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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녕 엔젤식스플러스 대표·전 LG화학 CTO 사장 

“10년 후 잠재력 폭발할 소재 찾아라” 

38년을 소재 연구에 매진해온 CTO가 일본 수출 규제와 한국 소부장 산업의 미래를 진단했다. 언제나 그랬듯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이다.

“한국 소부장 산업에는 좋은 기회다. 다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유진녕 엔젤식스플러스 대표는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1년 8개월이 지난 시점을 이렇게 평가했다. 유 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소재산업의 키맨이다. 지난 1981년, LG화학 기술연구원 고분자연구소 연구원으로 입사해 연구원장과 CTO를 거쳐 2019년 퇴임하기까지 38년간 LG화학의 R&D를 주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LG화학기술연구원은 디스플레이, 2차전지, 생명과학 등의 분야에서 연구원 5500여 명이 일하는 세계적 R&D 캠퍼스로 성장했다. 유 대표를 만나 한국 소부장 산업의 현재와 과제를 물었다.

일본이 수출 규제에 나선 진짜 이유가 뭔가.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라 생각한다. 일각에선 커가는 한국의 산업 경쟁력에 대비해 자국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하는데, 그렇게까지 깊이 고민한 건 아닌 듯하다. 일본이 실제 그런 의도였다면 정말 잘못 짚은 거다. 오히려 소부장 국산화가 더 빨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 산업 자체를 망가뜨릴 정도의 지독한 게임에 나선 건 아니다.

반도체·디스플레이에 대한 공격은 치명타를 노린 거 아닌가.

그 정도면 굉장히 피곤해할 줄 알았을 거다. 국내 업체가 못 만들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폴리이미드는 이미 코오롱인더스트리 등에서 양산설비를 갖춘 상황이었다. 일본이 우리 수준을 정확히 몰랐고 얕잡아 본 거다.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폴리이미드 말고도 한국을 공격할 수단은 많다. 지금도 전량 일본에서 들여오는 소재도 있다. 결국 일본 기업만 손해를 본 상황이 됐다.

일본이 우리 소부장 경쟁력을 그 정도로 모르나.

물론 일본도 다 조사해서 리스트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럼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가 가장 임팩트 있는 공격 대상이라 판단했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소부장, 특히 소재 같은 경우는 위기가 닥쳤을 때 스타트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폴리이미드 같은 경우 개발에만 10년 이상 걸리는 소재다. 1년 8개월간 우리가 잘 대응해왔지만, 이런 단편적 사례로 행여나 부처 공무원들이 소재의 단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생각할까 봐 겁난다. 소재는 절대 그런 산업이 아니다. 다만 이번 사태로 우리 소부장 기업이 좋은 찬스를 살려 밤새워 연구했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나 LG디스플레이와 같은 대기업들도 소부장 기업에 발 빠르게 테스트 기회를 제공하고 적극적인 피드백을 해줬다. 그게 잘 맞아떨어졌다.

우리 소재산업의 경쟁력은 어느 정도인가.

소재는 제조업의 근간이다. 중요성의 경중을 따질 산업이 아니다. 과거 기술이 없을 때는 일본이나 미국에서 기술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시절이었다. 현재 범용 소재는 국내 기업의 경쟁력이 상당한 수준이다. 문제는 일부 고부가가치 기능성 소재다. 이런 소재는 생산량 자체가 적고 기술적 난이도도 높다. 메이저 소재는 우리도 충분히 월드클래스가 됐다. 기업 연구소 중심으로 R&D 역량을 쌓아왔고, 특히 디스플레이 분야는 소재 선진국과의 갭을 상당 부분 극복했다. 하지만 퍼스트무버가 아닌 패스트 팔로워라는 한계도 여전하다. 예를 들어 반도체 소재의 경우 아직 좀 부족한 게 사실이다. 물론 어떤 나라든 모든 소재를 100% 국산화할 수는 없다.

최근에는 중국의 부상도 놀랍다.

중국의 발전 과정은 우리와 비슷하다. 후발 주자로서 소재나 부품에 비해 단기 성장이 상대적으로 쉬운 최종 세트 제품은 빨리 따라잡을 수 있었다. 더욱이 원재료로 축복받은 나라 아닌가. 그러나 소재는 아직 멀었다. 히토류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원재료일 뿐이다. 히토류로 만든 자성소재(자석)는 지금도 일본이 싹쓸이하고 있다.

일본은 왜 잘하나.

근대화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이뤄지지 않았나. 소부장에 대한 산업적 니즈가 그만큼 빨랐고, 그러니 앞설 수밖에 없다. 또 하나, 한번 붙잡으면 오랫동안 파고드는 장인정신이다. 기초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반면 우리의 ‘빨리빨리’ 체질은 소재산업과는 잘 맞지 않는다. 요즘은 길게 붙잡고 하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아 걱정이다. 일본은 지금도 소재 하나 붙잡고 20년, 40년 하는 기업이 많다. 그러니 기술 수준 자체가 높고 산업적 가치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을 따라잡기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말로 들린다.

