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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음악과 삶’] 르네상스, 오페라, 흑사병 

 

흑사병은 유럽에 가공할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음악가들 중에서도 흑사병으로 사망한 이들이 있었다. 흑사병이 도래했던 때에는 르네상스라는 시대 흐름이 있었다. 오페라는 르네상스적인 정신의 음악적 구현물일 수 있다.

▎흑사병 치료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의사 겸 성직자들이 썼다고 알려진 마스크. 당시 의료용 마스크로 알려졌던 이 마스크는 사실 14세기가 아닌 17세기에 사람들이 썼던 것이다. [Doctor Schnabel Von Rome]이라는 제목의 1656년 판화에 그려진 흑사병 마스크와 그것을 쓰고 있었던 당시 의사 슈나벨의 다소 우스꽝스러우며 기괴한 모습. / 사진:WIKIPEDIA
르네상스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발생한 유럽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가리킨다. 이것은 대강 ‘르(흐)네쌍스’라고 발음하는 ‘renaissance’라는 프랑스어 단어에서 유래했다. 원래 일반명사인 이 단어에는 재생, 소생, 부흥이라는 뜻이 있다. 고유명사 르네상스(Renaissance)를 이해할 때도 무언가의 재생 혹은 부흥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인간 중심적·현세적 문화를 부흥시킨다는 의미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이 부흥했다는 것은 이것이 한때 사람들에게 잊힌 시기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중세시대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강력했던 대략 천 년 세월 동안 고대 그리스와 그 후속 시대인 로마의 현세적 문명은 유럽인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천년 동안 잊혔던 현세적 문명의 존재를 먼저 재발견했던 일부 학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이를 소개하면서 르네상스 시대가 온 것이다. 이 학자들을 인문주의자(humanist)라고 부른다.

유럽의 중세와 근대를 이어주는 르네상스 시대는 흑사병의 시대이기도 했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은 큰 타격을 입었다. 총 인구의 30~60%가량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1억~ 2억 명에 이르는 인구의 사망이 르네상스라는 혁신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는데,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일단 르네상스가 제대로 된 혁신이었는지 의문이고, 혁신이라 하더라도 그 혁신의 동력이 흑사병이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혁신의 한 배경이었을 수는 있다. 이를테면 흑사병을 치료하고자 했던 이들이 당시에는 의사이자 성직자들이었는데, 이들은 흑사병 치료를 위한 제대로 된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열성적으로 환자들을 치료하려 했다가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많이 죽음에 이르렀다. 사망한 이들의 자리에 도덕적·지적 능력이 없는 이들이 새로이 성직자로 충원되면서 가톨릭은 사람들의 신망을 잃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세속적 르네상스에 대한 거부감 없는 수용이 수월해진 것이다. 오늘날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를 인구의 구조조정으로 보는 이들은 흑사병으로 인한 혁신으로서의 르네상스 이론에 집착한 것이다. 이런 이론에 집착하는 이들은 지금도 혁신하려면 구조조정이 있어야 하며, 구조조정은 종종 가차 없는 인구 감소마저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에 열광한다. 댄 브라운의 소설 『인페르노』의 등장인물 조브리스트가 이런 논리를 펼친다. 유전학자인 조브리스트는 인류의 절반에게 모종의 해악을 끼칠 바이러스를 만들어내 유포한다. 생물학적 테러를 감행하여 인류에게 제2의 르네상스를 가져다주겠다는 심산이었다.

흑사병이 창궐한 시기에 사망한 작곡가들이 있다. 네덜란드인 야코프 오브레히트(Jacob Obrecht, 1457~1505)는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고,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가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인 것은 맞지만 흑사병으로 사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흑사병은 이 작곡가가 사망한 1505년 7월로부터 한 달 뒤인 8월에 발병했기 때문이다. 혹시 기록으로서의 8월 이전에 잠복기가 있었던 것일까.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현해 북유럽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던 르네상스적인 경향은 음악에서는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에서 주로 꽃을 피웠다. 물론 이탈리아에서도 꽃을 피웠다. 오브레히트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했었다.

