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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욱의 對話(10) 박현모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장 

“위기의 시대, 세종 리더십으로 돌파하라”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리더의 자질과 능력은 위기 앞에서 가감 없이 드러나고, 군주의 리더십은 위기 대응과 극복이란 과정을 거쳐 비로소 태평성대로 이어진다. 건국 초기 혼란했던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아 500년 정사의 기틀을 닦은 성군 세종대왕이 그랬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지구적 위기로 떠올랐다. 앞으로 글로벌 정치와 문화, 경제 향방은 코로나 사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으로 구축될 거란 전망이 나온다. 위기의 시대,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의 리더십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까. 손욱의 대화 열 번째 순서로 박현모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을 만났다. 박 교수는 1999년 서울대학교에서 ‘정조의 정치사상’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2001년부터 14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정조와 세종, 정도전과 최명길 등 왕과 제왕의 리더십을 연구해왔다. 현재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며 교단과 재계 등에 세종 리더십을 전파하고 있다.

손욱: 서구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정립한 리더십론이 득세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업 재직 시절부터 한국형 리더십에 목말라했습니다. 지난 2010년 박 교수님과 함께 한국형리더십개발원을 연 배경이기도 하죠.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위기를 뛰어넘는 리더십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바이러스 위협이 지나면 ‘경제 코로나’ 위기가 닥칠 거란 암울한 전망이 나오는데, 세종의 리더십이 도약과 쇠퇴의 갈림길에선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 고언을 부탁드립니다.

박현모: 위기라는 면만 놓고 보면 사실 세종보다 영조가 더 뛰어난 군주였습니다. 52년간 재위하며 방대한 양의 실록을 남겼는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가히 위기 극복의 군주라 할 수 있겠더군요. 영조 스스로 “깊은 근심으로 인해서 성인의 밝음이 열렸고, 많은 어려움을 겪고서 나라를 안정시켰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영조는 보통 사람이라면 감내하기 힘든 처지에서 재위 10년까지 왕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의 반란을 제압해야 했습니다. 잇따른 기근과 전염병도 재위 내내 그를 괴롭혔죠. 기근과 전염병은 마치 쌍둥이와 같습니다. 먹지 못해 면역력이 떨어지면 역병이 돌고, 노동력이 사라지니 다시 기근이 오는 악순환이 반복되죠. 영조대에만 네 차례 전염병이 돌아 10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조선 인구가 700만 명이었으니, 인구의 7분의 1이 역병으로 죽은 셈이죠.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국가에 닥친 전염병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영조실록』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극복 사례가 없더군요. 전염병이라는 위기 앞에서만큼은 영조도 결국 실패했다는 뜻이죠. 성공 사례를 찾으려니 역시 세종에게 답이 있었습니다.

손욱: 세종 대에도 전염병으로 위기를 겪었습니까? 세종의 수평적 리더십이 역병이라는 천재지변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궁금하군요.

박현모: 세종 9년째인 1427년 수도 한양 인근에 역질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옵니다. 의정부에서 급성 전염병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죠. 녹번현(지금의 서울 홍은동과 녹번동 사이 고개)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시신을 나무에 걸어놓거나 구렁에 버리기도 하고, 드러난 시신이 비바람을 맞아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참담했습니다. 실록에 기록된 세종의 첫 반응은 ‘놀라면서’입니다. 즉, 리더가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죠. 실록에 나온 다른 임금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반응입니다. 그런 다음 세종은 하루빨리 시신을 땅에 묻으라고 한성부에 명했습니다. 위생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의도였죠. 이어 관료들에게 “죽은 자 중 장사 지낼 자가 없을 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세종의 특기가 바로 질문이죠. 즉위 직후에도 “과인이 사람을 모르니 어느 자리에 누구를 임명할지 의논하자”고 말했습니다. 질문과 토론으로 국가를 다스린 거죠.

