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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 - 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19) 

근대 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오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철학자·공학자·예술가다. 그는 ‘폴리매스(博識家·polymath, 지식이 넓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였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류트 연주자였다. 그는 14~16세기 르네상스와 17세기 과학혁명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였다.

▎저스투스 서스테르만스가 그린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초상화.
“내게는 신(神)이라는 가설이 필요 없다”는 말을 우리에게 남긴 사람은 ‘라플라스 변환’ ‘라플라스 방정식’으로 유명한 프랑스 수학자 파에르시몽 라플라스 후작(1749~1827)이다. 라플라스는 또한 “우리가 아는 것은 적지만 우리가 모르는 것은 방대하다”라는 말도 남겼다. 두 말 모두 라플라스가 실제로 한 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사람의 생각이나 말은 방대하지만 분류한다면 크게는 의견·가설·이론·진리 중 하나다. 사람에 따라 신(神)의 존재는 의견도 될 수 있고 진리도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제법 잘 작동하는 가설’에 불과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민주적 시장경제’가 만고불변의 진리다.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두 개의 의견·가설·이론·진리가 충돌하는 현장에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됐다.

『별에서 온 메신저』 출간으로 주목받기 시작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오는 고문의 위협 때문에 지동설 주장을 철회했지만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속삭였다고 알려졌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을 비롯해 많은 ‘권위’ 있는 인사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떠받든다. 갈릴레오는 관찰과 실험을 중시했으며 수학을 과학이라는 활동의 도구로 삼았다. 그 이전에는 권위가 중시됐다. 신학에서는 성경의 권위, 교부들의 권위가 이설(異說)을 잠재웠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 저작의 권위를 과학의 모태인 자연철학과 신학 모두가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갈릴레오는 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철학자·공학자·예술가다. 그는 ‘폴리매스(博識家·polymath, 지식이 넓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였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류트 연주자였다. 그는 14~16세기 르네상스와 17세기 과학혁명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였다.

갈릴레오의 업적 목록은 길다. 진자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했다. ‘물체의 낙하 속도가 무게에 비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했다. 물체 운동론을 연구하여 관성의 법칙을 밝혀냈다. 속도와 가속도의 개념을 확립했다. 나침반의 디자인을 개량했다. 상대성이론을 제시했다. 1612년에는 해왕성을 관찰했다.

1610년 갈릴레오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유럽의 스타로 떠오른다. 『천계 통보』로도 번역되는 『별에서 온 메신저(Sidereus Nuncius, The Starry Messenger)』 출간으로 이목이 집중됐다. 팸플릿 크기의 문헌이었지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정은 이렇다. 갈릴레오는 1609년 네덜란드에서 작은망원경(spyglass)이 발명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개량 작업에 착수했다. 직접 렌즈를 갈고닦아 32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했다. 망원경으로 달의 산맥과 분화구, 태양의 흑점, 목성의 달 4개를 발견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목성의 달은 69개다. 은하수는 수많은 천체의 집합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토스카나의 대공인 코시모 2세 데 메디치(1590~1621)가 갈릴레오를 메디치 가문의 수학자·철학자로 임명했다.

1921년 랜들 데이비드슨(1848~1930) 캔터베리 대주교가 아인슈타인에게 상대성이론이 신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상대성은 전적으로 과학의 문제다. 종교와 무관하다”라고 답했다. 아인슈타인과 갈릴레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다. 갈릴레오의 시대에 종교와 과학은 제대로 분화되지 않았다. 예컨대 갈릴레오는 1588년 24세 때 단테(1265~1321)의 『신곡』(1314)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 강연에서 갈릴레오는 『신곡』의 지옥편을 바탕으로 당시 학자들이 생각한 지옥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마키아벨리(1469~1527)가 정치와 종교를 분리했다. 갈릴레오는 과학과 종교를 서로 무관하게 만드는 과정의 핵심에 놓였다. 하지만 갈릴레오 자신은 종교와 과학의 분리보다는 ‘행복한 결혼’을 꿈꿨다. 그게 화근이었다.

