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오디오로서의 음악 vs 다차원적 경험의 음악 

음악은 듣고 보고 따라 부르며 그에 맞추어 춤도 추는, 다차원적 경험의 대상이다. 종종 우리는 그것을 듣기만 할 수도 있다. 음악을 경험하는, 서로 다른 이 두 방식을 알아보자.

▎델로스(Delos)섬의 원형극장. 여기 세워져 있었던 막사와 같은 건물에서 배우 겸 무용수 겸 가수들이 옷을 갈아입었다. 이곳을 스케네(skene)라고 불렀는데, 스케네라는 용어에서 ‘신(scene)’이라는 연극 용어가 비롯됐다. ‘신(scene)’에는 장면이라는 뜻이 있다. / 사진:wikipedia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개학이 늦춰지더니(글을 쓰고 있는 4월 중순까지) 온라인 수업을 하는 상황이다. 오프라인 수업에서는 현장감이 있고, 학생들과 교육자 간 상호작용이 있다. 이런 것들이 온라인 강의에서는 확보되기 어렵다. 가상현실 혹은 증강현실 기술이 발달하면 오프라인에서 강의를 듣는 듯 생생한 느낌의 온라인 강의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캠퍼스와 강의실이 없어진 미래의 혁신적 온라인 교육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야 할 시간일까.

많은 교육학자가 교육자와 학생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교육의 중요한 요소로 본다. 학생들과 눈을 맞추라고, 그들 앞에까지 가서 이야기를 경청하며 고개를 끄떡이라고, 문제가 안 되는 범위에서 그들과 스킨십하라고 주문한다. 교육자가 성급하게 답을 말하는 대신, 문제를 제기해 고민을 유도한 후, 스스로 답하게 하는 교육을 주문한다. 교육자에게 엔터테이너 자질을 요구하기도 한다. 유명 강사들을 보자. 재미있는 제스처와 함께 춤도 춘다.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은어와 유행어도 쓴다. 수학 교사가 BTS의 노래 한 자락을 춤과 함께 부르면 학생들은 엄청 호응할 것이다. 아이들은 그 수업이 무척 재미있었다고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자질을 갖춘 교육자를 에듀테이너라고 부른다. 주의할 것이 있다. 엔터테이너로서의 에듀테이너는 학생들이 좋아하지 않는 아재 개그를 구사하는 이가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꿰뚫고 그것을 살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 능력을 발휘해 친구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온라인 교육 기술의 발달을 추구하는 이유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교육의 중요한 요소이자 수단이며 온라인에서도 그것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에서의 기술적 혁신은 과거 교육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가치들을 계속 중요하게 여기는 바탕 위에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상호작용이 늘 중요한 것일까?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성찰을 했다. 기원전 570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진 이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자는 남들이 보지 못했던 중요한 점을 찾아냈다. 그가 보기에 학생들은 그의 강의 내용보다는 그의 행동거지나 옷에 관심이 많았다. ‘진지한 수학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입은 옷 따위에 관심을 가지다니, 유감이군.’ 이런 상황을 교사들은 종종 확인했을 것이다. 미녀 배우 김모씨는 명문대학 재학 시절 어떤 고등학생에게 수학 과외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수학 이야기를 했지만, 남학생은 수업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과외선생에게 반한 여고생이 공부보다는 선생님과의 즐거운 시간을 더 즐기는 모습이 그려졌다. 모든 선생님은 학생들의 눈에 비주얼한 대상이다. 그 시각적 특성은 종종 선생님이 강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런 문제를 인지한 피타고라스는 독특한 강의 방식을 선보였다. 커튼 뒤에서 강의를 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제 그의 행동, 그의 옷, 그의 잘생긴(?) 얼굴에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심오한 강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강의자의 물리적 모습을 숨긴 상태에서 하는 강의는 강의 내용의 청취지각(perception)에 우호적이다. 피타고라스의 견해였다. 고대 그리스어로 청취지각을 ‘아쿠스마(akousma)’라고 한다.

배우 김모씨가 가져온(?) 그녀가 의도하지 않은(?) 문제는 음악가의 무대 위에서도 발생한다. 당신은 클래식을 잘 모르는 젊은 남자다. 음악회장에 갔더니 미녀 바이올리니스트가 깊게 패인 하얀 드레스를 입고 연주한다. 그녀의 레퍼토리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도 따라가기 어렵다. 그런데 그녀의 물리적 존재는 당신의 진지한 청취를 방해한다. 그녀가 피타고라스처럼 커튼 뒤에서 연주했더라면 좋았을까. 그랬다면 당신은 어쩌면 깊은 숙면에 빠질지도 모른다. 대중음악의 상황도 비슷하다. 춤추는 아이돌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그들의 화려한 춤으로부터, 그들의 노출로부터, 그들의 음악만 분리해 그것에 집중할 수 있을까?

