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PJ살롱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10) 

프랭크퍼트로 가는 길 

버번과 켄터키 사람들의 자유를 찾아 떠난 열 번째 위스키 여행.

▎현대 버번 역사에서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리는 버팔로 트레이스 증류소.
지난 10여 년간 수많은 증류소를 다녔고 어느 하나 내게 특별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세상에 나쁜 위스키란 없다. 다만 좋은 위스키와 더 좋은 위스키만 있을 뿐(There are no bad whisky, there’re only good whisky and better whisky)”이라는 스코틀랜드 속담이 있지만, 객관적이고 간결한 수사로 유명한 추리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위스키에 관해 이런 글을 남겼다. “세상에 나쁜 위스키란 없다. 그저 다른 위스키보다 좀 맛이 없는 위스키가 있을 뿐(There is no bad whisky, there are only some whiskies that aren’t as good as others).”

사실 지금 같은 위스키 광풍의 시대에 지나치게 위스키, 그것도 스카치만 떠받드는 것이 사실 조금 불편했으니까, 나는 솔직하게 챈들러에게 한 표를 던진다. 그의 작풍인 하드보일드, 즉 달걀을 완숙으로 삶아버린 듯한 문체로 다른 해석의 여지를 두지 않고 담백하게 팩트만 전달하는 스타일은 뭔가 복합적인 위스키의 맛이나 가치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위스키에 관한 그 표현만은 내 생각과 동일하다.

켄터키 버번 트레일의 종착지, 프랭크퍼트


▎가장 전통적인 버번으로 손꼽히는 버팔로 트레이스 위스키. 켄터키주의 주도, 프랭크퍼트에 위치한 버팔로 트레이스 증류소에서 생산된다.
켄터키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예전부터 켄터키의 주도였지만 지금은 렉싱턴과 루이빌 사이에 낀 소도시가 되어버린 프랭크퍼트와 그곳을 가는 길에 있는 증류소들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마지막 목적지인 프랭크퍼트에는 버팔로 트레이스 증류소가 있는데, 유명한 칵테일의 이름이자 주류 회사인 사제락(Sazerac)사가 소유한 곳이라 방문객들은 버팔로 트레이스 외에도 사제락이 가진 모든 버번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유명한 이글 레어(Eagle Rare)나 블랑톤(Blanton’s), 코로넬 E.H. 테일러(Colonel E.H. Taylor), 웰러 (Weller) 같은 유서 깊고 풍미를 갖춘 멋진 버번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T. Stagg, Pappy Van Winkle, Old Rip Van Winkle 등 한 병에 수천, 수만 달러를 호가하는 엄청난 하이엔드 버번을 보유한 사제락의 무한한 라인업을 모두 둘러보기 위해, 그날 아침 일찍 자동차를 몰고 루이빌 다운타운에서 출발했다.

날씨가 좋아 켄터키의 푸르고 높은 하늘과 끝없이 이어지는 켄터키 블루글래스, 더 푸른 옥수수 밭을 따라 달리는 마음도 무척 가벼웠다. 켄터키의 태양을 막아줄 두툼한 오클리 선글라스를 낀 후, 어제 자동차 배터리 방전으로 고생한 벨맨에게 시원하게 10달러를 팁으로 주고 소나타의 시동을 켰다. 프랭크퍼트로 가는 길은 루이빌에서 동쪽으로 렉싱턴을 향해 달려가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64번이었다. 미국에서는 꽤 오랜만에 운전을 하는지라 햇병아리 시절의 예전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복학생 시절인 88올림픽 때 운전면허를 취득했지만 실제로 운전은 못 해본 장롱면허라, 제대로 된 첫 운전은 신입사원 시절 미국 IBM으로 1년 동안 파견을 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좌충우돌하며 셀프로 익혔다. 1994년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였고, 한국도 사상 최고로 뜨거웠던 여름, 김일성이 죽었던 그해 스물일곱의 나는 노스캐롤라이나의 한적한 시골에서 미국의 도로 시스템과 각종 운전 노하우를 그야말로 몸으로 때우면서 배웠다.