갈릴레오는 태양중심설(heliocentrism), 즉 지동설을 주장하여 종교재판을 받았다. 당시 과학자·신학자들이 수용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설(geocentrism), 즉 천동설과 충돌한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와 기원후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가 발전시킨 천동설을 교회가 수용한 배경에는 ‘신이 인간을 최고의 창조물로 창조했다면 우주의 중심에 두었을 것이다’라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인가 태양인가’가 문제였다. 사실은 둘 다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 갈릴레오는 지구를 비롯한 천체들이 우주의 중심인 태양을 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성경의 여러 구절과 어긋났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천체들이 ‘완벽’하다고 봤는데, 갈릴레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망원경을 통한 관찰로 발견했다. 태양에는 흑점이 있었고 달은 울퉁불퉁했다.

갈릴레오는 오늘날에도 가톨릭 신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건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일각에서 갈릴레오 사건은 결코 과학과 종교가 충돌한 사건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좀 궁색한 일종의 ‘물귀신’ 주장도 있다. 개신교 신자로서 천동설을 지지한 케플러(1571~1630)를 옹호한 것은 예수회 과학자들이었라는 식의 주장이다.

갈릴레오가 천동설의 증거를 완벽하게 제시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지목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천동설을 주장한 이유는 지동설의 결정적 증거인 시차변화(視差變化, parallax shift)를 관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궤도에 따라 움직인다면 별의 위치와 관련된 시차변화가 관측되어야 한다. 갈릴레오 당시 장비로는 시차변화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 입장에서 갈릴레오 사건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오 시대나 지금이나 가톨릭 교회가 과학의 강력한 후원자라는 것을 지적한다. 무지몽매한 교회가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자연의 법칙은 수학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한 최초의 근대 사상가이지만 그에게 수학적 방법을 가르친 것은 가톨릭 스콜라학파의 자연철학자들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무엇이 오해와 진실일까.

일부 성경 구절들(예컨대 여호수아 10장 13절에 나오는 ‘해는 중천에 멈추어 하루를 꼬박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전도서 1장 5절의 ‘떴다 지는 해는 다시 떴던 곳으로 숨가삐 가고’)이 코페르니쿠스주의와 충돌하는 게 문제였다. 갈릴레오가 이신론자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인식된다.

갈릴레오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했을 때 과학과 충돌하면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문자주의(literalism)에 반대한 것이다. 해의 움직임에 대한 성경 구절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갈릴레오 또한 성경이 무오류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대안적 성경 해석을 제시한 게 문제였다. 신학자들은 신학자가 아닌 갈릴레오의 가르치려 드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반 종교개혁 분위기가 압도했다. 개신교의 자유로운 성경해석 주장과 달리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래 가톨릭 교회는 성경 해석을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고 봤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갈릴에오의 적들은 갈릴레오가 마르틴 루터(1483~1546)와 장 칼뱅(1509~1564)을 합친 것보다 교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1616년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1543)가 금서목록에 올랐다. 태양중심설이 이단 판정을 받은 것이다. 교황 바오로 5세(1550~1621)는 갈릴레오를 불러 그리스도교 교리와 맞지 않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공식 석상에서 지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갈릴레오의 지인인 마페오 바르베리니가 제235대 교황 우르바노 8세(재위 1623~1644)로 즉위했다. 새 교황은 갈릴레오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갈릴레오는 집필 허가를 받았다. 중립적으로 천동설과 지동설을 논하며 ‘지동설은 가설이다’ 정도로 기술하면 용인한다는 합의가 있었다. 교황은 ‘인간 능력으로는 우주가 실제로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식의 결론을 원했다. 그때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아 집필에 6년 걸렸다. 갈릴레오는 1632년 『천문 대화(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 Ptolemaic and Copernican)』를 교회 승인과 검열을 받고 출간했다. 초기 반응은 좋았다. 전 유럽에서 문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걸작이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 실제 여부 논란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무덤이 있다.
자신의 설득력을 과신한 게 문제였다. 『천문 대화』는 중립성을 가장했지만 지동설 쪽으로 기울었다. 교황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천문 대화』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주장하는 인물은 바보처럼 보였고 그 ‘바보’의 입에서 교황이 평소에 하는 말을 나오게 했다. 호의적이었던 교황은 등을 돌렸다. 결국 갈릴레오는 1633년 로마에서 종교재판에 처해진다. 처음에는 “태양중심주의를 표방한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가 증거가 명백하자 “고의가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갈릴레오는 빈첸초 갈릴레이와 줄리아 암마나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귀족 집안이었으나 재력은 보통이었다. 아버지는 유명한 작곡가였는데 양모 교역에도 종사했다. 갈릴레오는 1581년 피사대 입학 전 수도원에서 공부했다. 원래는 성직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의학 공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8세에 우연히 수학 수업을 들은 갈릴레오는 의학에서 수학·자연철학으로 전향했다. 갈릴레오는 경제적인 문제로 1585년 대학을 중퇴했다. 4년 동안 수학 과외선생으로 연명했다.

