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한류 선두 주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팬엔터테인먼트는 드라마 제작사로서 거둔 성공을 바탕으로, OTT 시장에 진출하고 해외 영화와 애니메이션 수입·배급사인 ‘미디어 캐슬’을 인수하며 IP를 통한 콘텐트 다각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팬엔터테인먼트는 드라마 제작사에 만족하지 않고 종합 엔터테인먼트사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다.
▎박영석 팬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자사가 제작한 작품 사진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팬엔터테인먼트는 지상파 중심에서 OTT로 영역을 확장하며 벤처 1000억 기업으로 성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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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트 유통 주체이자 주요 투자자인 OTT가 등장한 이후 드라마 제작 시장은 위기이자 기회를 맞이했다. 2024년 글로벌 회계 컨설팅업체인 PwC 발표에 따르면 글로벌 OTT 시장은 2026년 1868억7100만 달러(한화 약 272조7382억원, 1월 18일 기준), 2027년 1976억4900만 달러(한화 약 288조4687억원), 2028년 2079억300만 달러(한화 약 303조4344억원)로 증가가 예상된다. OTT 시장은 2019년부터 급성장했으나 2023년부터 성장세가 다소 둔화됐다. 방송 시장 규모는 2022년 이후 지속적인 감소세다. 방송 시장은 2026년 3114억5700만 달러(약 454조5714억원), 2027년 3024억2000만 달러(약 441조3819억원), 2028년 3080억3400만 달러(약 449조5756억원)로 추정된다. 다만 향후 몇 년간 기존 방송 시장이 여전히 큰 규모를 유지하겠으나, OTT 시장의 성장으로 두 시장 규모가 비슷하거나 OTT가 앞설 가능성이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2023)의 ‘언론 수용자 조사’를 봐도, 텔레비전보다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이용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이용률은 2018년 33.6%에서 2023년 72.2%로 2배 이상 증가한 반면, 텔레비전 이용률은 같은 기간 93.1%에서 91.6%로 줄어들었다.[2024 KOCCA 트렌드 방송영상·OTT 트렌드]에 따르면 OTT 시장이 성장하면서 제작 스튜디오를 설립하는 방송사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CJ ENM은 ‘스튜디오드래곤’과 ‘CJ ENM 스튜디오스’라는 멀티스튜디오 체제를, JTBC는 ‘SLL’이라는 멀티 레이블을 갖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또 드라마는 해외로 진출 중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N콘텐츠 매거진 2024’에 따르면 K-드라마는 충분한 자본력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OTT를 만나면서 저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OTT를 만난 K-드라마의 팬덤은 이제 국내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 중이다.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한 K-드라마는 국내 팬덤을 넘어 해외 팬덤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관계 속에서 진화 중이다.우리나라의 대표 드라마 제작사라고 할 수 있는 팬엔터테인먼트는 한류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2002년 [겨울연가]를 시작으로 2006년 [소문난 칠공주], 2012년 [해를 품은 달], 2012년 [각시탈], 2015년 [킬미힐미], 2017년 [쌈 마이웨이], 2019년 [동백꽃 필 무렵], 2021년 [라켓소년단], 2023년 [반짝이는 워터멜론] 등 시대와 세대를 넘어 인기를 끈 히트작 68편을 제작해왔다. 2006년에 코스닥에 상장한 팬엔터테인먼트는 약 20년이 지난 후 벤처기업협회에서 선정하는 2024년 ‘벤처 천억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벤처천억기업’은 연 매출 1000억원을 달성한 벤처기업이다. 2023년 기준 팬엔터테인먼트는 매출 1238억원을 달성했다. 박영석 대표는 “다수의 인기 드라마를 배출한 것에 비하면 매출 1000억원 달성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다.
음반 회사에서 출발한 드라마 제작사팬엔터테인먼트는 가수 싸이, 이정현 등이 소속된 음반회사로 출발했다. 박 대표는 “당시 소속 연예인들이 그야말로 초절정의 인기를 누렸다”면서도 “회사 매출로 이어지진 않았다”고 회상했다.“소속 가수들의 인기는 뜨거웠지만 당시 대중이 음악을 향유하는 방법은 MP3 플레이어였습니다. 1980~1990년대처럼 레코드판이나 CD를 구매해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MP3로 불법 다운로드가 자행됐던 것이죠. 음반 100만 장을 판매하는 대형 가수들도 음반 판매량이 5만~10만 장에 그치는 등 음반 판매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팬엔터테인먼트는 드라마 OST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박 대표는 “대한민국에서 나보다 드라마 OST를 많이 제작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팬엔터테인먼트는 1992년 KBS 드라마 [내일은 사랑]을 시작으로, 당시 유명 드라마 대부분의 OST를 맡아 제작했다. 박 대표는 “OST 제작사 입장에선 제작한 OST를 많이 노출하기 위해 수많은 감독, 작가와 친분을 쌓는 것이 필연적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겨울연가]를 연출한 윤석호 감독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박 대표는 윤 감독의 제안으로 드라마[ 겨울연가] 제작에 뛰어들었다. “계획적으로 드라마 제작 진출을 도모했다기 보다는, 음반 시장이 침체돼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박 대표에게 드라마 제작은 흥행 신화로 국내를 넘어 글로벌에서 인정받는 기회가 됐을 만큼, 그야말로 새로운 기회였다. 일본에선 2003년 NHK 위성방송에서 드라마 [겨울연가]가 방영된 것을 계기로 ‘한류(韓流)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고,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이돌, 드라마 등 K-콘텐트를 아우르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 [겨울연가]의 성공은 팬엔터테인먼트에도 터닝 포인트와 같았다. 2006년 7월 7일 코스닥에 상장했고, 박 대표는 이날을 팬엔터테인먼트의 또 다른 창립일로 기념한다.
