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3)] 쇠붙이 조각가 엄태정 

“조각은 내 안의 ‘낯선 자’를 만나는 과정” 

천안=정형모 전문기자&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 hyung@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작가 엄태정(81)은 한국 추상조각 1세대로 꼽힌다. 그에게 조각은 사물의 형상화가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누군가를 찾아가 만나는 과정이자 결과다. 그는 이것을 무쇠로, 구리로, 알루미늄으로 차근차근 표현해왔다. 묵직하고 차가운 물성의 쇠붙이는 작가의 손을 거쳐 간결하고 명징한 오브제로 구현된다. 아라리오갤러리 천안(1월 22일~5월 12일)과 서울(1월 22일~2월 24일)에서 열리고 있는 대규모 전시 ‘두 개의 날개와 낯선 자’는 구도자를 자처하는 작가 내면의 ‘낯선 자’를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엄태정 조각가가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의 3층 전시장에서 쇠와 알루미늄으로 만든 작품 ‘두 개의 날개와 낯선 자’ 앞에 서 있다.
미대 입학을 위해 소묘를 배우기 시작한 전남 광주의 한 고교생에게 어느 날 입시 지도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어이쿠, 브랑쿠시 선생님이 돌아가셨네. 조각을 하려면 브랑쿠시를 알아야제. 조각이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거든. 니도 조각혀라.”

철사를 갖고 이것저것 만들기 좋아하던 청년에게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라는 이름은 그렇게 짝사랑의 대상이 됐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 시절 내내 닮고자 했던 모델이자 넘어서야 할 벽이기도 했다. 특히 티베트 불교의 성인 밀라레파의 사상에 심취했던 브랑쿠시의 구도자적 자세는 작가에게 사물의 본질을 묻는 기본 태도가 됐다. 미술평론가 심상용은 “고도의 정신적 수행과 명상이 기반이 되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깊숙이 내재하는 본질에 대한 통찰, 그리고 일체의 조각적 수사나 화려하거나 시각적으로 매료될 만한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은 브랑쿠시의 조형적 기조와 분위기에 엄 작가는 깊이 매료됐다”고 설명한다. 작가가 사물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 시도한 방법 역시 브랑쿠시의 작품 같은 추상 조각이었다.

“조각은 치유의 과정… 완성할 때마다 신을 만난다”


▎아라리오갤러리 천안 전시장 계단에 설치된 ‘무한주-하늘계단’ (2012), 종이에 잉크·아크릴
왜 추상 조각을 시작했나?

1960~7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현대미술이 막 시작될 때였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책무랄까, 일종의 ‘시대정신’이랄까, 그런 작가적 의식이 있었다. 당시 작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전에서 4년 연속 특선을 해야 했는데, 66년인가 국전 조각 부문이 구상과 비구상으로 처음 나뉘었다. 67년 제16회 국전 조각 비구상 부문에서 철 조각 ‘절규’로 국무총리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추상 조각을 시작했다.

추상 조각의 예술성은 어떤 것인가?

추상 조각은 사물의 형태를 모방하는 게 아니다. 사물을 사유하고 사물의 본질을 수행을 통해 찾아내는 일이다. 그 본질이 뭔지 깨닫는 과정에서 내가 가진 치유의 공간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낯선 자’를 만나게 된다.

‘낯선 자’가 누구인가?

나를 구원하는 타자(他者)다. 내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의존하는 대상이다. 신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나는 내가 의존하는 신을 만난다. 치유받고자 할 때마다 신을 만날 수 있다.

그 ‘낯선 자’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나의 내면에서 꺼낸 무엇이고, 누군가다. 저게 바로 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이다.

조각하는 일은 치유의 과정인가?

그렇다. 조각은 나를 치유한다. 치유받기 위해 노력한 욕망이 ‘낯선 자’로 나타나면 나는 치유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한다. ‘하나님, 치유의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쇠에서 구리로, 다시 알루미늄으로… 금속의 물성 파악


▎‘순례길-키스마나’(1980), 황동, 34×34×34(h)㎝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점은 신세계백화점 천안점 옆 단독 건물에 있다. 3층 전시장으로 올라가면 무쇠와 알루미늄 덩어리로 만든 조각품과 드로잉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이곳은, 작가에 따르면, ‘낯선 자’를 만날 수 있는 ‘치유의 공간’이다. 시심(詩心) 역시 가득하다는 작가는 바람벽에 붙여놓은 ‘치유의 공간’이라는 시에서 “내가 조각이 되기를, 조각이 내가 되기를 기도한다”고 읊었다.

