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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동포의 얼이 서린 코마 컨트리클럽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납치된 심당길의 12대 후손인 심수관이 도예로 고향과 연결되어 있다면, 간사이 지역의 재일 동포들은 신한은행과 코마 골프장을 통해 고향과 연결됐다.

일본 오사카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나라현의 코마 컨트리클럽은 2002년 일본 PGA 챔피언십이 열린 명문 코스다. 이 골프장 입구에는 다보탑이 서 있다. 골프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은 곰탕이다. 약간 달긴 했지만, 진하고 담백한 사골 국물 맛이 딱 한국의 곰탕이다.

이 골프장에서 올해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투어 신한동해오픈이 열린다. 1981년 만들어져 36회를 맞는 신한동해오픈이 해외에서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대회는 재일 동포들이 만든 신한은행의 뿌리 찾기 여행 성격이다.

코마 골프장은 1980년에 개장했다. 당시 최고 스타였던 개리 플레이어가 설계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회를 치를 수 있는 골프장이니, 스케일이 컸다. 미래를 내다보고 만든 코스였으며 분양 회원권 가격이 500만 엔으로 당시에도 매우 비쌌다.

아직도 명문 코스다. 골프다이제스트 재팬은 코마 컨트리클럽을 일본 내 100대 코스로 2017년부터 3년 연속 선정했다.

이 골프장은 재일 동포들의 정신이 담긴 곳이다. 일본 법인에서 18년간 근무한 진옥동 신한은행장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재일동포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 당시 일본에서도 비즈니스를 하려면 골프를 해야 했는데 한국인은 제약이 컸다. 그래서 동포들이 1970년대 들어 독자적인 골프 코스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희건 전 신한은행 명예회장이 주도했다. 그의 아들인 이경재(70) 이희건 한일교류재단 이사를 오사카에서 만났다. 이 이사는 “아버지는 워낙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일본 골프장의 회원이 됐지만 다른 한국인들은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도 당당하게 골프를 하자고 마음먹고 명문 클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오히려 더 나은 골프장을 만들려 했다. 반드시 한국 색깔을 넣어야 했다. 음식, 조형물 등이 한국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리사를 한국으로 데려가서 한국 음식을 배우게 한 뒤 일을 시켰다”고 말했다.

장소도 고려했다. 현재 이 골프장을 운영하는 히라카와 코포레이션(平川商社)의 오너인 재일 동포 히리카와 하루키는 “코마 골프장은 나라, 미에, 교토 등 3개 현에 걸쳐 있는데 근처에 고려인 정착촌이 있어 한국의 문화가 남아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2013년 발간된 『아름다운 일본의 골프코스』는 “코마를 한자로 쓰면 고려를 뜻하는 의미로 1000여 년 전 고구려 패망 후 도래인들이 정착한 지역을 뜻한다”고 소개했다. 『일본서기』는 7세기 중반 표류한 고구려인들이 일본의 교토 남부에 정착해 ‘카미코마무라(上高(句)麗村)’와 ‘시모코마무라(下高(句)麗村)’라는 마을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희건 회장의 스윙 모습.
이경재 이사는 “아버지는 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호마의북풍 월조소남지: 북쪽에서 온 말은 북풍이 불면 귀를 북쪽으로 세우고, 남쪽에서 온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는 뜻으로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의미한다)라는 문구를 좋아하셨다. 코마라는 이름으로 골프장을 만든 건 고려라는 뜻도 있지만, 호마(胡馬)가 코마라는 발음으로 읽혀서이기도 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골프장에는 미루나무를 심었다. 미루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고향을 느끼게 한다고 해서다. 고 이희건 회장은 눈에 보이는 다보탑, 혀로 느끼는 곰탕 이외에도 귀로 고향을 듣고 싶었다.

재일 동포라도 오사카와 도쿄 사람들은 달랐다. 오사카에는 돈을 벌기 위해 온 노동자, 특히 밀항한 사람이 많았다. 오사카 동포들은 가난하고 학력이 낮았다. 반면 도쿄 동포는 유학 온 부자들이 주류였다.

이희건은 1930년대에 제 발로 오사카에 갔다. 이경재 이사는 “아버지는 가난한 집 차남이었는데 도시락을 싸 갈 수가 없어 점심에 물만 먹었다고 들었다. 먹을 것이 없어 바다를 건넜다. 일본에서 고된 일을 하기는 했지만, 밥은 먹고살 수 있었다. 그걸 아주 감사하게 여기셨다”고 전했다.

