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선율을 쉽게 만드는 방법 (2) - 회문(回文) 

멋진 선율을 만드는 방법들이 있고, 배울 수 있다. 지난 호에 이어 두 번째 방법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포스터 / 사진:위키피디아
올여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자폐스펙트럼장애 때문에 사회성과 공감 능력 등이 많이 부족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경이로운 기억력을 가진 천재 변호사 우영우는 일상에서 특이한 행동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그녀의 특이한 행동 중에는 재밌는 방식의 자기소개도 있다. “제 이름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역삼역?” 엉뚱한 자기소개에 드라마 속 상대방은 웃거나 황당해한다. 드라마를 보는 이들은 재미와 안쓰러움을 느낀다.

우영우, 토마토 등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같다. 이런 단어 혹은 문장을 회문(回文, palindrome)이라고 한다. 한자와 한글에서 ‘글월 문(文)’은 문자(文字)를 넘어선 문명(文明), 문화(文化)에도 쓰이는데, 이런 점을 고려하면 회문 속 문(文)은 글이나 단어 등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리하여 회문은 의미 없는 문자열과 수열, DNA 염기서열, 날짜 등도 포함한다. 숫자 ‘313’ 혹은 수열 ‘3-1-3’도 회문이며, ‘DAWQWAD’와 같은 무의미한 문자열 역시 그러하다.

회문에서는 띄어쓰기나 문장부호, 대소문자의 차이 등은 무시된다. 엄격한 회문과 유연한 회문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회문을 떠올려보자. 조선의 정치인 ‘조광조’, 스웨덴 팝그룹 ‘ABBA’,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인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이름인 ‘Ada’, 2020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TENET] 등이 있다. ‘다시 합창합시다’ 같은 문장도 회문이며, 무의미한 회문 문장도 만들 수 있다. 영화 [TENET(테넷)]은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시간의 역전을 다루었다. 일본인 중에는 매년 12월 21일을 회문의 날로 부르는 이들이 있다. 유전자 가위로 알려진 유전자 편집 기술 ‘크리스퍼(CRISPR)’는 ‘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의 약자로, ‘주기적으로 분포하는 짧은 회문 구조 반복서열’이란 뜻을 가진 단어들의 앞글자들이다. 여기에서 회문은 DNA 염기서열이 역순으로 배치돼 앞뒤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같은 구조를 의미한다. 생물학은 여러 세균의 유전체에 같은 종류의 회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처럼 회문은 여러 분야에 등장하는 용어인 것 같다.

회문을 이용해 시를 만들어낸 역사는 짧지 않다. 여러 문명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의 문인 김시습(1435~1493)의 ‘춘하추동사절시(春夏秋冬四節詩)’가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회문시다. “紅杏山桃溪寂寂 飛燕乳鶯啼舍北 小塘春草夢依依 暖風香霧鎖城東 東城鎖霧香風暖 依依夢草春塘小 北舍啼鶯乳燕飛 寂寂溪桃山杏紅.” 이 한시를 처음부터 읽는 것을 순독(順讀)이라 하고, 거꾸로 읽는 것을 역독(逆讀)이라 한다. 이 한시의 순독과 역독은 같다. 내용은 좀 다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회문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의 헌정] 중 ‘게 카논(Crab canon)’. 위 성부가 연주되는 동안 아래 성부도 위 악보에서처럼 같이 연주되는데, 아래 성부는 위 성부의 정확한 회문/역행이다. 이 상황을 뫼비우스의 띠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할 수 없는 이 띠의 특성을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는 바흐 음악의 특성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의 대표적 시인 이규보가 쓴 한시 ‘미인원(美人怨)’은 김시습의 시처럼 한문 열의 순서와 관련한 회문시는 아니다. 즉, 역독의 한문 열이 순독의 그것과 정확히 같지 않다. 하지만 이 시도 역독할 수 있고, 그때의 의미가 놀랍게도 순독의 의미와 비슷하다. 이런 점을 고려했는지, 한겨레 기자 안영춘은 ‘미인원’을 맥락적 회문시라고 불렀다(우영우 ‘팰린드롬’의 메타포/안영춘, 한겨레, 2022. 07. 26). 회문시는 동양에서는 중국 진(晋)나라 때부터 유행했다고 한다.

노래 가사 회문도 있다. 그룹 슈퍼주니어가 2007년에 발표한 데뷔 음반 [로꾸거]는 거의 모든 가사에서 회문을 보여준다. “아 많다 많다 많다 많아. 다 이쁜 이쁜 이쁜 이다. 여보게 저기 저게 보여. 여보 안경 안 보여. … 소주 만 병만 주소. 다 이심전심이다. … 아 좋다 좋아. 수박이 박수. 다시 합창합시다. …”

