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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섭 엘앤피코스메틱 회장 

세상에 없던 K-뷰티 혁신 

장진원 기자
엘앤피코스메틱이 2009년부터 선보인 마스크팩은 그전까지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은 품목이었다. 화장품을 사면 끼워주는 샘플 대신 고급 마스크팩의 성공을 확신한 이는 권오섭 회장이다. 2017년 사드 사태 이후 이어진 중국 시장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마스크팩 브랜드 ‘메디힐’은 기존에 없던 카테고리를 화장품업계 최고 인기 품목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성공했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이어온 ‘화장품쟁이’의 뚝심이 그 발판이 됐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수출액은 284억7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글로벌 경기 둔화 속에서도 전년 동기 대비 5.9% 성장한 수치다. 3분기 기준으로만 놓고 보면 역대 최대 수출액이다. 중기부는 “중소기업 주력 품목의 글로벌 수요 확대, 수출국 다변화 등이 이뤄지고 있다”며 “2023년 4분기 이후 분기별 수출액 증가율 상승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수출 증가세를 주도한 일등 공신은 어떤 품목이었을까. 바로 화장품이다. 지난해 3분기 화장품 품목의 수출액은 17억 달러를 기록했다. 전체 중소기업 수출 품목 중 6% 비중으로 1위에 올랐다. 이어 자동차(5.1%), 플라스틱 제품(4.4%), 자동차부품(3.8%), 반도체 제조용 장비(3.8%), 합성수지(2.9%), 반도체(2.4%) 등이 뒤를 따랐다. 반도체, 자동차, 중화학 등 대기업이 주도하는 주력 품목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특히 중소기업의 화장품 수출은 미국 시장에서 두드러졌는데, 2024년 3분기 기준으로 미국 지역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25%나 늘었다.

‘K-뷰티’로 통하는 한국 화장품산업이 수출 효자 품목으로 활약하고 있지만, 업계에선 지난 2016년을 K-뷰티의 절정기로 보는 분석이 많다. 아시아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K-팝, K-드라마에 이어 또 다른 한류 주역으로 활약했던 시절이다.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우상향 곡선을 그리던 K-뷰티가 위기를 맞은 건 2017년 들어서였다.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사드)가 경북 성주에 배치되자 중국의 강력한 반발과 보복 조치가 이어졌다. 이른바 ‘한한령(限韓令)’이다. 가장 먼저 중국인 관광객 숫자, 즉 시장 수요가 급감했다. 보따리로 물건을 싹쓸이하던 풍경도 사라졌다. 중국 현지에 진출한 기업들도 큰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였고, 연이어 터진 코로나19 팬데믹은 업계에 더 큰 한숨을 몰고 왔다.

주춤했던 K-뷰티의 반등이 시작된 건 2022년 들어서다. 중국 시장의 불안정성을 피해 수출국 다변화에 나선 것이 주효했다. 중소기업 수출 방식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온라인 수출의 경우 미국이 최대 수출국인데, 지난해 3분기 화장품의 미국 시장 수출은 전년 대비 125% 증가했다. 같은 기간 네덜란드 수출은 262%나 늘었다. 중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 벗어나 미국, 유럽, 중동 등으로 K-뷰티 수출국이 다변화된 결과다.

사드 사태 이후 8년여간 이어진 한국 화장품산업의 침체는 마스크팩 브랜드 ‘메디힐’로 잘 알려진 엘앤피코스메틱(이하 엘앤피)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009년 설립한 엘앤피는 이전까지 ‘끼워주기용 샘플’이었던 마스크팩을 고급화해 시장에 내놓으며 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창업 첫해 15억원이었던 매출액은 2011년 들어 93억원으로 늘더니 2016년에는 4015억원으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사드 배치와 중국의 한한령이 본격화된 이후 매출도 쪼그라들기 시작해 2020년에는 2241억원까지 감소했다. 이후 조금씩 실적 회복세를 이어간 엘앤피는 2023년 들어 2817억원까지 매출 규모를 늘렸다.

