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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클라라' 전국 리사이틀로 돌아온 선우예권 

“무대 뒤 고독이 나를 더 성장하게 했다”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사진 신인섭 기자·촬영협조 YAMAHA HALL
지난해 가장 바쁜 연주자 중 한 명.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이후 세계 100회 이상 연주를 한 차세대 클래식 스타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음악 보따리를 들고 한국에 돌아온다. 오는 5월 클라라 슈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선우예권의 리사이틀 [나의 클라라]가 서울을 포함해 전국 10개 도시에서 열린다.

에피소드 1. “아이구~제가 먼저 와서 준비하고 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약속시간보다 10여 분 정도 지났을 뿐인데, 그는 너무 미안해했다. 달려온 그의 양손에는 묵직한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건강에 좋다”며 들고 온 호두와 땅콩 등 견과류와 과일주스가 한 가득이었다. 소속 회사 직원들 간식도 챙겨 왔다. 그는 빈손인 법이 없다. “선물을 할 때 기쁘다”는 그는 연주를 할 때도 누군가에게 선물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임한다.

에피소드 2. 서울 강남구 야마하홀에서 만난 그에게 살짝 연주를 부탁했다. 툭툭, 손을 털어낸 뒤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자마자 썰렁했던 홀이 마법에 걸린 듯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쇼팽(Chopin: 24 Preludes No.3, Op.28-3)은 봄바람에 휘파람을 부는 듯 부드럽고 경쾌했다. 갑자기 라흐마니노프(Rachmaninov: Prelude in g minor Op.23-5)에선 돌변했다. 입꼬리가 내려간 연주자는 이미 큰 슬픔에 빠져버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순간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에 빨려들어 온 듯했다.

예의 바르고 반듯한 모습은 그대로다. 힘이 넘치는 타건도 여전하다. 1년 전 포브스코리아 ‘POWER LEADER 2030’으로 선정됐을 때만 해도 주니어 스타 같았다. 풋풋했다. 하지만 뭔가 확실히 달라졌다. 감각은 더 예민해졌고, 또렷하던 선율엔 부드러운 실크를 입힌 듯했다. 북미 최대 경연이었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최초 한국인 우승 후 전력 질주하듯 보내며 쌓아온 고민이 건반에 녹아든 것 같았다. 연주에도 연륜이 쌓여가는 걸까. “요즘 좀 살이 좀 빠져서 그런가요?” 성숙해졌다는 말에 선우예권(32)이 자신의 볼에 손을 갖다 대며 웃었다.

영재 소년에서 청년 피아니스트로 거듭난 선우예권은 이제 완전히 고치를 벗어던질 준비를 한다. 전국 투어 독주회를 통해서다. 5월 16일 울산 공연을 시작으로 제주, 수원, 강릉, 천안, 광주, 대구, 경주, 부산을 거쳐 6월 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 홀까지 10개 도시 투어를 이어간다. 콩쿠르 우승 이후 전 세계를 돌며 100회 넘는 공연을 이어왔지만 본인이 직접 고른 곡으로 여는 리사이틀은 이번이 처음이다.

슈만과 브람스의 특별한 우정 풀어내


선우예권에게도 의미가 깊다. 스타덤에 오르게 한 ‘콩쿠르돌(콩쿠르+아이돌을 합친 말로 콩쿠르에서 우승을 많이 해 얻은 별명)’이라는 타이틀을 넘어서는 자리다. 진정한 음악가로, 어쩌면 거장의 길로 날갯짓을 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공도 많이 들였다. [나의 클라라]라는 테마다. 클라라 슈만 탄생 200주년을 기념했다. 독일 낭만시대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 슈만, 브람스로 구성했다. 공연은 클라라 슈만이 중심이다. ‘노투르노 바장조’로 시작해 로베르트 슈만이 클라라에 대한 내적 갈등을 정열적 선율로 표현한 ‘판타지 다장조’를 들려준다. 2부에선 가슴 끓는 감정을 담은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3번 바단조’를 선보인다. “삼각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던 세 사람은 사랑과 우정, 음악적 동지들로 그 중심에는 언제나 클라라 슈만이 있었어요. 뭐랄까, 천재적인 음악가로 갈망하는 목마름, 뜨거운 감정들이 곡 곳곳에 묻어 있는데 깊이를 해석하긴 쉽지 않았어요.”

선우예권은 이번 기획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그는 “곡마다 이을 때, 연관성이 딱히 없어 보여도 비슷한 맥락의 멜로디 라인이 있는데, 세 음악가의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며 “삶에 지쳐 있거나 사랑을 시작한 사람, 외로움에 힘겨운 사람까지 감정을 위로해줄 수 있는 감정 폭이 넓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더라고요.” 세 음악가로 선곡한 이유를 묻자 선우예권이 답했다. 곡에서 느껴지는 감정 변화와 복잡한 리듬 형태에서 음악가의 숙명이 밀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이들 작품은 연주를 꺼렸을 정도였다. 해석도 쉽지 않았다. “예전에 슈만이나 브람스 연주를 하면, 뭔가 급급하기도 하고 호흡도 들리지도 않고 조급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곡을 해석하면서 조금씩 음악 안에서 여유를 찾은 것 같아요.”

