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왼손으로만 연주한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었다. 참전하기 전 나름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왼팔만 남은 상황에 낙담하지 않았다. 왼손으로만 연주하는 레퍼토리를 개발하여 순회 연주를 다녔다.

▎피아노 치는 파울 비트겐슈타인. / 사진:김진호,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1.1. 세계는 사물이 아니라 사실들의 총합이다.
1.11 세계는 사실들에 의해 결정되며, 이런 것들이 모든 사실이라는 점에 의해 결정된다.
1.12 왜냐하면 사실의 총합은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그리고 무엇이 일어나지 않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대단히 심오해 보이는 위의 글은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동생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것이다. 1921년 출판된『논리-철학 논고』는 저자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에 대한 최종 답변으로, 철학을 끝장낼 연구로 제시됐다. 그는 철학의 여러 주요 문제는 인간 언어의 문제점들에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하며, 자신은 언어가 만들어낸 마술에 따라 빚어진 ‘철학이라는 이름의 혼란’을 청소했다고 말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학부생으로서 철학을 조금 공부했던 것이 철학적 이력의 전부였던 이 철학계의 이단아는 이후 철학자로서 신화적 명성을 얻는다. 오늘날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동생의 명성에 눌려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살아생전에는 동생보다 형이 더 유명했다.

루트비히와 파울의 아버지는 카를 비트겐슈타인으로, 당대 세계 최고 부호 중 한 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 귀족들의 토지 관리인으로 성공한 유대인 중산층 집안에서 더 큰 성공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두 번이나 가출했던 카를의 인생에는 고(故) 정주영 회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 위조여권을 들고 미국으로 떠났던 17살 카를은 브로드웨이의 음식점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등 온갖 궂은 경험을 하다가 충격적인 몰골로 다시 집에 돌아온다. 이후 카를은 당분간 대학을 다니고 오후에는 강의를 빼먹고는 국영 철도회사에서 일하는 등 암중모색했다. 여러 공장에서 임시직을 전전하더니, 능력을 발휘해 정규직 자리를 꿰찼다. 유대인 여성과 결혼한 후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테플리츠 제강소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의 여러 공장을 사들였다. 은행업에도 진출했고, 부동산업도 하여 엄청난 땅을 사들였다. 1890년대 카를은 크루프, 카네기, 로트실트 등과 함께 세계를 움직이는 부호 반열에 오른다.

카를은 제국 내 유명 언론사에 글을 기고하며 지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카를의 글 내용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학설을 연상시킨다. 정부의 관세정책과 농민보호 정책을 비판하며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교류를 위해 국가 간 여러 장벽을 철폐하자는 내용들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지금도 개별 국가 단위에서 뜨거운 감자로 여겨지고 있는데, 당시에도 같았다. 사업가들은 지지했고 서민들은 반감을 표시했다. 농민을 비롯한 서민들 말고 또 누가 이런 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반감을 표시할까. 관세가 없어지면 생계 수단과 함께 삶의 이유도 없어지게 되는 세관원 같은 직종의 종사자들 아닐까. ‘정부는 왜 진보를 위해 과감하게 규제를 풀지 않느냐’는 카를의 일갈은 징세 업무를 담당하며 정부의 녹을 먹고 사는 한 세관원과 그의 아들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그 아들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카를의 집은 웅장한 궁전이었다. 널찍한 응접실, 웅장한 계단과 음악회장, 클림트와 같은 유명 화가들의 그림 작품들로 도배된 길고 화려한 복도, 화려한 금박을 입힌 수도와 세면대가 있는 수많은 화장실이 있었으며, 많은 방에 기거하는 하인들과 식객들로 붐비는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호화로운 그림을 많이 사들인 카를을 클림트는 미술부 장관이라 불렀다. 궁전 내 음악회장에선 연주회가 끊이지 않았다. 가장 많이 초대된 음악가는 브람스였고, 카를의 친척이기도 했던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도 자주 들락거렸다. 요하임은 이후 베를린의 예술학교 교장이 된다. 이 학교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바로 국립 베를린 음대다.

궁전에 초대받지 못했을뿐더러, 요하임의 권력 때문에 베를린 예술학교 교수도 되지 못해 이를 갈았던 당대 최고의 작곡가가 있었으니 오페라 작곡가 바그너다. 카를이 클림트 등의 그림들을 사주었다면, 사주지 않아 결과적으로 홀대하게 된 화가들도 있었다. 그런 화가들 중 한 명인 알프레드 롤러 같은 이가 있었는데, 롤러를 열렬히 추종했던 이가 바그너의 광팬이자 풋내기 화가였던 히틀러였다.

