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두(62·중앙대 미술학부 교수)는 한국화가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전통 방식의 수묵화가 아니다. 장지에 분채를 수십 번 덧칠해 잘 익은 고추장처럼 올라온 깊은 바탕색부터 다르다. 본 것을 느낀 대로 그리지도 않는다. 그가 그리는 것은 자신의 깨달음이다. 장지와 붓은 그 깨달음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가 자신을 현대미술가라고 말하는 이유다.
▎자화상 ‘행-아름다운 시절’(2019) 앞에 선 작가 김선두. 그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에서 오원 장승업(최민식)의 대역으로 나왔고,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표지도 그렸다. |
|
서울의 정남진(正南津) 전남 장흥은 바다와 산, 논과 밭이 사이좋게 어우러진 동네다. 이곳 출신인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의 말을 빌리자면, “볼 게 많아 좋은 화가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소년 김선두는 그런 “무릉도원 같은” 고향의 자연 풍광을 친구들과 둠벙에서 고기 잡고 수영하며 눈으로 가슴에 새겨넣었다. 서울 간 아들 내외 대신 손주들(3남 1녀)을 강산이 한 번 바뀔 동안 돌봐주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특히 놀기 좋아하던 셋째 손자를 늘 사랑으로 품어주었다.
그림은 어릴 적부터 좋아했나요.네. 냇가 바위에 암각화를 새길 정도였죠. 방학 때면 친구들 그림 그리기나 붓글씨 숙제는 전부 제 몫이었어요. 개떡 하나 가져오면 그림 하나 그려주던 ‘프로’ 였죠. 하하. 아버님(소천 김천두 화백)이 문인화가셨는데, 화선지 작업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곤 했습니다.
▎‘별을 보여드립니다’ 연작 사이에 선 김선두 작가 / 사진:신인섭 기자 |
|
부모님은 왜 서울로 가셨나요.일본 가서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아버님은 원래 국민학교 교사였는데, 전업 화가를 하겠다고 갑자기 상경하셨어요. 미산 허형과 친했던 증조부의 소개로 미산의 아들 남농 허건과 의제 허백련에게 산수화를, 월전 장우성에게 인물과 화조를 배우셨죠. 금호동 달동네에 집을 얻고 지내시다 10년 만에 자식들을 부르셨습니다. 그게 1973년, 제가 중 3 때였어요.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아버님 영향인가요.사실 아버님이 화가라는 것은 나중에, 국민학교 4학년 때쯤 알게 됐어요. 그보다는 여섯 살 많은 큰형이 그림을 무척 잘 그렸어요. 비료 포대 내지로 교과서를 싸주며 용을 한 마리 그려줬는데, 그게 너무 멋지더라고. 야, 나도 저런 거 그려야겠다 싶었죠.
서울에 오니 어땠습니까.뭐, 시골뜨기 촌놈이었죠. 진도부터 다르더라고요. 맨 뒷자리에 앉아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합고사도 떨어지고 말았어요. 고등학교에 가서는 좋아하는 국어, 역사, 미술만 좀 공부하고 또 놀았어요. 그래서 사관학교에 가고 싶다는 꿈도 포기하게 됐죠.
대학은.떨어졌죠.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마음 독하게 먹고 다시 공부했어요. 그때는 미대에도 본고사가 있어서 국어와 영어 주관식까지 공부해야 했어요. 실기시험도 석 달간 악착같이 준비했죠. 서양 영화배우 사진을 보고 크게 그려보는 게 데생 시험 준비였어요. 그때 전기는 중앙대와 서울대, 후기는 홍익대였는데, 중대 한국학과는 목탄으로 실기를 치른 기억이 납니다.
인생 역전에 성공했군요.이 중 3부터 재수 시절까지 4년 반이 제 삶과 제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시기입니다. 생각만 해도 괴로운 시절이죠. 나에게 화도 많이 나고. 어른들이 좋은 말씀을 해주셔도 삐딱하게만 들리더라고요. 이 밑바닥 시절의 경험 덕분에 세상에 대한 이해, 사람에 대한 이해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한 것은 부모님이 제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믿고 기다려주셨다는 겁니다. 혼낸 적도 한 번 없었고. 그게 정말 감사하죠.