▎프랭크퍼트로 가는 길에 만난 그림 같은 풍광의 바즈타운 버번 컴퍼니.
i64 하이웨이를 타고 동쪽으로 달리다 보니 심프슨 빌을 지나 셸비빌이 나오고 이제 곧 목적지인 프랭크퍼트가 나오겠구나 생각한 순간 익숙한 사인 보드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바로 불렛(Bulleit) 증류소였다. 꼭 가고 싶었던 곳 중 하나라 엑시트를 지나치기 직전 순간적으로 판단하여 그만 셸비빌로 나와버렸다. 뭐 여행이란 게 이런 변수도 있어야 제맛이지 하면서 꼬불꼬불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마침 시간 여유도 있으니 잠깐 보고만 가야지 하면서 도착한 불렛 증류소에는 스쿨버스 모양의 방문객용 차량이 확 눈에 띄었고 물을 뿌리고 비질을 하며 오픈을 준비하는 직원들이 분주해 보였다. 바깥에서 사진을 몇 장 찍다가 증류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안 된다고 했다. 오픈 시간이 11시라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11시 30분까지는 프랭크퍼트의 버팔로트레이스 증류소 관계자가 예약해준 레스토랑으로 가야 하기에 아쉽지만 외관 사진만 몇 장 더 찍고 돌아서 나왔다.


▎버팔로 트레이스에 가기 전에 들른 Barton 1792 증류소. 버번 위스키 Barton 1792가 사제락에 인수된 이후에도 여전히 켄터키 바즈타운에서 생산하고 있다.
어째 오늘도 시작이 약간 불안하다 싶었는데, 라임워터라는 작고 예쁜 시골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예약이 안 되어 있다고 했다. 사실 점심 예약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증류소에서 굳이 예약해주겠다고 해서 일정을 쪼개서 왔고, 미국 도착 전부터 계속 여기서부터 증류소까지는 어떻게 이동할 거냐 등등 세심하게 배려해주어 모든게 물 흐르듯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불렛 증류소나 제대로 좀 보고 나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빈 자리가 있어 미국 중부의 평범한 일요일 아침, 햇살 좋은 동네 브런치 식당의 불청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날 내가 겪은 미국식 호스피탈리티의 경험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라임워터는 동네 주민들과 가족들이 일요일에 교회를 다녀와서 브런치를 먹는 평범한 동네 맛집인 셈이다. 주변엔 은퇴한 노부부 커플, 할머니부터 손녀딸까지 대가족, 내 또래의 중년 커플이 앉아 있었고, 밝은 햇살이 비치는 창과 달그락거리는 식기와 청아한 유리컵 소리가 높은 천장으로 울려 퍼져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예약은 안 되어 있었지만 결국 맛있게 버번 버거로 점심을 먹었고 칵테일도 한 잔 마셨다. 예외 없이 모두가 백인인 손님들을 보면서 어쩐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동안 들른 버번 증류소에서도 유색인종은 나뿐이었고, 어쩌다 동양인이 한두 명 더 있는 정도라서 그들만의 암묵적인 룰이 있는 것인지, 인종주의적 미국사회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아 조금 씁쓸했다.


▎켄터키주에서 유일하게 스페인 양식으로 지어진 포 로지스 증류소. 일본의 기린사가 소유하고 있다.
미국식 호스피탈리티를 제대로 경험하다

버팔로 트레이스 증류소에 도착해서 내 이름을 말하니 예약된 고객이라 따로 안내를 해주었고 접수대 직원에게 여권을 맡겼더니 한국 여권을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하지만 나는 예약된 투어의 내용을 보고 조금 더 놀랐다. 증류소에 특별히 부탁해 조금 더 심도 있는 레벨의 투어와 시음이 예약된 줄 알았는데, 그저 증류소를 한 바퀴 돌아보는 관광객용 10달러짜리 투어였다. 여하튼 입구에서 알려준 대로 가이드인 레이(Rae)를 찾아서 로비로 들어가니, 인상 좋은 미국 아주머니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내가 이름을 말하니 살짝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내 다른 관광객 10여 명을 차례로 호명하며 즐거운 증류소 투어가 시작되었다.

모두에 말한 대로 사제락은 아주 큰 주류 기업이고 소유한 브랜드가 무척 많아 관광객들에게 전부 다 설명할 수도 없을 텐데 어떤 식으로 투어를 진행할지 사실 좀 많이 궁금했다. 예상과 달리 일반적인 위스키 증류소에서 진행하는 증류 과정이나 공정에 대한 소개는 별로 없고, 각각의 유서 깊은 건물들을 따라서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이렇게 훌륭한 버번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나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에 레이가 켄터키 사투리로 빠르게 말하는 내용을 전부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각 건물의 역사를 설명하며 모든 투어 참가자를 골고루 배려해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특히 유일한 동양인인 내가 특이해 보였는지 계속 내게 질문을 던지고 내가 곧잘 대답을 하니 더더욱 깊은 질문을 해서 살짝 곤란하기도 했다. 투어의 마지막 순서인 시음장에서도 역시 내게 클로징 소감을 물었고, 나도 인생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이곳 켄터키 증류소까지 와서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했다. 이윽고 레이가 뭔가를 쓱 내미는데 살펴보니 이곳의 마스터 디스틸러의 친필 사인이 적힌 버번이었다. 나 같은 위스키 마니아에겐 마스터의 사인이 들어간 보틀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며 선물을 살펴보니 이곳의 주력 제품인 이글레어 버번이다. 그제야 오늘 일어난 모든 과정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미국식 호스피탈리티인 것이다.