음악의 다른 요소들도 회문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음가(duration), 즉 ‘?→♩→♪→?→?→♪→♩→?’처럼 음 길이의 연쇄도 회문이다. 여기서 화살표(→)가 시간의 방향이다. 이 음가 연쇄를 거꾸로 연주해도, 즉 반대 방향(←)으로 연주해도 같다. 선율의 음들도 회문일 수 있다. ‘도→레→도’의 음열 혹은 선율, ‘도→레→미→레→도’의 선율, ‘도→레→미→솔→미→레→도’의 선율은 모두 회문이다. 음악에서는 회문 대신 ‘역행(retrograde)’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쓴다. 어떤 짧은 선율을 우여곡절 끝에 떠올려서 만들었는데, 이후에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역행을 사용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서양의 고전음악과 현대음악에서 역행을 통한 선율 생성이 많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의 고전주의 작곡가 하이든의 교향곡 47번 3악장 미뉴에트에서 곡이 연주되다가 도돌이표를 통해 한 번 반복하는데, 반복을 마친 후에는 지금까지 연주되었던 곡의 정확한 역행이 연주된다. 이 부분 때문에 이 교향곡 전체를 ‘회문(Palindrome)’이라고도 부르는데, 곡 전체가 회문은 아니니 좀 과장된 별칭인 셈이다.

‘나의 끝은 내 시작’


▎DNA 구조 속 회문들. 회문은 삶의 여러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회문이나 역행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이 사용된 음악을 듣고서 지금 이 순간 역행이 연주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특히 음의 수가 많다면 더 그렇다. 위에서 제시한 세 사례와 달리, 50개 음으로 된 어떤 회문/역행이 있다고 치자. 그것도 ‘도→레→도’처럼 이 자리에서 보여주면 회문/역행임을 알 수는 있을 것이다. 시간은 좀 걸릴 것이다. 그것을 들려주기만 하면? ‘어, 이 선율 회문이네?’ 하면서 파악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하나의 선율 안에 회문/역행이 있다면, 복수의 선율로 구성된 어떤 한 곡에서는 각 선율이 회문일 수 있다. 14세기 프랑스 작곡가 기옴 드 마쇼의 ‘나의 끝은 내 시작(Ma fin est mon commencement)’이라는 3성 합창곡의 한 부분에서는 3성 각각의 회문이 쓰였다. 3개 회문/역행이 동시에 사용됨을 인지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하지만 클래식 작곡가들은 음악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에 거침이 없다.

두 개 선율이 같이 연주되는데,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역행일 수도 있다. 즉, 하나의 선율이 연주되는 순간에 그 선율의 역행도 동시에 연주된다. 대표적 사례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게 카논’이다. 이는 바흐가 쓴 곡 중 가장 난해한 작품인 [음악의 헌정]의 한 곡이다. [음악의 헌정]은 프로이센의 계몽 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만든 주제를 바흐가 이용해 작곡한 대위법적 모음곡인데, 이 중에서 ‘게 카논’은 선율의 본체와 그것의 역행이 동시에 연주되면서도 서로 잘 어울리는 놀라운 음악이다. 카논(canon)은 돌림노래다. 누군가 어떤 선율을 연주하면, 한 마디 뒤에서 다른 이가 같은 선율을 연주한다. 먼저 연주한 이들은 후속 연주자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선율을 완주한다. 게(crab)는 앞으로도 옆으로도, 뒤로도 걷는데, 어떤 이들은 게가 늘 뒤로 걷는다고 잘못 알고 있다. ‘게 카논(Crab canon)’은 이런 오해 때문에 생긴 용어이다. 어떤 선율이 연주되어 끝나는 과정에, 그 선율의 마지막 음부터 연주되어 시작하는 음으로 끝나는 과정이 중첩된다. 이해가 잘 안 된다면, 다음을 생각해보자. 어떤 선율이 ‘도→레→미→파→레→도’를 연주한다. 이 선율이 연주될 때, 이 선율의 역행/회문도 같이 연주된다. 이 선율의 역행/회문은 ‘도→레→파→미→레→도’이다. ‘도→레→미→파→레→도’와 ‘도→레→파→미→레→도’가 같이 연주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각 성부의 세 번째 음들이 붉은색으로 기재된 미와 파이고, 네 번째 음들은 파란색으로 기재된 파와 미이다. 미와 파, 파와 미가 같이 불리면 강한 불협화가 발생한다. 이런 식의 불협화를 피하기가 어렵기에, ‘게 카논’이라는 장르의 곡을 작곡하기가 쉽지 않다. 바흐는 이런 불협화를 피하면서 복잡한 음악을 만들었다.

미국의 물리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에서 “인간이나 인공지능의 의식 등 모든 자기인식(self consciousness)의 뿌리가 무한 순환구조, 재귀준거성에 의한 이상한 고리(strange loop)”라고 주장했다. 이상한 물리학자 호프스태터에 따르면 바흐의 ‘게 카논’은 어떤 선율, 즉 자신과 자신의 변형인 회문/역행이 동시에 연주되는 이상한 고리이자 무한 순환구조의 음악적 사례가 된다. 드라마 속 우영우가 자신의 이름을 회문으로 소개하는 이유가 그의 뇌 속 주체할 수 없는 재귀준거성(recursiveness) 때문은 아닐까.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210호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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