변화하는 미디어 시장의 즉각적인 대응이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박 대표는 [소문난 칠공주], [해를 품은 달], [각시탈], [동백꽃 필 무렵] 등 누구나 알만한, ‘시청률 제조기’라 불리는 드라마들을 제작했다. 최근 OTT의 등장은 또 다른 위기이자 기회다. 지상파 위주로 연속극, 미니시리즈 등을 제작해온 팬엔터테인먼트도 몇 년 전부터 OTT 드라마를 제작 중이다.“올봄, 넷플릭스에서 방영 예정인 아이유와 박보검 출연 [폭싹 속았수다]는 [동백꽃 필 무렵]을 집필한 임상춘 작가와 [나의 아저씨], [미생]을 연출한 김원석 감독의 만남이라 넷플릭스 이용자나 한류 팬덤 사이에서 올해 최고 기대작으로 꼽힙니다. 지난해 넷플릭스에 방영된 [돌풍]에 이어 올해 [폭싹 속았수다]는 팬엔터테인먼트가 지상파 중심에서 OTT로 영역을 확장하는 여정의 첫걸음입니다.”박 대표는 “엔터테인먼트 사업만큼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사업도 없다”고 말한다. 2024년 3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발간한 [2023 한류백서]에 따르면 글로벌 OTT를 중심으로 투자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국내 플랫폼 사업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제작비 규모가 크게 상승한 것도 업계의 큰 고민으로 부상했다. 2023년 넷플릭스가 향후 4년간의 투자계획을 발표하면서 글로벌 OTT와의 협력 구조는 앞으로도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 지상파 중심의 토종 환경에서 OTT로 미디어 시장이 변화하고, 60~80분짜리 드라마가 아닌 편당 1분 정도로 빠른 호흡이 특징인 쇼트폼 드라마가 떠오르고 있다. 이 때문에 박 대표는 끊임없이 “한 작품이 히트해도, 또 다른 하나를 히트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고 토로했다.“우리 회사 사훈이 ‘무에서 유를 창조’라고 할 만큼, 엔터테인먼트는 창조가 핵심입니다. 다른 회사들처럼 한두 가지 특정 상품으로 수십 년간 먹고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전에는 정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드라마 외에도 2025년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영화도 제작 중이다. 영화 [오디션 109]는 배우 정우가 공동 연출하고 각본을 맡아 화제를 모으는 작품이다. 또 팬엔터테인먼트는 최근 미디어 캐슬(MEDIA CASTLE)을 자회사로 인수했다. 미디어 캐슬은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스즈메의 문단속]과 [날씨의 아이], [너의 이름은]의 국내 지식재산권을 보유 중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557만 관객을 동원하며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지난해 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을 국내에서 재개봉하기도 했다.
종합 엔터테인먼트사로 성장팬엔터테인먼트가 애니메이션 시장에 주목한 건 콘텐트 지식재산권과 팬덤의 영량력을 확인하면서다.“드라마는 영상 관련 권리는 있지만 콘텐트 지식재산권을 활용해 다른 사업을 진행하려면 초상권 등의 이유로 배우와 협의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합니다. 애니메이션은 감독과 협의하면 다양한 사업을 빠르게 확장할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또 10~20대에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을 경제력을 지닌 40~50대가 되어서도 아끼는 사례를 종종 보곤 합니다. 이 때문에 이 시장에 주목하게 됐고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아쉬웠던 부분을 사업으로 확장해보고자 합니다.”박 대표는 미디어 캐슬 인수를 결정했던 가장 큰 이유가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의 성장성 때문”이라며 “국내에서도 애니메이션 팬덤을 대상으로 팝업스토어 등 부가 사업이 이뤄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드라마 제작사에서 콘텐트 제작사로 변신을 거듭하는 박 대표에게 다양한 아이디어의 원천을 물었다. 박 대표는 “사내 조직원의 신구 조화가 원활하게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우리 회사에는 수십 년 동안 지상파 위주 드라마 제작을 담당해온 직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젠 시장이 달라졌죠. 이런 상황에서 ‘회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하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해야 할 것 같아요. 젊은 세대들은 미국 드라마 등 글로벌 콘텐트를 두루 섭렵했습니다. 젊은 세대 직원들이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고, 우리처럼 지상파를 겪어온 세대의 경험이 뒷받침되면서 기업경영 방향도 조화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팬엔터테인먼트는 인수한 미디어 캐슬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첫 방법으로 2000년대 초반 큰 인기를 끌었던 윤석호 감독의 [겨울연가]를 재편집해 출시할 예정이다. K-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가운데 과거 명작을 발굴해 현대적으로 리마스터링(이전에 존재하던 기록본의 화질이나 음질을 향상하는 작업)하면 국내를 넘어 해외 팬들의 소비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누가 핵심 서사를 선별할 것인가도 큰 관심사인데, 원작 제작진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과거 지상파 방송에서 사랑받았던 명작 드라마를 단순히 재방송하거나 복원하는 것을 넘어서 기술적 혁신과 현대적 감각을 더하는 리마스터링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신작 위주로 소비되는 드라마 시장에서 과거의 명작이 원작자의 손과 기술의 힘을 거쳐 새로운 가치를 지닌 콘텐트로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팬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드라마 다수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기에, 일본 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며 초창기 음반 회사에서 성장했던 경험으로 음반 사업을 확장하고자 합니다. 드라마 제작사에 국한되지 않는 종합 엔터테인먼트사로 성장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여경미 기자 yeo.kyeongmi@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