개별 품목보다는 큰 그림을 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소재는 크게 세 분야로 나뉜다. 첫째가 유기물 기반의 유기 소재로, 플라스틱부터 OLED 발광소재 등이 이에 속한다. 그다음이 금속 소재고, 마지막이 무기물 기반의 세라믹 소재다. 유기 소재는 여러 강자가 있고, 금속은 포스코 같은 메이저 개발사도 있다. 세라믹 소재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제일 취약한 분야다. 전기차, 차세대 반도체, 분산 발전과 같은 미래 주도 산업에서 세라믹과 같은 무기 소재는 산업 경쟁력을 가를 핵심 소재로 부상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국가적 과제로 보완해야만 한다. 한국에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세라믹 소재 기업이 없다. 지금 같은 상태가 이어진다면 향후 10~20년 후에 우리나라의 성장을 옭아맬 소지가 크다. 하루빨리 경쟁력을 갖춰야만 한다.

일본의 규제에 빠르게 대응한 건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 아닌가.


▎LG화학 오창공장에서 생산한 배터리를 점검하고 있는 연구원들.
소재 기업에 좋은 기회가 된 건 사실이다. 반면 삼성, LG, SK 같은 디바이스 대기업들은 뜨끔했을 거다. 소재 공급이 끊기면 생산 라인이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내 소재 기업에 “빨리 되는 곳부터 가져와라, 평가해주겠다”고 했던 거다. 과거에는 없던 기회를 새로 주고 평가시간도 보장해줬다. 평소 같으면 1~2년 이상 걸릴 과정을 몇 개월 만에 압축해서 제공했다. 일본도 우리가 이렇게 빨리 대처할 줄 몰랐을 거다. 다행스럽게도 규제 품목 3개 중 2개는 이미 국내 개발이 거의 완료돼 있었고, 하나는 다른 나라 제품으로 대체가 가능했다. 정보전자 소재는 디바이스 업체와 소재 기업의 파트너십이 매우 중요하다. 국내 중소·중견기업엔 전에 없던 기회가 온 셈이 됐다. 정부도 단기간에 자금 지원에 나서는 등 힘을 보탰다. 일본의 섣부른 판단에 대한 우리의 대응에는 운이 많이 작용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왜 미리부터 준비하지 못했는지 반성부터 해야 한다. 현재 문제가 된 기술들이 우리가 도저히 풀지 못할 난제들인가? 아니다. 일본의 공격에 당황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10년, 20년 후 잠재력이 폭발할 소재에 대한 연구를 안 했기 때문이다. 휴대폰은 1~2년이면 신모델이 출시된다. 하지만 소재는 새로운 품목을 개발하는 과정이 무척 긴 롱텀 비즈니스다. 예를 들어 TV는 1인치 개발에서 45인치 개발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크기보다는 얼마나 대량생산이 가능한지가 관건인 넘버링업(Numbering-up) 산업이다. 반면 소재는 물리적 특성, 열적 안정성 등이 엄청나게 까다롭다. 물성이 좋아도 가공이 어려우면 안 되고, 유동성이 좋아도 금방 타버리면 끝이다. 플라스크에서 몇십 리터 실험에 성공했다고 바로 수십 톤 탱크로 쉽게 스케일업(Scale-up)할 수가 없다. 양산이 어려워 포기하는 소재도 많다. 폴리에틸렌이 개발된 지 80년도 더 됐는데 지금도 쓰인다. 그러니 10년, 20년 걸려 연구하는 것이다.

소재를 바탕의 반도체가 혁신적인 속도로 발전하는 건 왜인가.

반도체는 대표적인 부품산업이다. 그러나 반도체 제조 역시 실리콘, 포토레지스트, 애칭가스 같은 소재의 우수성이 품질을 가른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당대 생산된 소재 중 가장 우수한 제품을 받아 쓰면 된다. 설계 역량, 제조공정 노하우 등은 차치하고 말이다. 가장 좋은 소재와 장비들의 합이 최종 제품의 성능을 좌우한다.

장기 개발이 필수인 소부장 기업 입장에선 세트 업체의 요구에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 같다.