가장 인상 깊은 건 사후 작업니다. 세종은 집현전에 명을 내려 과거 전염병 관리에 대한 성공과 실패 사례를 찾았습니다. 이를 통해 예방과 치료를 위한 『벽온방』을 편찬했고, 이를 백성들이 쓰는 말로 풀어 전국에 보급했죠. 중국이 아닌 조선의 약초 효능과 사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향약집성방』도 펴냈고, 노래로 만들어 백성에게 알렸어요. 위기를 극복한 최고의 리더십을 나이 31살에 보여준 겁니다.

손욱: 역병이 돌아서 많은 사상자가 나온 건 어쩔 수 없어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 한 세종의 노력이 대단합니다. 책을 펴내고 노래를 지어 백성들을 깨우친 건 요즘으로 치면 지역 거점병원을 지었던 셈이네요.

박현모: 세종은 지식의 집대성, 즉 집단지성의 효과를 이미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집현전 학사들에게 “왜 시체를 묻지 않고 나무에 거느냐”고 물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을 묻으면 땅이 오염된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었죠. 시신을 함부로 다뤄야 역병을 몰고 온 귀신이 물러간다는 미신도 컸고요. 세종은 과거 사례를 조사했고, 매장해야만 역병을 빠르게 막을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미신과 관습이 아닌 과학적 연구로 대응했어요. 요즘으로 치면 인포데믹(정보를 뜻하는 Information과 유행병을 뜻하는 epidemic의 합성어. 잘못된 진단과 전망이 전염병처럼 급속히 퍼져 오히려 혼란을 초래하는 현상)을 철저히 차단한 셈입니다.

손욱: 국가 위기 대응 시스템이 후대까지 전해졌는지도 궁금합니다.

박현모: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은 30년간이나 세자로서 부친을 보좌했습니다. 세종이 설립한 집현전을 문종도 늘 가까이 두었죠.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실록을 살펴보니 문종의 위기 대응 리더십도 무척 인상적이더군요. 문종도 즉위하자마자 파주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전염 속도가 너무 빨라 천도론까지 나왔죠. 문종도 아버지와 같이 관료, 학자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요즘 자꾸 전염병이 퍼져 천도까지 논의되는데, 흔한 치료법인 무당 푸닥거리나 불가의 수륙제가 효험이 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신하들이 저마다 답을 내놓자 문종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전염병에는 항상 일정한 이치가 있다. 초기에 환자를 격리하면 스스로 물러간다. 병에 걸린 사람을 빨리 찾아 인적이 끊긴 섬에 들이고, 의복과 양곡과 약품을 넉넉히 보급하라. 스스로 치료된 사람은 나오게 하라.” 이 대목을 보며 정말 놀랐습니다. 이미 570년 전에 감염자 격리를 최선의 방안으로 제시했던 거죠.

연구와 실증으로 인포데믹 차단한 세종


▎박현모 교수는 전염병에 대응한 세종의 리더십이 오늘날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했다.
손욱: 문종이 환자 격리부터 나섰던 건 세종 9년에 겪은 역병 처리를 세자 신분으로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세종의 국정 운영을 곁에서 보며 공부했던 것이죠. 집현전 학사들의 지혜를 모으고, 과거 자료를 조사해 백성의 면역력을 높였던 항구적 대책. 문종은 어려서부터 지도자 양성 교육을 받으며 지혜로운 리더로 성장했어요. 일하는 방법을 배운 거죠.

박현모: 세종이 항상 집현전 학사들과 토의하며 이들의 의견을 존중한 것도 중요한 의미를 던져줍니다. 바로 전문가 집단에 대한 존중이죠.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종 대에 유효통, 황자후, 노중례라는 세 명의가 있었습니다. 『향약집성방』을 쓴 이가 바로 유효통입니다. 집현전 학사이기도 했죠. 책이 나오자 황자후가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례는 궁중 비치용일 뿐 민간에서 널리 쓰긴 어렵다는 이유였어요. 환자 성별이나 나이 등 세세한 처방이 어렵다는 것도 비판 이유였죠. 임금인 세종의 명으로 만든 최고 프로젝트인데, 이를 일개 의사이자 학사가 강하게 비판한 겁니다.