1591년 아버지가 사망했다. 갈릴레오는 장남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여동생들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가장으로서 갈릴레오는 돈을 밝혔다. 피사대에서 파도바대로 옮기면서 월급이 3배가 됐다. 파도바대에서 갈릴레오가 의사가 될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지구중심설 천문학이었다. 천문학을 알아야 점성술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의사들은 점성술을 치료에 활용했다.

파도바대 시절은 갈릴레오 인생의 황금기,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마리나 감바라는 여성과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2녀1남을 낳았다. 1600년 비르지니아, 1601년 리비아, 1606년 빈첸초가 태어났다. 갈릴레오는 나중에 빈첸초를 적출로 인정했다. 딸들을 수녀로 만들었다. 말년에는 한 유부녀와 염문을 뿌렸다.

갈릴레오는 자기홍보(self-promotion)에 능했다. 권력자들에게 아부도 잘했다. 하지만 학문 세계에서는 적도 많이 만들었다. 적들은 길길이 뛰었다.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증명해 굴욕감을 선사했다. 갈릴레오는 피사대 교수 시절부터 적을 만들었다.

순교란 무엇인가. 갈릴레오는 순교하지는 않았다. ‘비겁’하게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77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이에 대해 독일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1862~1943)는 이렇게 갈릴레오를 옹호했다. “갈릴레오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멍청이들이나 과학에 순교자가 필요하다고 믿을 것이다. 종교에는 순교자가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의 결과는 때가 되면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다.” 과학에서도 사필귀정은 진리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E pur si muove!)”는 말을 갈릴레오가 실제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힐베르트의 말처럼 지동설은 확고히 자리 잡았다. 시간이 좀 걸렸다. 1828년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와 갈릴레오의 『천문 대화』가 금서 목록에서 풀렸다. 교황의 명으로 1981년부터 11년 동안 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1992년 10월 31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가톨릭 교회를 대표해 갈릴레오 재판에서 오류가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재판 받을 때 거의 70세였던 갈릴레오는 9년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편안한 생활이었다. 1638년 출간한 『신과학 대화(Dialogue Concerning Two New Sciences)』를 집필했다. 1638년에 실명했다. 갈릴레오의 무덤은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에 있다. 이탈리아의 자랑인 미켈란젤로·마키아벨리 같은 인물들도 그곳에 영면을 누리고 있다.

갈릴레오가 오늘의 최고경영자에게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그는 역사상 대표적인 ‘컨트레어리언(contrarian)’이다.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증권 분야에서는 ‘통념과 반대되는 투자를 하는 역(逆)투자가’를 의미한다.

갈릴레오의 인생

1581년: 피사대 입학
1589~92년: 피사대 수학 교수
1592~1610년: 파도바대 교수
1610년: 『별에서 온 메신저』 출간 코시모 2세의 수학자·철학자로 임명됨
1613년: 『흑점에 관한 편지들』 출간
1623년: 『분석자』 출간
1632년: 『천문 대화』 출간
1633년: 종교재판을 받고 가택연금됨
1637년: 실명
1638년: 『신과학 대화』 출간
1642년: 아르체트리에서 별세

갈릴레오의 말말말

● 너무 무식해서 배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을 나는 만난 적이 없다.
● 진리는 일단 발견한 다음에는 이해가 쉽다. 진리를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 성경은 하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 내가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플라톤의 조언에 따라 수학부터 시작하겠다.
● 자연의 문제를 논할 때에는 성경이 아니라 실험과 증명에서 시작해야 한다.
● 과학의 문제에서는 단 한 명의 겸허한 논증(論證)이 1000명의 권위보다 더 가치 있다.
● 증명된 것을 이단으로 만드는 것은 틀림없이 영혼에 해를 입힌다.
● 셀 수 있는 것을 세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을 측정하고,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측정할 수 있게 만들라.

-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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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호 (201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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