선우예권의 경험상 ‘곡은 평소에도 가깝게 느끼고 있어야’ 연주를 잘할 수 있다. 한동안 작품들을 듣고 해석하고 연습해보고 푹 빠져 지냈다. “어느 시점이 되니 작곡가마다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었는지를 느끼게 되더라고요.” 브람스 소나타 3악장도 그랬다. “브람스가 스무 살 때 지은 곡이에요. 후기 작품들에 비하면 초기작이라 어떻게 보면 가볍고, 틈이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구조적으로 굉장히 탄탄해요. 젊은 시절의 패기, 낭만적인 감성, 열정적인 느낌이 묻어 있어서 애정이 가요.” 왠지 정제된 깊은 음색을 내는 선우예권의 음악 색깔과 닮은 것도 같다.

신경쇠약에 걸렸다가 일찍이 사망한 로베르트 슈만, 그의 아내 클라라, 그녀를 사랑한 요하네스 브람스 이야기는 슬프고 애잔하기만 하다. 걸작 대부분이 클라라 도움으로 완성됐다고 할 정도로 클라라는 브람스의 평생 뮤즈였다. 클라라는 평생 1300여 회 연주회를 하며 독일을 풍미한, 보기 드문 여성 음악가다. 2000년대 초반까지 쓰였던 독일 지폐 100마르크 속 주인공이기도 하다. 슈만과 브람스의 각별한 우정도 드라마틱하다. 브람스는 로베르트가 병원에서 자살을 시도했을 때 슈만 부부의 자녀를 대신 돌보기도 했고, 많은 도움을 주며 관계를 이어갔다. “둘의 우정에서 나오는 배려, 존중이 제겐 감동적이었어요. 생각해보면 인격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런 음악적 동반은 있을 수 없었겠죠.” 선우예권의 해석에서 이들을 향한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작품은 간혹 연주자 성향에 따라, 혹은 본인의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 사연 많은 인생 탓인지, 슈만과 브람스의 곡은 조금은 쓸쓸하게도 들린다.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돈 셜리의 실화를 담은 영화 [그린 북]에선 화려한 무대 뒤 연주자의 외로움이 그려지는데, 클래식 계에선 일약 스타덤에 오른 선우예권에게도 비슷한 공허함이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선우예권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에서 내려와 관계자들과 파티를 한 후에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오면 탁 하고 멈춰버린 듯한 정적을 느낄 때가 있어요. 해외 공연이 많은 연주가들의 숙명인가 싶기도 했고.”

부모 곁을 떠나 생활한 지 거의 15년이 돼 간다. 10년 넘게 미국에서 살다 독일 뮌헨에서 2년, 지난해엔 베를린으로 옮겼다. 나이답지 않은 원숙한 고민은 꽉 짜인 바쁜 스케쥴과 정적 같은 고독 사이에 채워진 탄탄한 이음새가 됐다.

“내게 음악은 격려이자 힘”

선우예권은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편이다. “체력적으로 지칠 때는 있는데 그래도 (연주는) 계속해온 일이어서 그런지 감정적인 고갈은 없는 편이에요.” 비결은 단순하다. “작품에 있는 감정에만 집중하려고 공연 전엔 최대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편이에요. 연주 연습을 하거나 푹 쉬면서 충전하면 확실히 몰입도가 높아져요.” 노하우도 생겼다. “어릴 땐 누군가의 한마디에도 상처받고 조급해지고,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는데, 이젠 자신의 감정을 더 아끼는 연습을 하게 되더라고요.” 오히려 그는 외로운 시간을 양분으로 삼았다. ‘고독’이란 감정을 따라오는 슈만의 곡과 캐릭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세상은 삭막해진다고 하지만 전 느끼지 않으려 해요. 자주는 못 봐도 절 응원해주는 가족도 있고, 음악적으로 슈만과 브람스 관계처럼 의지할 수 있는 동지들이 가까이 있으니까요.”

음악 말고 별다른 취미도 없는 그에게 여전히 피아노 소리는 큰 위로가 된다. 잠시 생각에 잠긴 선우예권은 “최근에 든 생각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크고 작은 걸 떠나서 세상은 거짓투성인 느낌이 있었어요. 물론 그것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음악 자체에는 ‘어떠한 진실’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 매력적이에요. 저에게 음악은 격려고 힘이고요. 더 공부를 해서 깊이 알아가고 싶어요.”

선우예권은 4월 프랑크푸르트 협연을 마치고 5월 공연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다. 전국 각지를 돌다가 서울에서 6월 1일 마지막 공연을 한다. “전국을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까 설레요. 평소 좋아했던 부산, 제주도 바다도 얼른 보고 싶어요. 각 지역 청중에게 공연 클래식 음악이 주는 위로와 기쁨을 선물로 드리겠다는 생각으로 임하려고 합니다.”

불과 2년 전이었다. 2017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한국인 최초 우승’이라는 뉴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통통했던 소년은 어느새 치열한 경연 너머의 음악가로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다.

201905호 (201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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