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정승우 유중재단 이사장 

“한국 문화예술의 품격 높이겠다”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사진 김현동 기자
서른둘, 멀쩡한 대기업을 다니다 아트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나선 그에게 쏟아진 건 격려보다 비난이 많았다. 어느덧 개관 8주년을 맞았다. 연주자와 미술 작가 1000여 명을 지원했다. 약 250여 회 공연과 200여회 전시를 진행하며 서초 대표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유중아트센터를 이끄는 정승우(41) 유중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유중아트센터는 갤러리와 아트 홀이 이어져 있다. 연주자와 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공존하는 셈. 왼쪽 사진 작품은 [안준_One Life #002, HDR Ultrachrome Achival Pigment Print, 101.6x76.2㎝, 2017]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후원에서 한 걸음 나아가고 싶었어요.“

무모하다는 지적에도 정승우 이사장이 건물 전체를 아트센터로 탈바꿈했던 계기다. 4월 17일 정승우 이사장을 만난 유중아트센터는 유중그룹 산하 비영리 공익재단이다. 서초구 방배로에 있는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의 건물이었다. 예술가 지원 방안을 고민하다 실천한 첫걸음은 건물 개축이었다. “신축 공사보다 낡은 건물을 개축하는 게 더 힘들더라고요.”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를 위해 천장을 높이고 시설 개·보수를 하는 데만 큰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당시 시작부터 정말 제대로 하는 게 맞을까, 수없이 자문했죠. 어쩌겠어요. 이미 강을 건너면서 배를 불살라버렸는걸요.”(웃음)

한 층 면적이 826㎡(200평)인 공간은 꽤 널찍했다. 층마다 아트 홀, 갤러리, 연습실 등 특색에 맞는 공간으로 구획했다. 2층 로비에 들어서자 벽을 둘러 하나의 갤러리처럼 많은 현대미술 작품이 걸려 있었다. 오른쪽에 150석 규모의 아트 홀이 자리 잡았고 채임버 연습실, 개인연습실 등이 마련됐다. 3, 4층은 갤러리다. 외부는 전경이 탁 트인 옥외전시장으로 꾸몄다. 이곳은 매달 열리는 ‘유중의 밤’ 콘서트 때 교류의 장으로 변신한다. “유중아트센터는 국내외 시각예술 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예술 장르가 시너지를 이루며 자생력을 갖추고 예술 사업에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노력했습니다. 복합문화공간에서도 젊은 예술가들과 참신하고 수준 높은 예술을 갈망하는 청중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 왔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정승우 이사장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지하 전시장에는 스타트업 로펌이 자리 잡았다. 유중재단이 고려대 로스쿨에 10억원을 기부하면서 법조인을 위한 ‘법창의 센터’가 들어선 것이다. 건물의 정체성에 혼란이 있을 법한 대목이다. 문화공간에 로펌이라니.

사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은 정승우 이사장의 모교다. 법학도였던 그는 현재 고려대에서 법학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예술품 국제거래, 분쟁해결과 관련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서다. 법과 예술이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력은 결국 문화예술로 관통한다. “어린 시절 사회 정의를 이루고자 판검사를 꿈꿨어요. 전혀 다른 맥락 같지만 지금은 예술인들을 법적으로 보호해줄 수 있는 정의를 실현하고자 해요.” 그가 후원하는 청년 변호인들도 예술과 관련된 법조인들이다. “예술인 복지, 저작권, 세무사, 관세사, 법무사 등 전문가들이 팀을 꾸렸어요.”

유중재단 이사장인 그는 현재 직함만 20여 개다. 그것도 아트센터를 설립한 2011년 이후 활동한 이력이다. 한국판화사진진흥협회 회장, 대구사진비엔날레 육성위원회 위원, 서초장학재단 이사, 문체부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 TF위원, 김포외국어고등학교 이사 등이다.