히틀러와 악연이 있던 비트겐슈타인 가문


▎클림트, [마르가레트 스톤보로- 비트겐슈타인의 초상화]. 마르가레트 그레틀은 파울과 루트비히의 누나다. / 사진:위키피디아
히틀러는 이렇게 두 가지 차원에서 비트겐슈타인 가문과 악연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그가 다녔던 린츠의 실업학교 동기생 중 그가 보기에 재수 없던 이가 있었으니, 카를의 아들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다. 유대인 루트비히가 히틀러와 직접 교류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히틀러의 회고록을 보면 ‘재수 없는 유대인’에 대한 언급이 자주 있었고, 그 묘사는 루트비히를 가리키고 있다. 600만 유대인을 학살하게 한 그의 대(對)유대인 악감정은 이렇게 개인적 경험에서 자양분을 얻었다. 물론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도 한몫했다.

놀라운 음악적 능력과 취미를 보였던 카를은 자식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성은 전승됐다. 파울은 물론 루트비히도 대단한 음악성을 보였다. 그들처럼 음악적, 예술적 능력을 과시했던 또 다른 이는 바로 히틀러다. 히틀러와 루트비히는 회고록과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고등학교 시절 이미 여러 작곡가의 작품들을 알고 있었고, 그것들 중 상당수를 외우고 있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이 공통으로 좋아하는 작곡가가 있었으니, 카를에게 홀대를 받았던 바그너다.

1913년 흥청망청 화려했던 제국은 종전까지 850만 명 전사자를 낳은 희대의 전쟁에 끌려들어 간다. 유대인들은 훗날 있을 유대인 박해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애국심을 가지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위해 참전했다. 파울과 그의 형제들도 참전했다. 파울의 형이었던 쿠르트는 전사했고, 러시아 군대와 교전했던 파울은 총을 맞고 오른팔을 잃었다. 당시 기록상으로 영하 76도까지 떨어졌다는 시베리아의 포로수용소에서 갖은 고생을 한 파울은 이후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가 된다. 동생인 루트비히는 케임브리지에서 일단의 동성애자들과 함께 소련과 은밀히 접선해 나치의 패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 손만으로 매일 7시간씩 연습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사진:김진호
아버지의 강인함과 능력은 어쨌든 이 두 형제에게 전해졌다. 실망하지 않았고, 자기 연민을 경계했던 파울은 주변 사람들의 동정과 돕겠다는 선의를 매몰차게 거절했으며 추운 겨울 한 팔만으로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암중모색 후 파울은 왼팔만으로 피아니스트의 삶을 계속 살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수용소에서 그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양손으로 연주되는 곡들을 왼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했다. 그가 암기한 곡이 많았고, 이 불굴의 투사는 그 많은 곡을 오로지 머릿속에서 편곡해야 했다. 포로들에게 오선지가 제공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편곡되어 기억된 곡들은 대부분 독주곡이었다. 화려한 무대를 생각하면 독주곡보다는 협주곡이 낫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독주 악기가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연주하는 장르를 협주곡이라 하는데, 아무래도 협주곡 연주에는 관중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잘 아는 파울은 이제 새롭게 작곡된 왼손만을 위한 협주곡을 필요로 했다. 전문 작곡가가 아니었던 그는 당대 유명 작곡가들에게 왼손만을 위한 협주곡 작곡을 의뢰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자유로이 하려면 수용소에서 풀려나야 했다. 탈출도 시도했고, 돈으로 나가려는 시도도 했으나 중간에서 배달사고가 나는 등 파란만장한 사건이 있었다. 마침내 1915년 11월 귀가할 수 있었다.

1916년 3월, 파울은 자신의 대저택 음악회장에서 개인연주회를 여는 것을 필두로 여러 음악회를 조직했다. 매일 7시간씩 연습했고, 한 손만으로 두 손이 연주하는 효과를 내기 위한 마법적 조치들을 고안해냈다. 여러 작곡가가 그의 돈을 바라고 왼손만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해주었다. 그중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이 가장 좋았다. 1933년 파리에서 초연한 이 곡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오늘날에도 꽤 많이 연주되는 레퍼토리다. 오늘날엔 양손을 다 가진 연주자가 이 곡을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

파울은 이후 히틀러가 집권한 나치 정권하에서 미국으로 망명한다. 1961년 미국에서 사망했고, 그의 아내는 2001년에 세상을 떴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거액의 유산으로 아버지처럼 여러 악보, 그림 등을 수집했다. 아내의 사후 그가 수집했던 귀중한 악보들이 경매로 처분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중국인 기업가에게 매각됐다.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1905호 (201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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