음악에서의 르네상스는 사실 미심쩍다.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부흥이라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문학이나 철학 분야에서는 남아 있는 문헌이 있으니 도서관에서 찾아내 그 내용을 소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음악은 찾아낼 것이 없었다. 인류가 음악을 시작했던 시기를 선사시대인 3만5000년 전으로 소개했었는데(2018년 2월호와 3월호 참조) 선사시대의 악기 유물은 발견되었으나 그 악기로 연주했던 음악의 실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악보가 없고 녹음도 없으니 말이다.

곡 전체가 온전히 남아 있는 최초의 악보는 비석 위에 새겨놓은 것인데, 놀랍게도 기원전 200년에서 서기 100년경의 고대 그리스 시대에 작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이킬로스 비문’으로 알려진 악보는 1883년 터키 에페소스 근교 아이딘 지방에서 철도공사 도중 발굴된 원통형 비석에 음각된 문장이다. 작곡가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비석에 이름이 언급된 세이킬로스라는 이가 작곡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세이킬로스가 사망한 아내를 추모하며 지은 노래라는 설과, 그리스신화의 등장인물인 무사 에우테르페를 찬양하는 노래라는 설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라, 결코 그대 슬퍼하지 말라. 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마지막을 청할 테니.”

문자로 된 이 악보의 음악적 내용을 복원하여 오늘날 들을 수 있게 되었으나, 이 노래 하나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음악 활동 전반을 충분히 알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비석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기가 아니라 19세기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음악적 문화를 부흥·재생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리스신화 인물을 무대로


▎오페라의 아버지 몬테베르디의 초상화.
카메라타라는 모임이 있었다. ‘Camerata’는 이탈리아어로 동지, 친구라는 뜻이다. 르네상스의 주 무대였던 피렌체시에서 음악가빈첸초 갈릴레이, 시인 리누치니, 작곡가 페리, 카발리에리, 카치니 등이 모임을 가졌다. 빈첸초 갈릴레이는 유명한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다. 이 모임이 카메라타이고, 여기서 고대 그리스 시대 연극이 상연됐다. 그들은 이 연극에 음악이 수반되었고, 그 비중도 꽤 컸다는 사실을 공유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은 종합예술이었다. 이상적인 이것을 당대에 복원하자는 데 뜻을 같이했고, 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오페라다. 최초의 오페라는 카메라타 회원이었던 자코포 페리(Jacopo Peri, 1561~1633)의 [다프네(Dafne)]였다고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1597년경에 공연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악보가 없다. 1600년에 공연된 페리의 [에우리디케(Euridice)]가 악보가 남아 있는 첫 번째 오페라다. 그러나 페리는 유명하지 않았고, 당대에나 지금에나 오페라의 아버지로 알려진 작곡가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다. 1607년에 초연된 [오르페오(L‘Orfeo)]가 이 작곡가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다프네, 에우리디케, 오르페오는 모두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그리스신화의 등장인물을, 노래와 음악이 동반된 연극으로 무대에 올린 것이 오페라다. 그리고 이것이 음악에서의 르네상스적인 결과물인 셈이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다. 전문 음악사학자들은 오페라를 르네상스 시대의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1597년, 1600년, 1607년은 르네상스 시대가 끝나가거나 끝난 후다. 르네상스 음악은 따로 있었고, 오페라는 르네상스적인 정신의 구현물이긴 하나, 르네상스가 끝물일 때, 혹은 르네상스가 끝나고 도래한 바로크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음악 장르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의 연극은 비극이었고 시민들이 그 감상자였다면, 오페라는 대부분 희극이었다. 수용자가 당대 귀족들이었고, 그들의 결혼식이나 축제 때 주로 연주되기 위해 작곡된 오페라는 비극일 수 없었다. 귀족이 즐기는 희극인 오페라를 르네상스적인 정신의 온전하며 이상적인 복원으로 보기는 어렵다. 음악가들은 시대 흐름을 따라가는 데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여러 오페라를 작곡해서 유명했던 몬테베르디는 1643년에 베니스에서 사망했는데, 1630년 이래 그의 노년기는 그 무렵 이탈리아 북부에 퍼진 페스트와, 역병이 창궐할 때 마침 침공해 들어온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대에 의한 약탈 및 파괴, 경제 질서의 붕괴에 따른 후원세력의 소멸 등으로 고통스러웠다. 작곡가였던 그의 동생이 페스트에 걸려 죽었고, 그도 페스트에 감염되었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004호 (202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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