소장품을 활용해 문화예술 향유 나누고 싶어


해외 출장도 잦다. 전시 관련 미팅, 아트페어, 해외 경매 참석, 해외시장 발굴을 위한 현지 전문가와 정부 관계자 미팅 등이 주를 이룬다. 일본은 무조건 당일치기다. “계약서에 사인할 일이 있으면 볼일 보고, 라면 먹고 돌아오기도 해요.”(웃음) 하루 일정은 빡빡할 수밖에 없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이메일로 업무를 보고 오전에 재단에 들른다. 대부분 외부 일정이다. 현재 맡고 있는 단체 방문만으로도 일주일 일정이 꽉 찬다. “쉬는 시간은 그나마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비행기 안일 정도예요.” 휴대폰도 여러 대다.

정승우 이사장은 컬렉터이기도 하다. 5월에 열리는 유중아트센터의 전시에는 정 이사장의 소장품을 활용한다. 장르는 현대미술, 순수 회화, 미디어 아트 등 다양하다. 게다가 작품들 앞에는 경계선도 없어 가까이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개인 컬렉터로 소장품을 선뜻 공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정 이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소장만 하고 있기에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작품들이 불쌍하던데요.” 그는 많은 이들이 좋은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비구상 추상화를 좋아하지만 갤러리에 자신의 취향만 반영하지는 않는다. 많은 이와 미술시장의 흐름을 공유할 수 있도록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다. 컬렉터를 하는 이유도 소장품으로 현대미술관을 세우고 싶다는 큰 포부 때문이다. 일단 아트센터 형태의 갤러리로 운영하면서 점차 확장할 계획이다.

정 이사장의 기부를 통한 사회환원은 기업의 ‘메세나’ 형태다. 메세나는 기업들이 문화예술을 적극 지원하는 사회공헌 활동을 말한다. 정승우 이사장은 메세나협회 회원이다. “메세나가 그렇게 거창한 단어는 아니에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저도 하는 걸요.” 정 이사장이 겸손하게 답했다. “사실 협회에서 귀동냥을 많이 하고 있어요.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 종사하는 선배들의 메세나 활동을 옆에서 보고 듣고 배울 수 있거든요. 사회공헌은 체계적이어야 하고, 전문성을 갖춰야 하더라고요.”

‘유중(UJUNG)’은 외증조할아버지의 호를 딴 이름이다. ‘지덕체 삼위일체의 인재 양성’을 강조해온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자 했다. 외증조부는 그에게 특별한 분이었다. “어린 시절 제 눈에 보인 할아버지는 항상 중절모에 단정한 양복을 입은 신사셨어요. 올곧고 꼬장꼬장하시기도 했지만, 전 할아버지가 참 좋았어요. 집에 돌아가지 마시라고 지팡이를 숨겨놨을 정도예요. 실향민이었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 저에게 바이올린을 선물하시면서 말씀하셨어요. ‘우리나라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문화예술이 새로운 품격을 선물할 거다. 품격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 피아노 연주를 배웠고 고등학교 시절에 떠난 미국 유학에서 위로가 된 것도 음악이었다. ‘나고 자란 고향(서초)에서 예술로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겠다’고 막연히 꿈꾼 것도 그때부터였다.

대학 졸업 후 사회 초년생으로 일한 건 실무를 배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삼미문화재단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사회공헌사업 분야를 담당했다. 희귀난치병 환자를 도왔다. 이후 대우조선 해양에 입사한 그는 감사실에서 계약관리, 일상 감사, 선주 가족들의 국제학교 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유중재단 설립을 비롯해 서초장학재단 이사, 김포외국어고등학교 이사직을 수락한 계기가 됐다. “사람을 키우는 일에 돈을 쓰는 게 대단한 자산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5월 예정된 [팝업아시아: 4인 4색] 전시는 세계적인 아시아 팝 아티스트의 작품으로 준비했다. (왼쪽) 쿠사마 야요이 Dancing pumpkin, screenprint, 39.5x56.3㎝, 2004. (오른쪽) 쿠사마 야요이 Pumpkin, lithograph and screenprint, 64x54.8㎝,1982.
사진예술 지원에도 박차를 가했다. 한국판화사진진흥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최근 대구사진비엔날레 육성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기자님께는 사진이 기록매체지만, 예술의 범주에선 복수 미술 장르에 속합니다.”

