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박은주의 ‘세계의 컬렉터’] 테리아드(Tériade) 

우정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2000년대 초반 미술시장에서 명성을 떨치던 박물관들이 한결같이 잔뜩 긴장했던 기증 이야기가 있다. 편집자이며 평론가였던 테리아드가 남긴 수집품들을 기증받기 위해서였다. 미망인 알리스 테리아드가 이미 첫 기증을 마티스 박물관에 한 터였고 남은 작품들도 모두 탐낼 만한 훌륭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알리스의 선택만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Tériade à la villa natacha, donation tériade, musée Matisse Le Cateau-Cambrésis photo D.R
파리에서 활동했던 그리스 출신의 미술 평론가이자 편집자, 테리아드(Tériade)는 예술가들에게 ‘그들만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일러스트북(livre illustré) 제작에 새로운 길을 열어준 특별한 인물이다. 1930년대에는 진본에 대한 기존의 사고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고 ‘미세 종이’ 및 ‘헤드 프린트’의 과잉생산 시대였다. 이 시기에 테리아드는 새로운 유형의 잡지 발간에 참여할 정도로 진보적인 기질을 타고났다. 테리아드 자신조차도 “나는 나의 책들이 정원이길 소원했다. 우정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의 경력을 한 문장으로 간추린다면 테리아드는 ‘단순히 모든 것에 우정이 초석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출판사 표지가 있는 각 에디션 작품들은 야심에 차 있으면서도 관대하고 예술가의 창조적 재능에 대한 진정한 자신감이 두드러진다. 그는 예술가들과의 우정과 그들의 실력에 모두 자신이 넘쳤던 편집자였다.

1897년 그리스의 미틸레네, 레스보스섬에서 태어난 에스트라피오스 엘프테리아드(Efstrafios Eleftheriades)의 프랑스 이름은 테리아드다. 그리스 소년 테리아드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지혜를 찾아 여행을 떠났듯, 파리로 향했을 때 나이는 18세였다. 사춘기 시절, 그림으로 시간과 열정을 보냈던 경험을 뒤로한 채 그는 파리에서 법학을 선택했다. 이는 마티스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소르본대학의 법대생이 된 배경과는 사뭇 다르다. 테리아드의 그림에 대한 호기심은 결국 파리의 몽파르나스 거리에서 수많은 작가와의 만남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작가들과 만나면서 테리아드의 그림에 대한 관심은 더욱 심층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고 작가들과 자주 토론하며 쌓은 예술과 철학에 대한 광범한 지식들은 그를 평론가의 길로 인도했다. 당시는 모던아트 초기였고 테리아드는 어느새 모던아트를 이끌어가는 전위 예술가들의 서클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혀갔다.


▎Vue de la cour d’entrée du musée Matisse, Le Cateau-Cambrésis Alberto Giacometti, Grande femme 3, sculpture, 1960 Coll musée Matisse, Donation Tériade ©Photo département du Nord C. Arnould
파리에서 크리스티앙 제르보스(Christian Zervos)와 공동으로 잡지 카이에다르(Cahiers d’art: 예술 노트)를 발간했을 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1931년까지 그가 이 잡지에 작성한 예술 평론은 마흔 개가 넘는다. 같은 기간 동안 테리아드는 종종 일간신문 랭트랑시장(L’Intransigeant: 타협하지 않는)에 글을 기고했다. 1933년 그는 알베르 스키라(Albert Skira)가 설립한 잡지 미노토르(Minotaure: 미노타우로스) 출간호의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면서 더욱 자신의 재능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1936년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과 불협화음이 심화되자 미노토르를 떠났다. 그 후 모리스 레이날(Maurice Raynal)과 공동으로 월간지 라 베트 노아(La Bête noire: 검은 야수)를 출간했다.

1937년 그동안의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드디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잡지 버브(Verve: 활기, 기백)를 창간했다. 동시대의 화가, 문인, 사진작가, 조각가들과 협업하여 완성한 버브 잡지는 편집장의 사명을 전달하듯이 색채의 정원이자 언어의 울림이었다. 완성작들은 아티스트들의 작품들과 더불어 일러스트레이션, 타이포그래피, 서예, 그 밖의 장식으로 더욱 빛을 발했다. 각 창간호는 예술품과도 같았고 테리아드에게는 완벽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훌륭한 예술가들을 찾아낼 수 있는 천부적인 안목이 있었다. 테리아드는 피에르 보나르, 앙리 마티스,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페르낭 레제, 호안 미로, 알베르토 자코메티, 르 코르뷔지에, 조르주 루오, 폴 엘뤼아르, 브라사이 등 작가들과 함께 버브 잡지를 함께 제작하며 우정을 쌓아갔다. 석 달에 한 번 출간되는 총 26개 출판물은 1960년까지 지속적으로 출판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은 과슈 데쿠페(과슈로 채색된 종이를 직접 가위로 오려 붙이는 기법과 그 작품들)와 중국 서체를 대변하는 마티스의 [재즈(Jazz)]와 피카소가 빨간색 그래픽으로 색칠했던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의 [죽은자들의 노래(Le Chant des morts)]다. 테리아드는 잡지 출판과 더불어 1943년부터 1974년까지 서적 27권의 디자인과 제작을 맡았던 굳은 신념의 편집장이었다.