현상에 가려진 본질을 찾아서
▎‘나에게로 U턴하다’(2019), 장지에 분채, 77×189㎝ / 사진:학고재갤러리 |
|
대학생 김선두는 어느 날 뚝섬 유원지 공터에서 서커스 공연을 보았다. TV에 밀려 인기가 떨어지자 뒷전에서 살게 된 사람들이었다. 가족끼리 연습하고 공연하는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한편으로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에서 한 줄기 희망을 읽었다.“제가 헤매던 시절의 모습이었죠. 그때 어떤 큰스님의 말씀이 다가왔어요. ‘앞모습은 꾸밀 수 있으나 뒷모습은 그럴 수 없다.’ 그때 문득 깨달음을 얻었죠. 삶의 본질은 뒷골목에 있구나. 뒷골목에도 열심히 사는 사람이 많구나. 그렇다면 나는 뒷골목 풍경, 뒷골목에서 사는 사람들을 그려보자.”그렇게 종로 2가 뒷골목 포장마차에 앉아 있던 젊은이들을 장지에 그린 그림은 1984년 제7회 중앙미술대상에서 그에게 대상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느낌으로만, 정서로만 그리는 그림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깨달음이 스며 있어야죠. 심지어 정선의 ‘박연폭포’만 보더라도 시원하다는 느낌은 주지만, 어떤 깨달음을 찾을 수는 없죠. 내가 삶에서 얻은 깨달음이 구체적 사물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의 속성과 연결되는 순간,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마른 도미’(2019), 장지에 먹, 분채, 178×158㎝ / 사진:학고재갤러리 |
|
그가 이번에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최한 개인전 ‘김선두’(1월 22일~3월 1일)는 그동안 그가 어떤 ‘깨달음’을 얻어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2019년 신작 19점이 나왔다.고향 선배 이청준의 단편소설 제목에서 시작된 연작 ‘별을 보여드립니다’는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폿죽(팥칼국수)을 배불리 먹고 평상에 드러누워 바라본 어릴 적 어느 여름밤 새까만 하늘 속에 보석처럼 박힌 별들에 대한 질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낮에는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걸까? 분명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 삶에도 그런 것이 많이 있지 않을까? 현상을 넘어 본질을 봐야 하는 것 아닐까? ’‘나에게로 U턴하다’와 ‘느린 풍경’ 시리즈는 무작정 앞만 보고 돌진하던 시절, 운전하다가 얻은 깨달음에서 나왔다. 굽잇길을 만나 속도를 줄여 천천히 가게 됐는데,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이 새삼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자화상을 그린 ‘행(行)-아름다운 시절’도 눈에 띈다. 대학 4학년 때인 1981년 어느 날, 반드시 좋은 화가가 되겠다는 결기 가득한 더벅머리 총각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토대로 그린 작품이다. 얼굴 아래로 월화수목금토일 표기와 무수히 덧쓰여 알아보기 힘들어진 일정표가 보인다. “이 작품은 ‘덧없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가버린(行) 순간들, 다 덧없고 부질없기에 지금의 순간순간이 더 소중하고 의미 있다는.”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갈필로 그린 ‘마른 도미’다. 한 몸을 유지하며 대칭을 이룰 때는 생명을 지닌 물고기였지만, 양극단으로 찢어진 이 생선은 어느새 등을 대고 각자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괴물’이 돼버렸다. 한쪽 눈알은 빨강, 다른 한쪽은 파랑으로 칠한 것은 작가의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극단적인 이념은 무지막지한 폭력을 부른다는 날 선 경고다.
‘한국화’라는 새로운 무기 살려야
▎‘느린 풍경 - 덕도길’(2019), 장지에 분채, 133×160㎝ / 사진:학고재갤러리 |
|
화선지와 장지는 다른 것인가요.네. 화선지가 곱다면 장지는 좀 거칠죠. 값도 장지가 비싸고요. 1980년 일랑 이종상 선생님께 장지법을 처음 배웠는데, 그 뒤로 죽 장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채색도 여러 번 하고, 선도 여러 번 그리는데, 맑고 투명한 깊이감을 낼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죠.
유화 작업도 있네요.색상이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데는 장지 작업보다는 유화나 아크릴이 낫습니다. 부탄가스 통을 크게 그린 ‘No. 1’은 잘난 척하며 살아가는 저에게 보내는 경고장 같은 것인데(그의 이름에도 ‘SUN’이 들어 있다!), 강렬한 터치를 유화로 표현했죠. 재료는 제 깨달음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미디어아트도 해볼 생각인가요.그럼요. 실험적으로 ‘장춘’이라는 9분짜리 영상도 만들어보았어요. 영상 작업은 아직 서툴지만, 제 콘셉트만 명확하면 잘하는 사람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새로운 길을 가고 있는 거네요.중국에서 전시를 했을 때, 관람객들이 저를 보고 ‘젊은 작가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참 감사했어요. 저는 전통 회화 작가가 아닙니다. 전통 회화는 박물관에 있죠.
한국화의 방향성에 대해 말한다면.새로운 한국화라면 우선 전통 재료를 이용해 모던하게 풀어내거나 한국적 미감을 다른 재료로 풀어내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는데, 주제에 맞는 재료를 잘 택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주제·형식·재료·기법이 한 몸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초등학교 미술 시간부터 서양식이죠. 재료도 많고, 쓰기도 편하고. 한국화는 번거롭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화를 하는 사람들은 서양화를 하는 사람보다 무기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살려내야 합니다.
※ 정형모는…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