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서양의 시각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반대로 동양의 시각으로 서양을 바라보는 시선을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라고 한다. 둘 다 편견 혹은 왜곡이라는 뉘앙스가 스며 있다. 부산 사나이 배찬효(45)가 사진을 공부하기 위해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 맞닥뜨린 ‘서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을 프린트해 만든 이집트 ‘사자의 서’(2019). 거울 위에 구현한 작가의 자화상에 배찬효 작가의 모습을 오버랩했다. 관람객은 자신의 얼굴을 비쳐보며 죽음과 종교와 권력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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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경성대에서 보도사진을 공부했어요. 경기신문에 들어가 사진부 기자를 하면서 경희대 대학원에서 보도사진학을 공부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6개월 만에 둘 다 포기했죠. 캐나다 구경을 잠시 하다가 포토저널리즘을 제대로 공부하려고 영국에 도착한 것이 2004년 3월이었어요.”포토저널리즘 석사과정 입학허가서를 들고 온 그를 운명의 여신은 살짝 옆길로 인도했다. 런던대 UCL 산하 슬래이드(Slade) 예술학교였다.“순수예술 백그라운드가 없었기에 다큐멘터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수업시간에 누군가 ‘빨대로 조형물을 만들겠다’고 하니까 3시간 동안 다들 너무 열심히 토론을 하더라고요. 그때 좀 충격을 받았어요. ‘저게 뭐라고 저렇게 진지할까. 예술이란 도대체 뭘까.’ 궁금해졌죠.”방향은 바꿨는데, 뭘 할지 막막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배운 현대사진의 역사는 1960년대까지가 다였다. 아내와 마드리드 아트페어까지 가서 기웃거리다가 『현대사진(Contemporary Photography)』이라는 책을 구해 보면서 현대사진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 비로소 문리가 트이기 시작했다. ‘나만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카메라를 메고 런던 밤거리를 무작정 헤매던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뭐하니?”라고 씩 웃었다. 늘 격려해주던 지도교수였다.“그날 밤 길거리 과일 판매대 앞에서 제 누드사진을 찍었어요. 감정이 복잡했거든요. 아무거라도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지나가던 사람에게 셔터를 눌러달라고 했어요. 그게 ‘자화상’ 콘셉트 연작의 시작입니다. 그 뒤 문득 깨달았어요. ‘아, 나는 내 얘기를 하고 싶구나’라는 것을.”
소외에서 계급, 권력의 문제로 확장
▎1. 3층 전시장 전경 / 2. 돌 표면 위에 프린트한 ‘오시리스’(2019) / 3. ‘마녀사냥’(2016) / 사진:한미사진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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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배찬효가 형상화하고 싶었던 것은 서양 사회에서 느꼈던 나, 즉 동양 남자에 대한 ‘소외’와 ‘편견’이었다. 그는 서양 문화에서 편견적 관념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초상화라고 생각했다. 강자로서의 우월함이 극대화된 표정과 자세.이것을 역발상으로 응용해 스스로 영국 귀부인이 되어 한껏 차려입은 모습을 찍은 것이 첫 시리즈 ‘의상 속 존재(Existing in Costume)’(2007)다. 회칠을 잔뜩 한 얼굴에 굵은 힘줄이 보이는 투박한 팔뚝. 작가 노트에는 이렇게 적었다. “… 나는 그 영국인이 되려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옷을 입고, 엄마의 화장을 하고, 엄마가 되기 위한 그 시도를 나는 하려고 한다. …”이는 두 번째 시리즈 ‘동화책(Fairy Tales)’ (2010)으로 이어졌다. 동화의 한 장면을 연출해 자신이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웨일즈의 고성과 성당을 돌아다니며 장소를 꼼꼼히 헌팅했고, 국립극단 의상대여소 등을 찾아가 고증된 의상과 소품을 빌려 완벽한 재현에 나섰다. 특히 사회적 계급이 존재하고, 약자가 강자에게 순종해야 행복한 결과를 얻는다는 내용이 담긴 동화를 골랐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라푼젤』 등에서 그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해 약소국 백성들에게 복종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는 시도를 읽어냈다.세 번째 시리즈는 ‘형벌(Punishment)’(2012)이다. 작가는 “권력적 욕망이 문화의 차이에 대한 강한 편견으로 표출될 수 있으며 이는 형벌로 구체화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영국 역사 속 유명한 권력자의 모습으로 분해 이들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어떤 형벌을 실행했고, 이런 상황에서 감정 대립은 어떠했을지 회화적으로 묘사했다.권력의 속성에 주목한 이 시리즈는 다시 ‘마녀사냥(Witch Hunting)’(2015)으로 이어지는데, 작가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과 집단적 폭력이 정당화되는 원인과 과정의 중심에 인간의 이성적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녀사냥은 정의와 진리의 절대적 믿음을 이용한 권력집단이 소수집단을 탄압한 결과였다. 이 같은 마녀사냥은 현대사회에서도 ‘타자화(他者化)’라는 개념으로 반복되고 있다.”