황자후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과 어릴 때부터 개경에서 함께 나고 자란 친구 사이였습니다. 태종이 왕이 된 후론 운하 건설 등 국가 대소사를 황자후에게 맡기는 등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의학에도 조예가 깊어, 태종이 두 번이나 중국에 보내 연구하게끔 배려했죠. 요즘 말로 치면 국비장학생인데, 이후 세종 대에 이르러 어의가 됩니다.

임금이 주도한 프로젝트에 쓴소리를 던진 황자후였지만, 세종도 그를 매우 아꼈습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세종이 황자후와 이야기하다 ‘껄걸’ 웃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독을 모아 환자에게 주입해 치료하는 ‘고독지술’에 관한 이야기인데,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마취술이죠. 세종이 “고독지술이 효과가 있느냐” 물으니 황자후가 “없다”고 답합니다. 그 연유를 다시 묻자 “신에게 중독시켜 실험해보았다”고 답하죠. 스스로 실험 대상이 됐다는 말에 세종이 “대단하다”며 껄껄 웃었다는 내용입니다. 전문가 집단이 책임감과 열정을 발휘해 자기 분야에서 헌신할 수 있는 환경을 리더가 뒷받침했던 거죠. 우리 역사에서 정말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손욱: 세종은 항상 전문가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그 당시 전문가 집단은 바로 집현전 학사들이었죠. 재위 30여 년간 학사 100여 명이 집현전을 거쳤는데, 그중 20%가 의학, 천문학, 수학 등 과학자였어요. 경전만 외던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전 세계 장서를 모아 읽고 토론하며 연구에 전념했죠. 그다음 왕과 토론해 지혜를 뽑아 국가 정책을 결정했습니다. 전문가의 말을 잘 듣고 그들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도록 존중하고 격려하는 게 국가 지도자의 자세라는 건 오늘날도 다를 바 없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큰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박현모: 사실 위기란 말이 사서삼경엔 없어요. 위와 기가 따로 나오죠. 위기는 큰 위험을 알리는 전조입니다. 위험한 기회죠. 방치하면 더 심각한 국난이 되지만, 세종이 전염병에 대응했듯 초기에 제대로 막으면 오히려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위기를 깨달은 세종이 제대로 일해 백성이 건강한 나라를 만든 셈입니다.

손욱: 처음부터 잘못된 인식을 과감하게 혁파한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시신을 묻고 환자를 격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후 작업을 병행했죠. 『의방유취』를 편찬해 의술을 집대성했고 『향약집성방』을 민간에 보급했어요. 지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체계, 즉 시스템을 갖추는 데 힘썼습니다. 끝까지 시스템이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개선해나갔죠. 시스템이 문화로 자리 잡을 때까지 멈추지 않은 겁니다. 또 전문가들이 자기 목숨을 걸고 연구하고 노력하도록 배려했어요. 세종은 어떻게 신바람 나는 일터를 만든 걸까요?

박현모: 관료와 학사들이 무엇을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지 정확히 파악하려 했던 것이 세종의 힘입니다. 이를테면 장영실의 과학, 박연의 음악, 유효통과 황자후의 의학 등이죠. 모든 것을 신하들과의 경연에서 파악하고 이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세종은 “네 말이 참으로 아름답도다. 그대로 해보아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도와줄 테니 하고 싶은 만큼 해보라며 믿고 맡긴 거죠.

전문가 의견 정책에 반영해야


▎손욱 회장은 정부와 관료들이 민간의 전문가 집단을 활용해 혁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욱: 태조부터 세종까지 네 임금을 섬긴 명재상 허조가 죽기 전에 “나는 조선에서 가장 행복한 재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제 말을 임금이 다 들어주고 실행해주셨다고 했죠. 인간은 인정과 존중을 받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세종은 늘 인간 존중의 마인드로 신하들을 배려했어요. 조금 틀리더라도 들어주고 격려했죠. 그러니 신바람이 날 수밖에요. 황자후처럼 목숨을 걸고 실천하는 조직문화를 만든 것입니다.

