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 받아 기업 키운 ‘성장형 오너가’ 전면에 등장
제약·엔터 분야에서 전문경영인 두각오너가 CEO는 주로 건설업계에서 등장했다. 순위 내 오너가 CEO 17명 중 12명이 해당한다. 이경애 원건설 대표, 이화영 코리아에셋매니지먼트 대표, 주정희 정동종합토건 대표, 김성희 신안관광개발, 김정희 동창주택 대표 등이다. 건설업계 여성 CEO들은 전계향 대원건설 대표처럼 일찌감치 현장에서 성장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공사 입찰 후 일감을 부친이나 남자 형제가 경영하는 그룹 주력사에 넘기는 이른바 ‘페이퍼컴퍼니’ 역할에 머물고 있다. 직원 서너 명뿐인 시행사가 연 매출 3000억원을 올리는 식이다.여성 CEO 65명의 비즈니스 영역을 분석해보면 제조 분야 비중이 가장 높다. 기계·철강금속 9명, 전기전자와 화학 각 4명 등 모두 25명이다. 남편이나 부친에게서 기업을 물려받아 성장시킨 성공형 오너가 CEO가 다수 포진해 있다. 두 번째 건설 분야가 12명으로, 전원 오너가 CEO다. 엔터테인먼트와 면세점 등 서비스 분야는 12명, 음식료 6명, 의약품과 유통 분야 각각 5명으로 파악됐다.특히 제약과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전문경영인 CEO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유희원 부광약품 대표와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의 배경은 대표는 5년 넘게 대표를 맡고 있으며, 지난해 한독에는 브랜드 전문가 조정열 대표가 합류했다. 업계에서는 “최근 ‘소유-경영’ 분리 원칙 속에 비오너 일가 전문경영인이 많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특히 다국적 제약사에서 두드러진다. “오너경영체제로 남성 CEO를 선호하는 국내 제약사와 달리 국내 지사를 운영하는 다국적 제약사에서는 나이, 성별, 직급에 상관없이 기회와 보상이 이뤄지는 편”이라는 분석이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에는 지난 8월 첫 여성 상근부회장이 취임하기도 했다.남소영 SM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평사원 10여 년 만에 2005년 해외 음반사(SM재팬) 대표에 올랐고, 2017년 SM엔터테인먼트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가수 보아의 일본 매니지먼트를 맡으면서 SM과 인연이 시작됐다. 장인아 스마일게이트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스마일게이트메가포트 대표도 겸임하며 국내외 온라인·모바일 게임 배급을 총괄한다. 최진희 스튜디오드래곤 대표도 눈여겨볼 만하다. 드라마 [미생], [시그널], [도깨비], [호텔 델루나], [아스달 연대기] 등을 제작한 스튜디오드래곤은 연평균 매출성장률이 70%를 넘었다. 황보경 와이지엔터테인먼트 대표와 박정미 케이비에스엔 대표도 콘텐트 개발에 한창이다.반면 지난 1년 동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여성 CEO 수도 만만치 않다. 1986년 입사 후 30년 넘게 가업을 이었던 김은선 보령제약 회장은 전문경영인에게 대표 자리를 넘겼다. 향후 아들 김정균 상무가 경영권을 이어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랜드그룹 핵심 계열사인 이랜드월드(패션), 이랜드파크(호텔·레저), 이랜드리테일(유통) 중 두 곳을 여성 CEO가 맡고 있었으나 올해 모두 퇴임했다. 임희라 코아셋디앤씨 대표도 경영 전면에서 물러났다. 몇몇 여성 CEO는 매출 하락을 겪으면서 평가 대상에서 빠지기도 했다.한편 이번에 선정된 여성 CEO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인물은 36세인 김슬아 컬리 대표다. ‘샛별배송’ 열풍을 일으킨 주역으로, 대형 투자를 유치하며 사업을 키웠지만 수익성을 높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신지은 난다 대표, 김유진 할리스에프앤비 대표도 30대다. 최고령은 욕실·주방용품을 제조하는 대림통상의 고은희 회장으로 85세다. 경영에 참여하다가 남편 작고 후 2016년부터 대표를 맡았다.
‘자본 접근성’이 여성 CEO 최대 장벽그러나 한국에서 여성이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여전히 힘겨운 일이다. 지난여름 미국의 델 테크놀로지스(Dell Technologies)가 발표한 보고서 ‘2019 W.E 시티 인덱스’에 따르면 서울의 ‘여성 기업 활동 지수’는 50개 글로벌 도시 중 41위에 머물렀다. 이 보고서는 도시별로 여성들의 창업 및 기업가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조사한 것으로 자본 접근성, 기술, 인재, 문화, 시장 등 다양한 환경을 분석해서 정량화하고 부문별로 점수와 순위를 매긴다.서울은 특히 ‘자본 접근성’에서 낮은 순위를 나타냈다. ‘자본 접근성’ 항목에는 여성 창업자나 임원이 재직 중인 기업 중 2단계 이상의 펀드 지원을 받는 기업의 비율 등이 포함돼 서울에서 여성 기업가들에 대한 투자 펀딩 프로그램이 더 많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특히 ‘자본 접근성’에서의 남녀 성비는 전체 최하위인 50위로, 금융권 또는 벤처투자업종에 종사하는 여성 리더들의 비율이 타 도시에 비해 매우 낮음을 나타낸다.델 테크놀로지스는 여성의 창업 및 기업 활동을 돕기 위한 방안으로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여성 기업 활동의 가장 큰 장벽은 ‘자본 접근성’으로, 최근 들어 다소 개선되긴 했으나 여전히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둘째, 여성 기업가들을 도울 수 있는 창업 인큐베이터, 멘토 등으로 탄탄한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셋째, 여성 비즈니스 리더 본인뿐 아니라 미래의 여성 기업가들을 위한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을 확장하고 숙련된 직원들을 쉽게 채용할 수 있는 효율성이 요구된다.
※ 어떻게 평가했나우선 2018년 기준 연 매출 1500억원을 넘은 기업 중 여성 CEO를 찾았다. 평가의 기본 틀은 그가 경영하는 기업의 최근 3년(2016~2018년) 매출성장률과 영업이익 성장률이다. 기업 규모에 따라 시장에 주는 영향력이 다르기 때문에 2018년 기준 자산총액 5000억원 이상, 5000억원 미만~2000억원 이상, 2000억원 미만 기업으로 권역을 나누어 평가했다. 여러 기업을 경영하는 경우 이를 모두 합산했다. 비슷한 수준에선 2018년 매출을 감안해 순위를 정했다. 자료는 NICE평가정보에서 제공했다.정성적 평가도 진행했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성공한 자수성가 CEO, 상속을 받았지만 스스로의 노력으로 기업을 더 키운 성장형 오너가, 전문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전문경영인, 오너가를 구분해 4단계로 가산점을 부여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한 이들에 대한 평가다. 해당 기업, 관련 분야에서의 근속연수에도 가산점을 주었다. 외부 전문가와 상담하여 신중하게 산정했다.각 기업의 대표자 DB에는 남녀 구별이 되어 있지 않아 포털사이트와 기업 홈페이지를 참조했다. 그마저도 불확실한 경우엔 직접 전화로 문의해 파악했다. 고용 창출 정도와 사회공헌 기여도 또한 수치화하려 했지만 미미한 자료 탓에 불가능했다.- 조득진 기자 chodj2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