▎Vue de la cour d’entrée du musée Matisse, Le Cateau-Cambrésis Henri Laurens, La lune, 1946, sculpture bronze, Coll musée Matisse, Donation Tériade © Photo département du Nord C. Arnould


예술가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


1973년 테리아드에게 바치는 [Hommage à Tériade] 전시가 파리에서 시작되어 9년 동안 런던, 부다페스트에 이어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전역을 순회했다. 그리고 1979년 테리아드는 고향인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바리아 거리에 2층으로 된 테리아드박물관(www.museumteriade.gr)을 개관했다. 박물관이자 도서관인 이곳에서 테리아드와 작가들 간의 깊은 우정은 작품들 속에서 잔잔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예술문화계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파리의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 데 아르(Chevalier des arts)를 받은 테리아드는 그리스 예술문화계 역사를 빛낸 인물이다.

그가 남긴 개인의 역사는 여러 면에서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우선 그가 무한히 빠져들었던 출판 시장에서 그가 찾았던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다. 이 우정은 아름다운 색과 형태에 꼭 맞는 문학적인 언어로 표현됐다. 그리고 그는 예술이 그의 삶에 파고들기 전부터 이미 그리스와 유럽 철학에 심취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던 지성인이었다. 피카소와 미로, 코코 샤넬, 카르티에 브레송 등과 거침없는 토론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인류의 진보에 큰 공헌을 했던 수많은 철학자를 배양한 그리스의 피가 흘렀기 때문이다. 또 그는 동시대의 가장 철학적인 전위예술가들과 진지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 특별한 우정을 깨달았던 또 다른 재능이 있었다.

1983년 테리아드는 제2의 고향이었던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미 그곳에 묻힌 시몬 드 보브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 세르주 갱스부르, 만 레이 등이 그를 반겼으리라. 그의 부인, 알리스 테리아드는 남편의 광범위한 수집품들을 전 세계 박물관에 대여해주었다. 1995년 프랑스 북부에 있는 마티스의 고향, 카토 캄브레지에서 기획한 [마티스와 카르티에 브레송] 전시, 1996년 [마티스와 테리아드] 전시도 그녀의 대여 작품들 덕분에 훌륭한 전시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알리스는 전시를 감상하기 위해 박물관을 방문했고 당시 마티스의 기증으로 설립된 마티스 박물관의 역사에 깊이 매료됐다. 결국 2000년에 작품 기증서에 사인하기에 이르렀으며 2002년 남편이 작가들과 제작한 후 별도로 수집한 에디션 작품들 중 작가 27명의 작품 한 점씩을 선별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카토 캄브레지의 마티스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기증 이후 전 세계 박물관들이 아직 남아 있는 테리아드의 수집품에 눈독을 들였다. 왜냐하면 테리아드와 깊은 우정을 간직했던 수많은 작가는 테리아드가 제작하는 모든 판화 및 일러스트북에 참여할 때 완벽을 기했기에 탁월한 예술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알리스 테리아드는 오랜 시간 숙고했다. 파리의 퐁피두센터, 뉴욕 모마, 런던의 테이트 모던 등이 기증을 원했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다시 자신의 죽음 이후 모든 수집품과 집에서 소장하고 있던 모든 조각, 회화 작품마저도 마티스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2007년 알리스의 죽음 이후 그녀의 유증 작품들은 첫 기증 작품들과 함께 하기 위해 다시 마티스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Vue d’ensemble de la salle Tériade, Coll Musée Matisse, Le Cateau-Cambrésis, Donation Tériade © Photo département du Nord C. Arnould
역사와 수집품 면에서 내로라하는 박물관에 기증을 마다하고 알리스 테리아드가 39점에 이르는 작품들의 두 번째 유증을 약속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게다가 그녀의 결단은 프랑스 박물관 역사상 지난 2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유증이었다. 그것은 남편이 사랑했던 작가들과의 우정이 선택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티스 박물관은 이 부부의 애정 어린 기증에 영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마티스 박물관의 두 전시 공간을 과감히 테리아드의 수집품에 할애했다. 마티스 박물관에 들어서면 자코메티의 서 있는 여인조각상 [Grande Femme III], 앙리 로랑스의 조각 [달(La Lune)]과 같이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이 박물관 입구의 광장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테리아드의 기증 이야기를 모르는 관람객이라면 ‘마티스 박물관 광장에 왜 자코메티와 로랑스의 조각이 있을까?’ 의문이 들겠지만 마티스 박물관이 이처럼 테리아드의 기증에 의미를 두고 있다는 반증이다.