3층에 있는 작품들은 일부 드로잉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지난해 만든 신작이다. 팔순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력적인 작업이다. 전시장 한가운데 있는 조각 작품 네 점을 두고 작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한다. 전시장 앞에 있는 ‘고요한 벽체와 나’(2018)는 겨울을 의미하는데, 널찍한 알루미늄 패널은 매서운 추위를 한가득 품은 겨울 하늘을 닮았다. 네모와 사다리꼴이 서로 겹쳐진 조각 작품의 모양새는 보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두 개의 날개와 낯선 자’(2018)는 앞에서 보면 십자가처럼 보이고 뒤에서 보면 두 개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이 작품들은 무쇠와 알루미늄을 속까지 채워넣어 무게가 상당하다. 작품당 0.5톤가량 된다. 무거움도 작품성 중 하나다. 작가는 무게를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작품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만다라’ (2018), 종이에 잉크·아크릴, 145×435㎝
드로잉 작품인 ‘틈’ 시리즈 역시 눈길을 끄는데, 얼핏 두툼한 붓으로 검은색을 칠한 뒤 펜촉으로 하얗게 긁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느다란 펜을 이용해 드넓은 검정 평면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작가가 들인 엄청난 공력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엄 작가는 이를 두고 “어둠과 어둠 사이의 작고 가느다란 틈은 밤을 이겨내는 에너지”라며 “틈은 새벽이 오게 하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4층에서는 무쇠를 떡 주무르듯 휘게 만들어 동적인 움직임을 부각한 ‘기(氣) 69-1’(1969)을 비롯,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청동기의 흐름-73’(1973), 통일에의 염원을 담아 제네바 한국대표부 건물 정원 앞에 설치했던 ‘청동-기-시대 97-9-통일’(1997) 등 시대별 대표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엄 작가는 초기에는 무쇠를 쓰다가 구리로 바꿨고, 2000년 이후 알루미늄을 주재료로 택했다. 재료의 특성을 하나씩 정복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쇠는 용접이 쉽지만 구리는 특수용접을 해야 한다. 쇠에 비해 다루기 어렵고, 테크닉이 필요하다. 알루미늄은 물성 자체가 중성적이다. 그런 특징들을 적절히 활용해 작품을 만든다. 객관적 지식을 초월할 수 있어야 예술이 되는 것이다.”

‘현대 조각의 아버지’ 브랑쿠시, 작가의 영원한 짝사랑


▎‘어느 평화로운 공간’ (2018), 강철, 80×280×120(h)㎝
작가와의 대화는 어느새 ‘현대 조각의 아버지’라는 브랑쿠시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있었다. 해외 여행을 갈 때마다 자료를 사 모으며 한국에서 ‘브랑쿠시 전도사’를 자처해왔다는 작가는 브랑쿠시와의 세 가지 인연을 들려주었다.

1979년 여름 영국 세인트 마틴 유학길에 잠시 들른 파리에서 그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몽파르나스에 있는 브랑쿠시의 묘소였다. 사 들고 간 국화꽃 한 다발을 내려놓고 추모하는 시간, 그의 머릿속엔 얼마나 많은 상념이 교차했을까.

두 번째로는 1998년 회갑 기념으로 성지 순례하듯 찾아간 루마니아 호비차의 브랑쿠시 생가 여행을 꼽았다. “조국에 자신의 모든 작품을 기증하려 했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이 득세하던 미술계와 조국에 거부당하고 결국 프랑스 근대미술관 좋은 일만 시켜줬다”는 얘기와 함께.


▎엄태정 작가의 아라리오갤러리 천안 전시장 풍경
세 번째는 2004년 정년 퇴임하면서 브랑쿠시 연구서 『조각과 사유』를 출간하고 기념 강연도 했다는 것을 꼽았다. “브랑쿠시가 파리에 정착한 것이 1904년이다. 그 100주년에 제가 정년퇴임을 하게 된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작가는 자신이 경기도 화성에 세운 ‘엄미술관’에서 지난해 브랑쿠시를 추종하는 루마니아 작가를 초청해 개관 5주년 기념 및 브랑쿠시 서거 60주년 기념전도 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브랑쿠시는 천(天)·지(地)·인(人)의 작가다. 대표작 ‘새’는 하늘을, ‘대지의 지혜’는 땅을, ‘더 키스’는 인간을 의미한다. 땅을 중심으로 하늘과 인간을 연결한다는 티베트의 만다라와도 연결돼 있다. 오는 5월 14일 대한민국예술원 정기 모임에서 ‘브랑쿠시의 천·지·인’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한다. 세계 브랑쿠시 학회에서도 선보일 계획이다. 내가 그렇게 끈질긴 사람은 아닌데, 브랑쿠시에서 아직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하하.”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1905호 (2019.04.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