재일 동포 중에는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왔다가 먹고살 방법이 없어 다시 배를 탄 사람이 많다. 한국인들은 일본에서 내장 등을 파는 고기집 야키니쿠나 자전거포, 빠친코를 운영했다. 이희건은 전후 동포들을 규합해 오사카에 국제 시장을 만들었고 동포들의 금융기관인 오사카흥운을 설립했다.

동포 3·4세들이 뿌리를 확인하는 골프장


▎코마 골프장에 설치된 각종 대회 기념판. 2002년 일본 PGA 챔피언십은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기념으로 코마 골프장에서 열렸다.
이희건은 골프를 즐겼다. 이경재 이사는 “어릴 때 아버지는 공터에서 피치샷 연습을 하셨다. 100야드 이하 거리에서 아버지가 치고 형과 내가 야구 글러브를 들고 뛰어다니면서 공을 잡았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이젠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셨는데, 공원 관리인에게 경고를 들은 것 같다”며 웃었다.

이희건은 유달리 매너를 강조했다고 한다. 일본에선 한국인의 매너가 좋지 않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런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에티켓을 잘 지키려 했다. ‘코리안타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도 싫어했다. 이 이사는 “아버지는 코마 골프장을 일본 어느 골프장보다 에티켓이 뛰어난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어 했다. 항상 재킷을 입어야 입장할 수 있었다. 모자를 비뚜로 쓰면 아버지가 꼭 지적했다. 일본 유력 인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물을 건드리면 우리가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말렸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고 말했다.

1960년 박정희 집권 후 한국과 일본이 교류를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 있는 동포들을 불러 “한국이 먹고살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에 방림방적, 충남방적, 구로공단 등이 그렇게 생겼다. 동포들이 일본에 한국 대사관을 기증했다.

양국 관계 개선에 스포츠 교류도 한몫했다. 진옥동 신한은행장은 “1964년 도쿄올림픽은 재일 동포들의 비용 부담으로 한국이 참가할 수 있었다. 재일 동포들은 선수단의 일원이 되게 해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선수단이 되면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ID가 나왔기 때문이다. 가질 수 없었던 일본 공민권보다 권위 있는 IOC의 ID를 가지게 되는 건 자부심이었다”고 했다. 도쿄올림픽 이듬해인 1965년 양국 간 국교 정상화가 됐다. 88올림픽을 치를 때도 재일 동포들이 체육관을 지어주는 등 가장 큰 힘이 됐다.


▎현 오너인 히라카와.
1980년대는 일본 간사이 지역 재일 동포 사회에 자신감이 넘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오사카 동포들은 1980년 코마 골프장을 만들고 동해오픈과 신한은행을 잇따라 설립했다.

현재 이름은 신한동해오픈이지만, 신한은행이 동해오픈을 만든 건 아니다. 동해오픈(1981년)이 신한은행(1982년)보다 1년 먼저 생겼다. 동해오픈은 오사카의 동포 싱글골퍼 모임 회원들이 100만 엔씩 내 동해를 사이에 둔 한국과 일본이 친선을 도모하고 양국 골프 발전에 이바지하자는 뜻으로 만들었다.

이 모임엔 골프를 좋아하는 이희건이 포함됐다. 오사카 재일동포 싱글골퍼 모임은 말 그대로 친선 모임이어서 누가 동해오픈 창설을 제창했는지에 대한 기록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진 행장은 “당시 재일 동포 사회는 철저한 보스 문화였다. 절대 권력을 가진 보스와 그의 말을 따르는 사람들로 구성됐다. 보스인 이희건의 리더십이 엄청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한국에 대회를 만들자는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희건은 연설이 청산유수 같았고, 성격도 괄괄해 바람 잡는 데 선수였다. 도쿄올림픽 지원, 신한은행 창업 등도 다 그가 했으니 동해오픈도 그의 주도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신한은행은 번창했다. 그러나 재일 동포들은 1990년대 버블이 터지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이희건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코마 골프장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경기가 나빠지자 회원권 가격이 폭락, 반환청구 요구가 빗발쳤다. 돈이 필요한 코마 골프장에 재일 동포들이 만든 관서흥은이 출자했는데, 일본 금융 당국은 골프장이 어려운 걸 알면서 출자한 건 적절하지 않다고 봤다. 관서흥은과 코마 골프장의 주인은 아니었지만 양쪽에 모두 영향력이 큰 이희건 회장이 금융 당국의 고발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이 회장이 사재를 털어 출자금을 반환했다. 관서흥은은 2000년 사업을 접었다.


