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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이 만난 아트 인플루언서(15) 발레리나 박세은 

이제 왕관의 무게를 견뎌낼 시간 

사진 김현동 기자
352년 역사의 ‘발레 종가’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에투알’ 자리에 동양인 최초로 착석한 발레리나 박세은은 곧잘 피겨 여제 김연아에 비유되곤 한다. 서구적인 미의 기준이 가장 엄격한 분야에서 동양인으로서 타고난 핸디캡을 극복하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대인배’스러운 안정감도 똑 닮았다. 박세은의 무대를 보면 어린 시절 보물 1호였던 오르골 안에 살던 발레리나 인형이 떠오른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박세은의 고요한 안정감이 특별한 오라(aura)를 뿜으며 주변을 무중력 상태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박세은은 세계 4대 발레 콩쿠르 중 3개(잭슨, 로잔, 바르나)를 석권할 정도로 주니어 시절부터 탁월한 유망주였다. 국내에선 발레계 양대 산맥인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을 비롯해 주요 페스티벌 등에서 늘 주역만 주어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보장된 주역의 자리를 내놓고 ‘발레 종가’의 밑바닥을 밟기로 했다. 2011년 파리오페라발레단 준단원으로 입단해 차곡차곡 계단을 올라 마침내 꼭대기에서 빛나는 ‘별’이 되기까지, 매 순간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10년이었다.

“제가 정말 존경하는 멘토이신 장 기욤 바르 선생님이 너무 좋아해주셔서 진짜 기뻤어요. 프랑스 춤에 대한 고민이 많을 때 큰 도움을 주신 분이거든요. ‘이제 됐다. 더는 증명하지 않아도 돼. 이제 너의 춤을 춰’라는 말씀에 에투알이 됐다는 걸 실감했죠.”

에투알 승급이 김연아의 금메달에 비유되곤 하는데.

금메달과는 달라요. 이력서상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내 춤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이제 내 춤만 추면 되니 자리에 대한 긴장과 욕심은 없지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자리에 올랐으니 책임감을 느끼거든요. 에투알이 되면 내 춤을 추고 내 예술을 해야 되니까요. 더 욕심내서 작품에 임하게 될 것 같아요.

에투알의 조건이라면.

사실 에투알은 타이밍인 것 같아요. 장 기욤 바르가 얘기해줬던 것도 에투알은 정말 타이밍이라는 거였죠. 그냥 잘하면 될 수 있다는 말은 안 했어요. 아무리 잘해도 네가 감독 마음에 없으면 될 수 없고, 주변에 누가 있고 어느 세대에 살고 있고 누가 정년을 맞아 나가느냐 하는 타이밍이 모두 갖춰져야 하니, 네가 에투알이 될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제 타이밍을 기다렸던 것 같아요.

그의 말대로 실력이 뛰어나다고 다 에투알이 되는 건 아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은 매년 말 군무 무용수부터 군무 리더, 솔리스트, 제1무용수까지 공개 오디션으로 승급시험을 치르는데, 수석인 에투알만큼은 빈자리가 생길 때 이사회 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이 수백년 된 전통이다. 엄격한 심사에 의한 서열제도가 무용 수들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콩쿠르의 여왕’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가 열네 살에 발레협회콩쿠르부터 시작해서 온갖 콩쿠르에다 나갔거든요. 심사에 익숙하다 보니 요령을 잘 알아요. 발레단에 처음 왔을 땐 프랑스 애들이 승급심사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길래 이상했는데, 세 번째 심사부터는 저도 너무 힘들더군요. 전에는 나만 잘하면 됐다면, 이제 경쟁자를 아니까요. 다 같이 연습하고 서로 조언도 해주는 선의의 경쟁이긴 하지만, 이번에 안 되면 경쟁자는 점점 늘게 되니 마음이 약해지죠. 2017년 제1무용수 승급 때는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 느꼈고, 안 되면 도전을 접고 솔리스트에 만족하려고 했어요. 더는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주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제도인 건 사실이에요. 모든 사람 앞에서 승진했으니 배역을 줘야 하죠. 만약 단장 눈에만 들면 됐다면 이방인인 제게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고요.”

실제로 왕관을 쓰는 건 오는 9월 시즌 오프닝에 발레학교 학생부터 에투알까지 서열대로 행진하는 ‘데필레’에서다. 새로운 에투알을 맞는 갈라 프로그램도 그에게 바쳐진다. “렌더의 [에튀드]란 작품을 해요. 매일 아침 워밍업하는 클래스를 작품화한 건데, 굉장히 테크닉적이죠. 테크닉에는 마음을 내려놓은 지 오래돼서 부담이 되긴 해요.”