센세이셔널한 아이템 선정과 창업, 연이은 중국 시장에서의 대박, 반전급 실적 급감과 시장 회복. 8년여간 이어진 롤러코스터 상황에 정신이 혼미해질 법도 했지만, 창업주 권오섭 회장은 “3년 안에 1조원 매출을 이뤄내겠다”며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1992년 네슈라 화장품 입사 이래 30년 넘는 세월 동안 다져온 ‘화장품쟁이’의 다부짐이다.

“메디힐 브랜드만으로 3년 내 1조원 매출을 이뤄보려 합니다. 고객이 만족하는 화장품은 망하지 않는다. 그게 30년 화장품쟁이의 지론이에요. 모든 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더군요.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화장품 기업은 품질, 즉 기본에 충실한 회사들이란 공통점이 있어요. 명품은 비싼 게 아니라 잘 팔리는 제품입니다. 메디힐이 바로 그렇죠.”

‘3년 내 1조원 매출’ 다시 도전


권 회장은 국내 화장품업계를 대표하는 2세 기업가 중 한 명이다. 1969년 모친인 유임순 창업주가 서울 금호동에 세운 왕생화학이 가업의 시작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1.5세대가 맞다. 어머니 회사를 물려받은 게 아니라, 독립해 창업한 케이스”라는 게 권 회장의 설명이다.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교사로 일하시던 어머니가 사업가로 변신한 건 순전히 삼 남매를 키우기 위해서였죠. 자식들 대학 보내고 유학도 시키느라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당연히 어머니 덕에 화장품을 알게 됐는데, 제가 가업을 잇는 건 원치 않으셨어요. 화장품이, 또 사업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아셨기 때문이죠. 대학에선 지질학을 전공해 박사까지 마쳤습니다. 어머니는 작은아들이 교수가 되는 걸 보고 싶어 하셨어요.”

모친 입장에선 오롯이 생계를 위해 뛰어든 사업이었지만, 권 회장은 공장 옆 작은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옛 추억을 잊을 수 없다고 돌이켰다. 자신도 모르게 온몸 구석구석에 뱄던 화장품 향기는 그의 사업가적 기질과 맞물렸고, 결국 전공을 살리는 대신 화장품 회사 취업으로 인생의 방향키를 돌렸다. 모친인 유임순 창업주는 이미 1987년 들어 사업을 정리한 터였다. 1992년 권 회장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네슈라화장품은 왕생화학의 후신이었지만, 이미 경영진이 바뀐 지 오래였다.

“‘너 뭐 할래?’ 네슈라에 입사해 회장님께 들었던 첫마디입니다. 말만 창업주 아들이었지, 화장품의 ‘화’ 자도 몰랐으니까요. 당장 공장으로 발령받아 ‘미쓰꾸리(포장의 일본식 표현)’부터 배웠습니다. 화장품에 대한 책도 받아 공부도 시작했고요. 화장품이란 물건이 뭔지 처음부터 배워나간 거죠. 미국 유학을 다녀온 덕에 무역부 차장으로 배치받았는데, 이후 부장, 이사, 상무를 거쳐 1년 뒤엔 계열사 사장이 됐습니다. 전 창업주 가족에 대한 배려도 있었겠지만, 네슈라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죠.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업에 나선 건 1996년 들어서였다. 주식시장에서 잘나가는 기업처럼 성공하겠다는 포부를 담아 상호를 코스피클럽으로 정했다. 출발 당시 업종은 제조가 아닌 유통으로 정했다. 네슈라 정도 기업을 만든다 해도, 아모레퍼시픽 같은 대기업이 있는 한 한국 시장에서 1등 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전국에 깔린 화장품 대리점은 2만여 개에 달했다. 같은 회사 제품만 모아놓은 브랜드숍 대신 ‘프랜차이즈’로 승부를 보자는 전략을 짰다. 최근 화장품 유통 시장의 갑으로 떠오른 ‘올리브영’의 원조쯤 되는 아이디어였다.

“2만 개가 넘는 매장이 그야말로 천편일률이었어요. 회사는 행여 직원들이 돈 빼먹을까 믿지 못하고, 직원들은 그들대로 고된 노동에 시달렸죠.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1~2년 정도 준비해서 자체 포스(POS) 시스템을 개발했어요. 돈 버는 것도 좋지만 그때까지와는 다른 업무 혁신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바코드 시스템도 처음 도입했죠. 당시만 해도 ‘뭐 하는 짓인진 모르겠다’, 심지어 ‘미친 거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습니다.”