혼선이 있긴 했지만 도시에서 보기 힘든 레스토랑을 예약해준 것 자체가 큰 환대였고, 10달러 짜리 관광객용 투어 프로그램이었지만 노련한 가이드가 계속 나를 케어하도록 끊임없이 질문과 관심을 표명해준 것이 그들로서는 최고의 환대였던 것이다. 마지막엔 ‘츤데레’처럼 마스터의 사인이 들어간 보틀을 툭 건네는 켄터키와 이 버번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멋진 이글레어 버번 두 병 중 하나는 귀국 후 대학 은사님께 선물로 드렸고, 남은 한 병을 언제 어떤 사람들과 오픈할지가 나의 즐거운 고민이다.

나는 해외여행 시 한식 금단 증상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비교적 덜한 편이라 자부하는데, 그래도 나이가 들수록 그 면역력이 조금씩 떨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루이빌에서도 한식을 한번 먹기로 마음먹고 시내에 있는 한 한식집으로 향했다. 한류의 영향으로 루이빌 주택가에 있는 한식당인데도 현지인들의 예약이 이미 가득 차 예약이 쉽지 않았지만, 전화로 한국인인데 한 자리 부탁한다고 하니 특별히 예약을 받아주었다. 분명 루이빌 시내인데도 이 동네는 시골스런 마을 풍광과 여피족들이 선호할만한 근사한 레스토랑과 숍들로 가득 찼고, 이름만 듣고 가보고 싶었던 바도 많았다. 미국 쇠고기로 푸짐하게 차린 한식을 먹었는데, 루이빌 한식당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서는 서울 강남의 저녁 풍경을 계속 유튜브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켄터키의 한적한 도시인 이곳에서도 한류의 영향이 커서 한국인보다 더 많은 다양한 고객이 한식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사실 문화 소비에는 정답이 없다. ‘오센틱’하다는 것이 반드시 정답이 아닌 것을 알기에 그들의 젓가락질, 먹는 방법, 먹는 순서 등이 우리의 전통 방식과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그저 조용히 지켜보았다. 우리가 버번이나 위스키를 마실 때도 반대의 경우를 상상할 수 있겠다.


▎버팔로 트레이스 증류소 한쪽에 보관되어 있는 위스키를 숙성하는 오크통들.
맛있는 쇠고기도 실컷 먹은 터라 살짝 한잔 더 하고 싶었지만 운전을 해서 왔기에 자제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나라의 술병에 적힌 음주 경고와 비교하면 미국이나 영국의 음주 경고는 좀 더 직설적이다. 여기서도 우리와 그들, 영국과 미국 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영국은 조금 우아하게 ‘Drink Responsibly(책임질 수 있을 만큼만 마셔라)’인데 반해 미국은 직설적으로 ‘Know Your Limits(너의 한계를 알고 마셔라)’로 차이는 있지만, 우리의 문어체적인 음주 경고보다는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니 오늘은 나의 한계를 자각하고 이쯤에서 마무리해야겠다.

사실 ‘Know My Limits’를 되새기면 내 주량 이외에도 나의 분수, 나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나면 그다음 단계인 Know Yourself(너 자신을 알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모두가 바로 소크라테스가 될 수는 없으니 그전에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훨씬 높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내 주량은 위스키 세 잔!

※ 박병진 - 30여 년간 IBM, SAP, SK 등 국내 및 외국계 기업,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망라하여 임원 및 CEO로서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최근에는 포브스를 포함한 각종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는 위스키 칼럼니스트이자 동아일보사의 최고위과정인 ‘광화문살롱’의 주임 교수로서 위스키를 주제로 MZ세대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소통의 지혜를 나누고 있다. 더불어, 요리서적 전문 출판사인 ‘북스 레브쿠헨’의 대표로서 이 시대의 대표적인 N잡러이다.

202312호 (20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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