맞다. ‘빨리빨리’가 미덕인 우리나라에서는 더 그렇다. 최종 제품은 개발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다. 좋은 소재와 부품을 사다가 합친 거니 그렇다. 그러나 들어가는 특정 소재는 몇십 년 연구 끝에 개발되기도 한다. 물론 부품이나 장비 개발 자체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다만 소재라는 업의 특성상 오랜 호흡이 기본이다. 휴대폰은 1~2년 안에 죽었던 모델을 개선해 살려내기도 하고, 반도체 집적도는 단기간에 크게 점프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부품·디바이스 업체 입장에선 소재 개발이 답답할 수밖에 없고 자체 개발을 포기하기 쉽다. 기업 연구소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5년 했는데도 안 돼? 그럼 5년 더 해보자”는 경우는 거의 없고 “엉터리다, 그만해라”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결과적으로 소재 개발이 그만큼 뒤로 밀리는 셈이다.

일본 수출 규제로 인해 현장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나.

우리는 그동안 쫓아가는 연구가 주류였다. 남이 개발한 소재를 어떻게 똑같이 복제해내느냐가 생존의 관건이었다. 근래 들어 기업 연구소가 성장하고 고성능 디바이스 제조 능력을 갖추면서 기존에 없던 소재에 대한 니즈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세트든 소재든 이제는 남이 하는 걸 쫓아가는 게 아니라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대기업은 10년, 20년을 내다보고 투자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비교적 규모가 작은 소재 기업이 오랜 시간 소요되는 R&D를 감당하기는 버거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국가가 더욱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한국은 이미 첨단산업 강국이다. 그러니 핵심 소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게 맞다.

대기업과 소재 기업 간 협업과 시너지가 더욱 중요해진 것 같다.

디바이스 업체부터 개발 소재 테스트를 위해 양산 라인을 비워줄 정도의 믿음을 줘야 한다.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은 협력사에는 “앞으로 이런 제품 만들려 하니 이런 소재를 개발해달라”고 타깃을 미리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연구원들은 ‘맡겨만 주면 잘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센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런 기회 자체를 잡기가 어려웠다. 중소업체 CEO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기회를 달라”고 하소연한다. 디바이스 업체로선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기술 로드맵을 공유하기 어렵다. 양산 라인을 비워주고 테스트하면서 생기는 기회손실, 수율 저하 등 위험성이 막대하므로 협력사의 실력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LG화학도그룹 계열사인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에 소재를 납품할 때 엄청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해야만 한다. 일본 수출 규제 사태를 교훈 삼아 국내 강소기업을 키우는데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더블메이커 전략도 새로 세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복수 기업에서 소재를 납품받더라도, 모두 일본산이어선 곤란하다. 적어도 국가는 달라야 한다. 일본이 독점한 소재라면 한국과 유럽 업체에 각각 개발 주문을 내는 식이다.

명확한 타깃팅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들린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결국 미래에 꼭 필요한 핵심 소재를 개발하는 것이 승패를 가른다. 예컨대 안경이 필요 없는 3D TV가 나오려면 이제까지 없는 광학 소재가 필요하다. 이런 수요는 TV를 만드는 디바이스 업체가 제일 잘 안다. 이런 식으로 시장의 니즈를 정확히 알아내는 게 소부장 개발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바로 정확한 타깃팅이다. 이런 정보를 디바이스 업체와 개발 협력사가 얼마나 많이 공유하는가가 향후의 문제 재발을 막는 데 핵심 사항이 될 것이다.

R&D 방법론도 과거와 달리 개선할 점이 없나.

소재 개발은 본래 많은 시행착오와 시간이 걸린다. 많은 분야에서 그렇듯 빅데이터·AI가 소재 개발에도 방법론적 혁신을 불러오고 있다. 또 하나의 거대한 방향 전환이다. AI는 그 자체로 산업이라기보다 혁신을 일으키는 도구(tool)에 가깝다. 빅데이터와 AI를 소재 개발에 적용하면 개발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이미 세계적인 트렌드로, LG화학도 이미 시작했다. 이동통신 데이터나 금융거래 데이터를 통해 새로운 사업모델을 만들듯이 정부와 기업이 힘을 모아야 한다. 실험실의 모든 데이터를 디지털라이제이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본 특유의 가이젠(改善) 문화를 부러워할 게 아니라, 우리만의 혁신적 변화로 이를 뛰어넘을 시점이다. 일본이라고 가만있겠나? 빅데이터와 AI를 이용한 실험방식의 혁신은 우리에게 다가온 마지막 리스크이자 기회다.

엔젤식스플러스를 통해 제조 기반 스타트업을 돕고 있다. 소재 분야는 어떤가.

요즘 소부장 이슈 덕분에 소부장 스타트업에 대한 벤처캐피털(VC) 투자가 늘고 있다. 사실 VC는 소재 분야에 돈을 잘 안 준다. 엑시트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플랫폼 비즈니스에만 돈이 몰린다. 그러니 제조업 스타트업이 태부족이다. 엔젤식스플러스가 제조업 중심 지원에 주력하는 배경이다. 초기 기술만 가지고 있는 인재들이 역량 있는 스타트업으로 클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의 목표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신인섭 기자

202103호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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