마티스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테리아드 수집품 전시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이 있다. 이곳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밖에서 창문을 통해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테리아드 부부의 나타샤 빌라(Villa Natacha)의 식당이다. 테리아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에 빌라 나타샤를 매우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다. 파리에서 거주했던 그에게 파리에서 690km 떨어진 생장카 프페라(Saint-Jean-Cap-Ferrat)에서 구입한 이 빌라는 르 코르뷔지에가 니스에서 가까운 로크뷔륀 캅 마르탕(Roquebrune-Cap-Martin)에 자주 묶었던 카바농과 같이 테리아드에게는 소중한 은둔처가 되었다. 테리아드의 별장은 작가들과 문인들이 칭송했던 그들의 은둔처이기도 했다. 미래(197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리스 시인, 오디세우스 엘리티스(Odysseus Elytis)는 모딜리아니의 조각상이 있었던 이 빌라와 정원에 감탄해 [Villa Natacha]라는 시를 완성할 정도였다.


▎Marc Chagall, Les amoureux au bouquet, gouache sur papier,1949, Coll Musée Matisse, Le Cateau- Cambrésis, Donation Tériade © Photo département du Nord C. Arnould
테리아드는 1949년 알리스와 만났다. 테리아드는 첫눈에 알리스에게 반했다. 알리스도 교양 있고 명석하면서도 단순명료한 그의 성품에 매료됐다. 테리아드는 옆에 이상적인 동반자가 있다는 확신만으로도 자신의 의지를 계속 펼칠 수 있었다. 마티스 박물관에 설치된 나타샤 빌라의 식당은 테리아드 부부의 식당을 재현한 것이 아니다. 나타샤 빌라의 식당에 있었던 마티스가 그린 플라타너스 그림이 새겨진 벽의 세라믹 타일(1952), 스테인드글라스 [중국 물고기(Les Poissons chinois, 1951)], 자코메티의 테이블에 놓인 석고 장식컵 2개와 천장에 걸린 램프 3개, 벽 구석자리에 놓인 가구 위에 설치된 앙리 로랑스의 조각 [날개 달린 인어(Sirène ailée)]를 그대로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 프랑스의 저명한 조각 복원가 산드린&베누아 코니야(Sandrine & Benoit Coignard) 부부의 세심한 실력이 필요했다. 테리아드 부부가 수없이 이 빌라를 방문했던 절친한 예술가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알려진 진정한 보물들은 마티스 박물관에서 그 가치를 드러내며 관람자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있다.

더는 잃을 수조차 없을 것이라고 느껴지는 순간


▎Alberto, Giacometti, Portrait de Tériade, 1960, Coll Musée Matisse, Le Cateau- Cambrésis, Donation Tériade © Photo département du Nord C. Arnould
나타샤 빌라의 식당 외부에는 나타샤 빌라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빌라 정원에 있었던 나무와 작은 분수의 조각이 함께하고 있다. 이 빌라의 식당 주변에는 페르낭 레제, 피카소, 루오, 자코메티, 샤갈의 그림과 미로의 조각으로 테리아드의 일생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 샤갈이 제작한 [고골의 죽은 영혼(Les Âmes mortes de Gogol)](1948년), [라퐁텐의 우화(Les Fables de La Fontaine)](1952년), [성경(La Bible)](1956년), [다프니스와 클로에(Daphnis et Chloé)](1961년)와 마티스의 [재즈], 미로의 [우부왕(Ubu roi)], 피카소의 [죽은 자들의 노래] 등을 감상하면서 굳은 믿음이 바탕이 된 테리아드와 작가들과의 관계를 상상하게 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 솔론은 “모든 일은 결말을 고려해야 하며 어떻게 끝날지 숙고해야 한다”라고 했다. 테리아드가 역사에 남는 잡지 버브를 출간했을 때는 고뇌의 시대, 1937년 겨울이었다. 그해 독일 공군 폭격기들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공격해 노인, 부녀자, 어린이를 포함해 1654명이 사망했고 889명이 부상했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일본이 난징에서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했듯이 준비되지 않은 전쟁 2차 세계대전이 암시되던 시기였다. 우리에게 이어지는 절망과 침체의 시기, 그 무엇도 더는 잃을 수조차 없을 것이라고 느껴지는 순간, 비로소 모든 이에게 다시 새로운 열정을 움켜쥘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테리아드의 시대와 시기를 막론한 변치 않는 예술을 향한 진보는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칫 좌절할 수도 있는 순간에도 철학적인 숙고를 통해 결국은 훌륭한 결말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 박은주는… 박은주는 1997년부터 파리에서 거주, 활동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사 국립 에콜(GRETA)에서 예술사를, IESA(LA GRANDE ECOLE DES METIERS DE LA CULTURE ET DU MARCHE DE L’ART)에서 미술시장과 컨템퍼러리아트를 전공했다. 파리 드루오 경매장(Drouot)과 여러 갤러리에서 현장 경험을 쌓으며 유럽의 저명한 컨설턴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2008년부터 서울과 파리에서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는 한편 유럽 예술가들의 에이전트도 겸하고 있다. 2010년부터 아트 프라이스 등 예술 잡지의 저널리스트로서 예술가와 전시 평론을 이어오고 있다. 박은주는 한국과 유럽 컬렉터들의 기호를 살펴 작품을 선별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202006호 (2020.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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