박현모: 한번 소임을 맡기면 오랫동안 일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세종의 대표적 리더십입니다. 구임(久任)이라고 하죠. 오래 맡겨 최고 전문가가 될 때까지 기다려줬습니다. 간단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죠. 대신 결과로 책임지게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리더십이 아닌가 합니다.

손욱: 우리나라 관료조직 특징이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과거에 부정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에 단기 임무, 즉 순환 배치가 당연시됐죠. 제너럴리스트와 전문가가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모든 분야를 단기 로테이션 중심으로 운용하고 있어요. 그러니 공무원 사회에서 깊이 있는 전문가 양성이 어렵습니다. 다만 민간에는 전문가 집단이 있어요. 이들의 의견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관료사회도 혁신할 수 있습니다.

박현모: 지난해 말 세종청사에서 농식품부 공무원들에게 세종 리더십을 강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세종의 전문가 양성 사례를 들었죠. 세종은 오늘날 정부 역할을 하는 6조 외에, 싱크탱크 역할을 맡은 집현전을 따로 세웠습니다. 관료와 전문가가 힘을 합해 일하게 했죠. 일례로 『농사직설』을 편찬할 당시 도감이라는 태스크포스팀을 따로 두었습니다. 이 도감에 집현전 학사를 한 명 두어 정책 목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움직였죠. 올해가 마침 집현전 설립 600돌입니다. 세종청사와 국회, 청와대 가까이에 집현전 같은 싱크탱크를 두면 우리 정책 경쟁력이 크게 오를 겁니다.

손욱: 삼성도 미래전략실, 종합기술원, 인력개발원 같은 싱크탱크가 서로 모여 협력해 오늘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CEO는 바뀌어도 전문가 그룹은 유지됐죠. 이들이 현장 경영진을 보좌해 더 나은 시대를 만든 겁니다. 우리는 정권이 바뀌면 이전의 것은 모두 사장되고 말아요. 정책의 영속성이 없죠. 세종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스스로 ‘모른다’고 하며 전문가들과 논의했어요. 그게 전문가 집단을 살리는 길임을 알았죠. 전문가는 정치나 정권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경연이 좋은 예죠.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1898회 경연을 열었습니다. 한 달에 5번꼴로 세미나식 어전회의를 열었던 거예요.

박현모: 지도자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질문하는 자세입니다. 어떤 질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알아야 해요.

손욱: 600년 전 고려가 망하고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태종 대까지 왕자의 난 등을 겪으며 정치적 격변을 겪었죠. 경제도 안정적이지 못해 수도 이전까지 추진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세종은 사람의 마음을 한 방향으로 모아 ‘생생지락(生生之樂)’이라는 비전을 만들어냈습니다. 삶과 생업의 즐거움, 즉 일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세상을 꿈꿨죠. 모든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비전을 리더가 만들어낸 겁니다.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이겠습니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창의가 신바람 나게 발휘되는 세상 아닐까요. 더욱이 코로나라는 예기치 못한 위기 앞에서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야 하는지를 세종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박현모: 가장 어려운 게 미래를 내다보는 일입니다. 국정 운영의 책임자들이 『세종실록』을 읽고, 각 분야 전문가를 모아서 질문을 던졌으면 해요. 깜짝 놀랄 만한 집단지혜가 나올 겁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힘은 갖지만 아이디어는 고갈되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청년들은 아이디어는 많은데 파워가 없죠. 현장의 살아 있는 의견을 리더가 들어야 합니다. 전문가의 아이디어와 리더의 파워가 결합하면 우리 미래가 어떨까요. 세종을 살려낼 순 없으니, 그가 만든 방식과 정신을 살려야 합니다.

※ 손욱 전 회장은… 40여 년간 삼성그룹에서 근무한 정통 ‘삼성맨’이자 국내 최고의 기술경영자(CTO)로서 평생을 혁신에 전념해왔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최측근에서 보좌했고, 삼성그룹의 프로세스 혁신과 정보 시스템 구축도 그의 작품이다. 삼성인재개발원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이후 농심에서 현역 생활을 마친 손 전 회장은 현재 한국형리더십연구회 회장, 감사나눔운동 전파 등 사회문화 운동으로 또 다른 혁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2005호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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