악명 높은 승급 오디션, 공정한 기회의 이면


▎지난 6월 공연된 파리오페라발레단 [로미오와 줄리엣] 중에서. / (C) Ballet de l’Opéra National de Paris
지난해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가 파리 체류 경험자들 사이에서 엄청 화제였다. 글로벌 홍보회사의 파리 주재원이 된 20대 미국 여성이 극도로 보수적이고 까칠한 파리지엥들의 싸늘한 시선과 은근한 괴롭힘 속에 좌충우돌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큰 공감을 산 것이다. 그도 에밀리 못잖게 이방인의 설움을 겪었다.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니 “파리에 그런 사람 꼭 있다”며 즐거워한다. 과장은 있지만 리얼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저도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고 상처도 되게 많이 받았어요. 근데 익숙해지고 보니 오히려 포장되지 않은 순수함인 것 같아요. 싫은 걸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걸 쿨하다고 여기더라고요.(웃음) 저는 동료들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친해졌어요. 일단 들어야 발레단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니까요. 지금 우리끼린 다 사이가 좋은 편이에요. 이번에도 동료들이 너무좋아해줘서 고마웠죠. 에투알 선배들도 전혀 견제하지 않아요. 이미 5년 정도 에투알이 맡는 주역을 경험해왔기 때문에 같이 연습하면서 친해졌죠.”

유럽 살면서 한류 인기를 실감할 것 같은데.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한번은 친한 남자 동료와 얘기하는데 갑자기 ‘마마’ 그러는 거예요. 뭐라고? 되물었더니 ‘폐하’ 이러더군요.(웃음) 드라마 [기황후] 50편을 다 봤다는 거예요. 지난번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할 때도 줄리엣이 친구 6명과 손잡고 나가는 장면이 있는데, 손잡고 나가기 2초 전에 뒤에서 ‘안녕?’ 그러는 거예요.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고 무대에 나갈 수 있었죠. 한국 드라마가 핫해요. 제게 넷플릭스에서 뭐 봐야 되는지 알려달라고 묻고, 엄청 분석을 해가며 열심히 보더라고요.(웃음)

한국에서 굵직한 작품의 주역을 하다가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겠죠.

국립발레단에서도 첫 공연이 백조 주역이었어요. 근데 군무를 거치고 온 사람들 얘기가 흥미롭더군요. 바닥부터 참고 견디고 기다리고, 그러니 더 갈망하게 되고 기회가 왔을 때 더 빛이 난다는, 그런 얘기를 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군무를 거치면 좀 더 깊은 춤을 출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파리에 처음 왔을 때는 무대에 서지도 못하고 뒤에서 누가 다치는 걸 대기하는 입장이었는데, 그때 정말 많이 보고 배웠어요. 바쁠 때는 다른 사람 춤 구경할 시간도 없거든요. 그때 프랑스 춤을 익힌 거 같아서 정말 황금 같은 시간이었어요.

프랑스 춤은 어떻게 다른가요.

공연을 보면 느낌으로 아는데, 설명해도 이해가 잘 안 될 거예요. 프랑스 춤은 특유의 엘레강스함이 있는데, 제가 느끼기에 프랑스 춤의 아름다운 부분은 정적인 동작에서 나오는 오라인 것 같아요. 그게 프랑스 춤에서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춤추기 싫은 적은 없었나요.

춤이 힘든 적은 없었어요. 지금도 아침에 발레단 가는 게 설레고, 이런 설렘을 가질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게 너무 재밌고 감사하죠. 트라우마가 생길 뻔한 적은 있어요. 2016년에 4인무 공연 연습을 하다 얼굴에 큰 사고를 당했거든요. 동료 뒷발에 이마를 채여서 6㎝를 꿰맸는데, 정말 피가 분수처럼 솟아서 주변이 피바다가 될 정도였어요. 멍이 눈 밑까지 내려오고 얼굴이 부어서 코가 없어졌죠. 한 달은 쉬어야 한다는데 그냥 반창고 붙이고 공연을 했어요. 파트너 세 명이 제가 꼭 필요하다고, 같이 공연하고 트라우마 이겨내라고 푸시를 해줬거든요. 스튜디오에 다시 들어가는 순간 소름이 끼쳤지만, 그때 공연을 했기에 이겨낸 것 같아요.

서양인에게 뒤지지 않는 완벽한 피지컬로 유명한데, 콤플렉스도 있나요.

