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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일] 다양성과 포용력, 지속적인 성장 

 

노유선 기자
일터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과거 돈벌이 수단이었던 일의 역할이 이제는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행복감의 원천으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저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다양성의 시대, 이를 포용하는 기업만이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열풍에 바통터치하듯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라는 개념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인간은 저마다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 이들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조직과 사회만이 발전의 급류를 탄다는 것이 DEI 이론의 골자다. 2020년 말 등장한 이 이론은 글로벌기업의 비전과 미션을 분석한 결과에서 비롯됐다. 구글과 메타, 아마존, 넷플릭스 등은 공통적으로 다양성(diversity)과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이란 세 가지 가치를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구글은 매년 [다양성 리포트-구글의 다양성과 포용성]이란 보고서를 발간하며 사내 문화를 수시로 점검한다. 다양성과 포용성을 기반으로 공정한 성과를 이끌어내 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꾀하려는 시도다. 메타도 기업 소개 글에 다양성과 포용성을 추구하는 사내 문화를 명시했다. 다양성은 인구학적 차이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인지적 다양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형평성은 기업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출발선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한 ‘공평하고 공정한 체계’를 의미한다. 포용성은 모두가 존중과 지지를 받는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적극성을 뜻한다.

ESG를 누르고 급부상 중인 DEI 이론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에 기반한다. 자영업자든 기업 구성원이든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상호작용을 한다. 인간 집단을 뜻하는 사회(社會)와 영리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會社)는 한자의 앞뒤 순서만 바뀌었을 뿐 둘 다 ‘사람이 모여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서로 다른 가치를 좇는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곳이 바로 회사인 셈이다.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은 저서 『이게 무슨 일이야!』에서 기업의 ‘공동체 정신’, 다시 말해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했다. 김 의장은 저서에서 “‘내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조직 전체가 조금씩 흐트러진다”며 “이 일과 저 일 사이에는 공간이 많다. 그걸 누군가는 계속 메꿔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동체 정신에서 나오는 따뜻함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한국의 모든 기업이 DEI 가치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신입사원 조기 퇴사’ 관련 조사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해 직원 100인 이상 기업 중 신입사원을 채용한 500곳에서 입사 1년도 채 안 돼 퇴사한 신입사원은 81.7%다. 다른 회사에 합격한 경우를 제외하면 조기 퇴사 사유는 직무와 적성 불일치(58%), 대인관계 및 조직 부적응(17.4%), 연봉 불만(14.7%) 순이었다. 한국 사회의 청년 대다수가 일터에서 DEI 가치를 경험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다양한 성향과 적성을 인정하지 않고 따뜻한 포용성은 전무한 데다 결과의 공정성마저 잃어버린 곳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일터인 셈이다.

왜 일터에서 DEI를 찾는가


‘일터’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가트너(Gartner)는 지난 3월 [직원들은 직장에서 개인적인 가치와 목적을 추구한다(Employees Seek Personal Value and Purpose at Work]는 아티클에서 “많은 사람이 일터에서 자기 인식과 가치를 찾는 새로운 감각을 발달시켜왔다”며 이를 “위대한 성찰(Great Reflection)”이라고 명명했다. 가트너는 일의 의미와 역할 변화의 결정적 계기로 코로나19 팬데믹(이하 코로나)을 꼽았다.

코로나 기간 비대면 근무가 확대되면서 개인은 그동안 자신이 일터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했던 방식을 돌아보게 됐다는 설명이다. 사람들은 나 홀로 시간을 보내면서 일터에서의 감정이 인생의 행복으로 이어지는지, 회사에서 사람다운 대우를 받고 있는지, 일을 하면서도 삶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는지 자문하게 됐다.