주류와 비주류의 문제…“편견은 폭력이다”
▎‘백설공주’(2010) / 사진:배찬효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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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사진미술관 삼청분관에서 5월 13일까지 열리는 전시 ‘서양의 눈(Occident’s Eye)’에서 작가는 한층 더 넓고 깊어진 작품 세계를 한눈에 보여준다. 마녀사냥을 넘어, 종교와 미신은 어떻게 구분되는지로 의식을 확장한 것이다. “신화는 화석화된 믿음이기에 종교와 신화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집트 신화를 믿는 사람이 현존한다면, 이것은 더는 신화가 아니라 미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주류 문화 속 구성원의 믿음은 종교로 받아들여지고, 소수자 혹은 타자의 믿음은 주류의 합리주의에 의거해 미신이 된다. 즉, 우리 편과 다른 편을 나누는 속성을 지닌 인간 권력으로서의 종교가 자기와 다른 타자(미신)를 공격하는 모습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질문이다.중국발 역병도 봄은 막지 못했다. 삼청동 끝에 새로 단장한 전시장 밖으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진한 얼굴 화장과 귀부인 차림의 사진으로만 익숙한 작가의 맨얼굴이 왠지 낯설었다.
처음 자화상 사진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요.
▎‘의상 속 존재’(2007) / 사진:배찬효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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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고들 했어요. 지도교수님은 ‘사진 자체로서 회화적 느낌을 내보라’고 조언해주셨죠. 그래서 처음엔 폴라로이드도 사용했어요. 그렇게 영국 의상을 공부하고, 영국 역사를 공부하면서 제 작품 세계도 점점 넓어졌습니다.
사진의 분위기가 아주 묘합니다.사진에는 시간성과 사실성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요인을 최대한 줄이는 방식으로 제 목소리를 강조하고 있어요.
작가가 직접 모델로 등장한다는 면에서 신디 셔먼의 작품과 같은 맥락이라는 지적도 있을 텐데요.사실 처음엔 고민스런 부분이었어요. 신디 셔먼은 물론 할리우드 여배우나 명화 속 인물로 분장하는 일본의 모리무라 야스마사, 인종차별적 요소를 작품에 녹인 잉카쇼니바레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비행기가 이륙할 때 각도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전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처럼, 제 작품도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녀사냥’ 시리즈 다음에 나온 ‘서양화에 뛰어들기(Jumping into the Oil Painting)’(2017)는 지금까지와는 약간 다른 맥락인 듯합니다.편견에 대한 연작을 만들었지만 제대로 된 답이 아닌 것 같아 지쳐가던 시점이었어요. 저의 답이 일시적인 것일 수도, 현상적인 것일수도, 변할 수도 있다라는 생각에 답답했죠. 무거운 마음으로 템스강 변을 걷고 있는데, 문득 강 표면 위로 펼쳐진 서양화에 제가 뛰어드는 상상을 하게 됐어요. 어찌나 짜릿하던지. 아마도 나의 위선에 대한 반성이 무의식적으로 진행된 게 아닌가 싶은데,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한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동물 가죽 위에 프린트하는 색다른 방법을 시도해보았습니다. ‘인간의 도덕은 동물의 죽음에는 왜 관대한가’라는 질문을 담았죠. 인간중심적 사고의 폭력성과 절대성에 대한 불편한 고발이랄까.
이번 전시에서도 가죽 은 물론 나무와 바위와 철가루도 활용했습니다.사진은 처음엔 은판에 만들어졌다가 종이로 출력됐죠. 그럼 나무에 프린트한 작품은 사진일까요 아닐까요.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어요. 또 인간과 함께 존재하는 ‘자연’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사람은 왜 태어났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같은 질문을 고대 샤머니즘적 접근 방식으로 풀어보는 식이죠.
대영박물관 소장품인 이집트 ‘사자의 서’를 활용한 작품이 눈에 띕니다.망자를 심판하는 오시리스의 절대 권력을 해체해보고 싶었어요. 오시리스 자리에 거울을 부착하고 제 얼굴을 새겨 넣은 것은 절대성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은유입니다.
소외와 편견에 대한 꾸준한 작업을 통해 전달하고픈 메시지는 무엇인가요.누군가를 편견을 갖고 대하는 것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 폭력으로 인해 아프면 안 됩니다.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