승급 후에 오를리 뒤퐁 감독이 제 장점과 고쳐야 할 점을 일일이 꼽아주셔서 놀랐어요. 일단 장점을 10가지 정도 얘기하는데 충격을 받았죠. 예컨대 제가 연습과 첫공과 막공 갭이 큰데, 그것조차 굉장히 꾸준히 성장하는 무용수라고, 처음부터 잘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노력해서 열심히 하는 게 장점이라고 봐주시는 거예요. 고쳐야 할 점은, 제 콤플렉스를 아는데 그걸 사랑하라고 얘기해주더군요. 사랑하지 않으면 거기에 집착하게 되니까 아예 내가 예쁜 걸 갖고 있다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거예요. 제가 무용수치고 발등 아치가 크지 않은 편이라 그걸 감추려고 하고 스스로를 힘들게 했었거든요. 너는 정말 예쁜 다리를 가졌으니 사랑하라고, 네가 아니면 누가 네 발을 사랑해주겠냐는 말에 생각을 바꿨어요.

트라우마도 파리 동료들 덕에 극복

오페라의 유령이 산다는 파리오페라 극장에 매일 출근하며 살다시피 하기 때문일까. 박세은은 어딘가 요즘 사람 같지 않았다. 드가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발레리나의 이데아 같다. 스스로도 “89년생이지만 옛날 갬성이 좋다”면서 “그 옛날에 고전발레를 췄던 사람들에게 물려받는 전수 과정도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며칠 전에 공연 티켓을 구하러 극장의 한 사무실에 찾아갔는데, 제가 10년 동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로 가야 하더군요. 이런 곳이 있었냐고 했더니 동료가 ‘여기가 유령이 다니는 길’이라는 거예요.(웃음) 그런 곳이라 매일 갈 때마다 신기해요. 19세기를 사는 느낌도 있죠. 식당에 쥐도 잘 다니고요.(웃음)”

가장 어려운 작품은 뭔가요.

[백조의 호수]가 가장 어려워요. 발레 레퍼토리가 다채로운 프랑스에서는 자주 올리지 않거든요. 제가 백조를 딱 네 번 했어요. 그중 세 번을 프랑스에서 했는데 행운이었죠. 39살 에투알이 처음 백조 데뷔하는 일도 있을 정도로 기회가 없거든요. 할수록 조금씩 늘긴 하는데 정말 어려워요. 동물의 움직임을 표현하기도 어렵고, 오데트와 오딜 양쪽을 하는 것도 어렵죠. 정말 저를 고뇌하게 만드는 백조예요.(웃음)

발레단과 내한 공연을 온다면.

꼭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오고 싶어요. 이번 에투알 승급 무대가 된 공연인데, 제가 가장 잘할 수 있고 잘 어울리니까요. 누레예프 안무가 굉장히 디테일한데, 해외 투어를 잘 안 다닌 공연이에요. 이번에도 관광객이 거의 없어서 프랑스인들만 봤는데, 꼭 한국에서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꿈의 파트너라면.

제가 2년 전 [오네긴]을 할 때 파트너를 할 뻔했던 스테판 부이용이란 에투알이에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무용수인데, 그때 사정이 생겨서 파트너가 바뀌었거든요. 정말 착한 사람인데 무대에선 거친 매력을 뽐내서 ‘나쁜 남자’ 오네긴에 잘 어울리는데, 아쉬웠죠. 그분이 내년에 은퇴해서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어요. [오네긴]이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라도 꼭 만나고 싶어요.

2018년 발레계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한 그는 2016년 수상자인 마린스키발레단 김기민과 어린시절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를 비롯해 [돈키호테], [라바야데르] 등에서 찰떡 호흡으로 레전드 무대를 펼친 바 있다. 각각 프랑스와 러시아의 별로 금의환향한 두 사람의 파드되를 언젠가 다시 볼 날도 있을까. “기민이는 너무 세계적 스타가 됐는데, 그 옛날에 제가 배운 것도 많아요. 제가 프랑스 춤과 러시아 춤사이에서 갈등할 때도 기민이와 많이 얘기 나누면서 답을 찾았죠. 무대도 좋지만 그와의 연습과정이 참 좋아서, 다시 함께 춤출 날을 기다립니다.”


※ 유주현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휩쓸던 영광의 기억을 품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살아왔다. 2010년부터 중앙SUNDAY에서 공연을 중심으로 영화, 문학,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을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전달하고자 부단히 글을 쓰고 있다.

202109호 (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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