그렇게 분리하는 것이 적절하기는 한가? 대답은 음악에 따라 달라진다. 분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음악이 있고 적절한 음악이 있다. 프랑스의 이에고르 레즈니코프 같은 고고학자들은 동굴을 탐사할 때 노래를 불렀다. 깊은 동굴에서 노래의 울림이 가장 좋은 곳이 있다. 그곳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 조상들이 축제를 벌였을 것이다. 조상들은 대략 4만 년 전에서 만 년 전까지 동굴에서 살았는데, 동굴 속 노래 울림이 가장 좋은 곳에서 노래만 부른 것이 아니라 그림도 그렸다. 그런 곳에서 벽화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내리는 추측이다. 선사시대의 축제에는 음악과 미술이 모두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런 공명 좋은 곳이 대체로 넓은 곳이라면, 조상들은 노래를 부르며 춤도 추었을 것이다. 그런 곳은 생활의 장소이기도 했다. 생활용품으로서의 유적 또한 그런 곳에서 많이 발굴되었다. 조상이 음악을 소비·향유하는 방식은, 베토벤 등을 근엄하게 연주하는 고전음악가의 모습보다는, 춤추며 노래하는 소녀시대와 그 청중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베토벤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는, 비록 그 연주자들이 노출 의상을 입고 강한 제스처로 연주한다고 하다라도, 그 시각적 정보들을 무시하고 듣는 편이 낫다. 베토벤 음악은 듣는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낫다. 보느라 정신이 팔릴 때 그의 심오한 음악의 ‘구조적’ 전개를 놓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많은 아이돌의 음악은 듣기만 하기보다는, 듣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안전이 허락된다면, 청중들에게는 아이돌 곁에까지 가서 같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최고다.


▎여성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는 여성에게도 철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고 전해진다. / 사진:wikipedia
선사시대로부터 시간이 흘러 고대 그리스 시대로 와도 음악은 여전히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었다. 디오니소스 제의에서 음악은 연극, 춤 등과 어우러졌다. 이 제의는 술과 풍요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였는데, 제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함께 춤추었다. 예술학자 해리슨에 따르면 디오니소스 제의가 이루어지던 원형극장의 중심에는 ‘오케스트라(orckesstra)’라고 불리는 둥근 공터가 있었다. 장소를 지칭하는 용어였던 오케스트라에서 춤과 노래가 섞인 코레이아(choreia)가 이루어졌다. 오케스트라라는 장소에서 춤과 노래를 하면서 이 단어는 춤추는 장소(dancing place)가 된다. 그 춤, 특히 집단적 춤을 의미하는 코레이아는 코로스(choros)에서 유래했다. 오케스트라는 오늘날 전문적 악기연주자 집단을 가리키는 단어(orchestra)가 되었고, 집단적 춤을 의미하는 코레이아와 코로스는 합창(chorus)으로 뜻이 바뀌었다. 오늘날의 합창에서는 대체로 춤이 빠진다. 대조적으로, 고대의 음악은 보고 듣고 같이 노래하며 운동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노래방에서 하는 일이다.

베토벤 음악이 진지하게 듣는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고 했다. 1970년대에는 이러한 진지한 태도를 더욱 강화한 음악 사조가 등장한다. ‘아쿠스마틱 음악’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피타고라스의 청취지각으로서의 ‘아쿠스마(akousma)’를 기억하자. 이 단어에서 비롯된 ‘아(어)쿠스마틱 음악(acousmatic music)’은 피타고라스의 정신을 계승한다. 커튼 뒤의 피타고라스가 강의 내용에 집중하라고 요구했다면, 이 음악을 하는 이들은 무대를 어둡게 한 후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들려준다. 피타고라스의 커튼 역할을 하는 것은 스피커다. 이것을 통해 나오는 음악은 작곡가들이 컴퓨터를 이용해 만든 것이다. 그런 음악이 이제 깜깜한 연주회장에서 들려지면, 사람들은 그 음악 연주자의 잘생긴 얼굴이나 멋진 제스처에 신경을 끄고, 귀에 들리는 음악의 청각적 특성에만 전념해야 한다. 한때 깜깜한 곳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음식점이 있었다. 그런 음식점의 철학에 따르면 음식은 먹는 것이다. 멋들어진 인테리어로 맛의 본질을 은폐하는 음식점을 경멸하는 철학. ‘음악은 헐벗은 아이들의 춤으로 가려질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철학도 있다.

이런 식당에서의 식사 경험이 쉽지 않듯 이런 식의 음악 경험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완전히 생소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아쿠스마틱한 음악 경험을 이미 하고 있다. 요리를 하며, 운전을 하며 음악을 듣는다. 음악 전문가들만이 다른 일들을 제쳐두고 음악을 진지하게 듣기만 한다. 물론 비전문가인 여러분도, 애써 눈을 감고 음악에 빠질 수 있다. 모든 경험이 다 좋다. 듣기만 하는 것은 그것대로, 듣고 보고 같이 참여하는 경험은 그것대로 좋다.

- 김진호 안동대 음악과 교수

202005호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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