하지만 사진 작품들은 저평가돼 있다. 접근성이 좋지만 지원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정 이사장은 설명했다. “정부 지원금에서는 지원금 대비 효율(판매 금액)을 따지는데 사진과 판화는 복제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매출이 적을 수 밖에 없어요. 지원을 받아도 자생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소외 장르가 되기 십상이죠.” 그가 판화사진진흥협회 회장을 맡아 판화 및 사진작가들 지원에도 총대를 멘 이유다. 벽에는 안준 작가의 사과 작품이 걸려 있다. 정 이사장이 속한 협회 출신 작가가 세계적으로 촉망받는 작가로 성장해 자랑스러워서 걸어두었단다.

그는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미술시장의 국제화에 기여하겠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미술품 거래가 활발해졌고, 해외 온라인 경매도 활발해지며 거대한 유통시장을 형성했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 고가의 작품들이 송금 과정이나 매매자의 변심, 작품 하자 등으로 분쟁을 겪는 일이 빈번하다. 책임 소재의 문제로 번지기도 한다. 정 이사장은 “나라마다 미술 작품 보관이나 배송, 청구권 행사 등 규제가 다르다 보니 충돌 규정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런데도 아직은 미술시장에서 이런 법적인 보호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큰 화랑들은 정보공개를 꺼리기도 하고 골치 아픈 절차를 피하고 싶어서 오히려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국제법 거래의 분쟁 해결 연구자로 기여하고 싶어”


▎3,4층에 있는 유중 갤러리.
한국 미술시장의 개혁도 필요하다. 정 이사장은 “세계적으로 경기가 안 좋아 침체를 겪는 건 맞지만, 냉정하게 말해 베트남 작가보다 한국 작가들 작품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더불어 규제나 관리에서 아직 체계화되지 못한 부분이 많다. 특히 상도의를 벗어나는 행위도 끊이지 않고 있다. “순수한 의도로 작품을 공급하거나 신진작가를 돕는 게 아니라 오로지 수익을 위한 사업적인 용도가 많아졌다. 일부 몰지각한 업자들의 잘 못된 운영방식으로 미술품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을 심어주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지난해부터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미술 주간’ 조직위원도 맡았다. 문체부가 주최하고 예술지원경영센터에서 후원하는 국내 최대 미술 축제다. 또 문체부 미술진흥 중장기계획 TF 위원으로 한국 미술시장에 기여하고자 한다. “다음 주에는 미술품에 대한 세제 개편을 두고 연구자 자격으로 공청회에서 발제를 해요. 문화 예술의 규제개혁이 시급한 한국 미술시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적극적인 문화 교류를 위해서 민간 외교 사절로 나서기도 한다. 지난해 유중재단은 교토 조형예술대학과 교류전을 했고 올해 초 프랑스 작가들과 함께 했다. 하반기에는 베트남과 교류전을 열 계획이다. 오는 5월엔 [팝업 아시아 4인 4색]이란 전시를 연다. 쿠사마 야요이, 무라카이 다카시, 미스터, 나라 요시토모의 작품이 걸린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팝 아티스트들이다.

유중아트센터는 사업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 지리적인 이점 덕에 유중재단의 성장은 예고된 사실이다. 4월 21일 개통한 서리풀터널이 계기다. 서초역과 내방역을 2분 거리로 좁히는 이 터널로 현재 서초역에 밀집됐던 법조인들이 내방역 근처로 유입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아마도 예술의전당 근처인 유중재단은 신흥법조타운이자 예술이 공존하는 마중물 역할을 할 것 같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다양한 사회공헌 예술인 지원으로 기증, 기부, 기여에 집중하는 그에게 돌연 질문을 했다. 그래서 얻는 게 무엇이냐고. 정승우 유중재단 이사장은 희미하게 웃으며 “보람”이라고 답했다. “간단해 보이지만 제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거든요.” 그는 덧붙였다. “유중재단의 철학은 문화예술이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 없다는 ‘영속성’을 바탕으로 시작됐어요. 전 문화가 국가의 근간이 될 수 있는 아주 큰 프로젝트라 여기고 있어요. 궁극적으로는 서초구 문화특구 지정이 이뤄져 문화 융합 시대를 열어가고 싶습니다.”

201905호 (201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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