미국산 와인들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200년 넘게 최고의 와인을 생산하겠다는 집념들이 온갖 난관을 이겨내며 이어져 내려온 결과이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다. 파리의 심판 이후에도 미국의 와인업계는 지속적으로 품질을 높여가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의 50개주 모두에서 와인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국의 나파 컬트와인들은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유럽산 최고급 와인들과 경쟁하기에 이르렀다.

이석우 - 카카오 공동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 편집국 디지털총괄 겸 조인스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번역서 『와인력』을 출간한 와인 마니아다.

201705호 (2017.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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