하지만 일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다는 개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일의 의미와 역할은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에 일은 ‘고통’, ‘슬픔’, ‘자유의 상실’ 등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어로 일·노동을 뜻하는 포노스(ponos)에는 슬픔이란 뜻도 있다. 당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삶을 ‘스콜레(schole·한가로움)’와 ‘아스콜리아(ascholia·쉼 없음)’로 이분화했다. 그리고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 자유의 시간, 스콜레만 ‘테오레인(theorein· 사색)’으로 이어진다고 봤다.


인간 실존을 탐구하는 철학을 숭배하는 시대에 테오레인은 최고의 가치였다. 상대적으로 아스콜리아는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일을 저급하게 보는 관점은 중세 시대 초중반까지 계속됐다. 봉건사회에서 농노는 노동을 착취당하는 대상이었다. 오늘날 독일어로 노동을 뜻하는 아르바이트(arbeit)는 원래 중세 시대 농노의 고난을 뜻하는 단어였다. 사색적 삶(vita contemplativa)은 활동적인 삶(vita activa)보다 우선시됐다.

16세기부터 일·노동의 위상은 사색·관조와 엇비슷해지기 시작했다. 1516년 영국 정치가이자 인문학자인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소설 『유토피아』에서 신분 차별 없이 모든 계급이 일하는 세상을 표현했다. 이후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프랑스의 장 칼뱅(Jean Calvin)의 주도하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일의 가치는 신학적 의미와 함께 격상됐다. 루터는 베루프(beruf·직업, 일)를 인간을 향한 신의 부름이라고 여겼다. 직업적 성공은 곧 구원의 징표였고 소위 ‘천직’이란 개념도 이때 등장했다.

종교개혁이 낳은 프로테스탄티즘과 금욕주의는 18세기 세속화를 거쳐 근대 자본주의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근면, 검소, 금욕의 증거는 축적이고 축적의 결과는 자본의 형성으로 직결됐다는 논리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세속적 금욕주의에 대해 “전통주의적 경제윤리로부터 재화 획득을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이윤 추구를 신의 뜻으로 간주함으로써 과거의 질곡을 분쇄할 수 있었다”며 ‘자본주의 발전의 촉매제’였다고 주장했다.

이후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만남은 일의 의미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중세 시대 길드(수공업)는 두 차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수공업 공장에서 기계식 대규모 공장으로 바뀌었다. 독일어 industrie(산업)은 라틴어 industria(근면성·부지런함)에서 파생된 단어로, 기계식 공장 내 인간의 노동을 근면 성실함의 상징으로 여겼다. 하지만 기계의 박자에 맞추는 노동은 인간이 일에서 소외된 채 하나의 부품으로 취급되는 병폐를 낳았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이를 두고 “오직 일만 하는 어리석음”이라고 일갈했다.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자 20세기 중후반부터 ‘인간 중심 경영론’과 ‘더 나은 자본주의’가 힘을 받기 시작했다. 1962년 월마트를 창업한 샘 월튼(Sam Walton)은 “직원들이 행복하면 고객도 행복하다”며 “직원이 고객을 잘 대하면 고객은 다시 찾아올 것이고, 바로 이것이 사업 수익의 진정한 원천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른바 ‘행복 경영론’은 전 세계에 퍼져 수많은 기업이 이를 반영해 CHO(Chief Happiness Officer·최고행복책임자)란 직책을 만들었다.

기존 자본주의의 폐단을 지적하는 학계의 움직임도 일었다. 1953년 미국 그린넬대학의 하워드 R. 보엔(Howard R. Bowen) 교수는 『비즈니스맨의 사회적 책임』에서 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이 빠르게 증가함에 따라 사회적 책임(CSR)도 막중하다고 설파했다. 그는 저서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기업인이 기업 정책을 만들거나 의사결정을 내릴 때 사회의 목표와 가치 측면에서 바람직한 행동인지 고려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에 대한 관점의 양극화


“더는 할 일이 없어진다면 인간은 괴로움에 빠지거나 죽고 말 것이다.”