▎골프장의 그늘집은 한옥이며 입구에는 다보탑이 있다.
이때 파산한 일본 골프장들을 미국 자본이 대거 사들였다. 코마 골프장에도 제안이 왔지만 팔지 않고, 동포 최영훈 회장이 운영하는 기업 에이신 상사가 10년간 운영했다. 에이신 상사가 운영할 때도 매년 적자가 컸지만 미국 자본에 팔지 않았고 역시 재일 동포에게 넘겼다. 이 회사 오너인 히리카와 하루키는 “이 골프장은 누구 하나의 소유가 아니라 재일 동포의 추억이 담긴 곳이다. 재일 동포의 자랑이며, 재일 동포의 정서가 담긴 공간이다. 나도 재일 동포이기 때문에 골프장을 샀다”고 말했다.

LPGA 투어 진출 초창기에 한국 선수들은 천덕꾸러기였다. 돈만 벌어 가는 한국 선수들이 LPGA를 죽인다는 말도 공공연히 나왔다. 지금은 아니다. 한국 기업들이 LPGA 투어에 스폰서로 나서면서 주인으로 당당히 경기에 나선다.

일본에서도 많은 한국 선수가 뛰고 있다. 이보미, 안신애 같은 인기 선수들도 있지만 차별을 겪는 선수도 있다. 일본에서 한국 골프 선수를 전문으로 매니지먼트하는 동포 쿠수타니 나오미는 “신한동해오픈이 지난해부터 한일 공동 투어가 되고, 올해 일본에서 열리게 되어 한국 선수들이 ‘어깨 펴고 다닐 수 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코마 골프장에서 신한동해오픈이 개최되는 것은 선수의 기를 살려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진옥동 행장은 “코마 골프장에서 대회를 여는 것은 일본 3, 4세들에게 조상의 고향을 기억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동포 1세대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 3세 대부분은 조상의 고향에 직접 가보지 않았다. 도시 이름 정도로만 기억한다. 진 행장은 그들이 정체성을 확인할 길은 ‘참여’라고 생각한다. 진 행장은 “후손들은 신한은행 주주총회 등에 참가하면서 이 회사를 할아버지가 만들었구나 느끼게 된다. 그들에겐 할아버지의 진짜 고향이 아니라, 신한은행이 일종의 마음의 고향이 되는 것이다. 2002년 일본 PGA 챔피언십은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기념으로 코마 골프장에서 열렸는데 그때 동포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신한동해오픈을 코마 골프장에서 여는 것은 아련한 기억들을 이어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잊히겠지만, 동포들이 조상들의 고향을 생각할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히라카와는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아직도 조상의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인의 후예인 도공 심수관이 주인공으로 나온 책을 보여줬다.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1964년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납치된 심당길의 12대 후손인 심수관이 도예로 고향과 연결되어 있다면, 간사이 지역의 재일동포들은 신한은행과 코마 골프장을 통해 고향과 연결됐다.

이경재 이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코마 골프장 옆에 모셨다. 1982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골프장 옆에 묘소를 마련했다. 골프를 좋아하고 코마 골프장을 아끼셨으니 아무래도 골프장 옆에 묘소가 있으면 더 자주 갈 거라고 생각하셔서다. 2011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옆에 묻히셨다. 좋아하는 골프장 옆에 묻히셨으니 행복하시리라 생각한다. 아버지의 영혼은 여기서 대회가 열리는 걸 알 것이고 매우 기뻐하실 거다. 그러나 그의 무뚝뚝한 성격상, 표현은 ‘어 그래’ 정도로 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재 이사는 일본어를 썼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단어만큼은 한국말로 했다. 정확히는 ‘아부지’, ‘어무니’라고 불렀다. 그는 “아부지, 어무니는 가슴을 울리는 단어다. 서른 살이 넘어서 철이 들고 나서 아부지 어무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성호준 중앙일보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 사진:성호준 중앙일보 골프팀장, 신한은행

202004호 (202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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