18세기 독일의 법률가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의 주장이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통할까. 파이어족(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라는 신조어가 각광받고 신입사원의 조기 퇴사율이 80%에 달하는 대퇴사의 시대다. 최근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는 전국 만 19~59세 급여소득자 1000명을 대상으로 ‘직장생활 평가·파이어족 관련 인식 조사’를 실시해 20~40대 응답자 중 61.5%가 50세 이전 은퇴를 희망한다는 결과를 밝혔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퇴사율만큼 구직희망률도 높은 편이다.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지난해 구직건수는 415만 건, 취업건수는 142만8000여 건을 기록했다. 인생 2모작을 꿈꾸는 5060세대의 구직활동이 증가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파이어족과 구직희망자가 동시에 늘어나는 이율배반적인 사회.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양극단으로 달리고 있다. 빅데이터 분석업체 바이브컴퍼니 산하 소셜분석센터 썸트렌드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사회 구성원 48.5%는 일에 대해 긍정적이며 47.6%는 부정적이다. 6월 16일 기준, 지난 한 달간 뉴스와 소셜미디어에 언급된 일에 대한 감정어를 분석한 결과(sentiment analysis)다. 이들에게 일은 행복과 스트레스를 동시에, 그것도 비슷한 비율로 주는 대상이다. 일에 대한 감정어 지도(word map)에서 ‘좋다’, ‘행복하다’, ‘도움’ 등 긍정적인 단어는 ‘힘들다’, ‘어렵다’, ‘스트레스’ 등 부정적인 단어와 섞여 있었다. ‘가능하다’와 같은 중립어는 3.9%를 차지하는 등 일에 대한 관점의 양극화 현상은 상당했다.

그렇다면 긍정 48.5%를 두고 ‘벌써 물이 반이나 찼다’며 자화자찬해도 될 것인가.

일에 대한 부정적 관점이 중립을 넘어 긍정이 되게 하는 작업은 한국 사회에 주어진 시급한 과제 중 하나다. 이에 경영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국내 CEO 10명에게 ‘일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저마다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다른 만큼 일의 의미도 다양했다.

이정헌 넥슨코리아 대표는 일과 회사, 자아를 동일시하며 강한 주인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일에 대한 책임의식과 에너지가 내가 일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용균 알스퀘어 대표도 “나와 인연을 맺은 고객과 직원에 대한 책임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배경훈 LG AI연구원 원장은 “개인적 성장이 회사 전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라고 답했다.

이원주 커니코리아 대표와 민정상 이모티브 대표는 공동체적 가치를 중요시했다. 이 대표는 “주변 사람에게 모범이 되는 것이 일하는 보람”이라고 했고, 민 대표는 “동료와 함께 꿈을 이뤄가는 여정에서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이 가장 귀하다”고 말했다. 사회공헌적 가치를 강조한 CEO로는 손부한 세일즈포스 코리아 대표와 이국경 글로지 대표가 있었다. 손 대표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일에 대한 열정은 지치지 않는다”고 했고, 이 대표는 “세상의 변화에 그림자처럼 일조한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조민희 알리콘 대표와 조성우 의식주컴퍼니 대표에게 일이란 ‘나다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조민희 대표는 “자아실현이 가능한 일은 곧 삶이나 마찬가지”라고 힘주어 말했고, 조성우 대표는 “일은 내가 삶에서 최우선 가치로 꼽는 사명감을 경험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이지선 신성이엔지 대표에게 일은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었다.

경기 변동성이 점점 커지고 있어 변화무쌍한 경제 상황을 예측하기란 녹록지 않다. 게다가 인간만큼 똑똑한 인공지능(AI) 기술이 여러 일자리를 잠식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인간과 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내다보기 위해 현직에서 활동 중인 기업인과 경영컨설턴트를 찾았다. 일의 의미라는 추상적 개념을 현대사회 속 경영인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풀어내본다.

-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

202307호 (202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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