틀을 깬 혁신은 곧 시장 반응으로 결과를 증명했다. 명동 신세계백화점에서 남대문시장으로 가는 대로변에 권리금 6억원을 주고 첫 매장을 냈다. 3교대로 근무하며 24시간 문을 열었다. 2년여가 채 되지 않은 시점에 흑자로 돌아섰고, 직영 매장 6개, 프랜차이즈 매장 12개까지 총 18개 매장을 새로 열었다. 멋들어진 대형 매장에 물건을 납품하지 않을 기업은 없었다. 국내 내로라 하는 화장품 제조사들이 너도나도 코스피클럽에 입점하려고 권 회장을 찾았다.

“서울 주요 지점을 비롯해 부산, 대구 등에 매장을 열었습니다. 매장이 크고 좋으니 대형 메이커 제품이 다 입점됐어요. 또 하나 재밌는 게 데이터 판매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국내 대리점망은 그날 얼마 팔았나 정도만 파악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포스 시스템을 갖추지 않았습니까. 개별 매장의 매출은 물론이거니와 지역별로 인기 있는 제품이 뭔지, 브랜드별 판매량이 어떤지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죠. 대형 제조사들에는 따로 이런 데이터를 판매해 수익을 얻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빅데이터죠. 데이터 판매비를 물건으로 받기도 했는데, 제조사 입장에선 현금 대신 물건 주고 데이터까지 받을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망한 사업에서 대박 아이템을 찾다


30대 젊은 기업가의 맹활약에 업계의 관심이 쏟아진 것도 잠시, 으레 그렇듯 위기는 예기치 못하게 찾아왔다. 창업 직후 터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였다. 권 회장은 “처음엔 IMF가 뭔지도 몰랐다”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국가 부도’라는 말이 뉴스에 등장하면서 사람들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금붙이를 내놓기 시작했다. 내 재산을 내놓은 판에 화장품이 언감생심임은 당연했다. 나라의 운명처럼 코스피클럽의 매출도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만큼 뚝뚝 떨어졌다.

“어머니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살다가 난생처음 작은 전세 아파트를 얻어 살게 됐습니다. 방배동 넓은 아파트에 살던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아빠, 나 학원 다녀도 돼?’라고 묻더군요. 평생 가슴에 남은 말이 됐어요. 다 정리하고 나서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화장품 본토에서 제대로 배워보자고 맘먹었죠.”

3년여가 지나 2001년에 귀국한 권 회장은 당시 차밍코리아 전무로 입사하며 다시 화장품업계에 발을 들였다. 전국 60여 개 대리점을 총괄 관리하는 임무였다. 업무 능력을 알아본 대리점 사장들로부터 ‘권 전무가 직접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쏟아졌고, 마침 회사도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였다. 권 회장은 남은 자산과 투자자들의 도움을 받아 차밍코리아 인수에 나섰다. 2003년 들어 코스라인으로 사명도 바꿨다.

“미국은 화장품 전용 숍보다는 잡화점 개념이 강합니다. 뷰티서플라이라는 유명 잡화 체인에서 착안해 두 번째 창업에 나섰죠. 제조 설비 없이 위탁생산(OEM)으로 제품을 만들어서 대리점에 팔고 수출도 했습니다. 정말 원 없이 제품을 만들었어요. 저가 색조화장품 위주였는데, 1000원짜리 매니큐어만 해도 수백 가지에 달했습니다. 심지어 속눈썹까지 만들어 팔았죠. 그야말로 잡화였어요.”

권 회장은 첫 사업은 완전한 실패, 두 번째 코스라인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라고 말했다. 유통이면 유통, 제조면 제조 어느 것 하나 업계를 이끄는 일류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코스라인의 실패는 현재 엘엔피와 메디힐의 성공을 위한 시행착오이자 발판이 됐다.

코스라인 사업을 접기 직전, 권 회장은 한방 마스크팩을 개발해 내놓았다. 당시만 해도 마스크팩은 본 제품을 사면 끼워주는 샘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000원에 5장씩 팔리던 싸구려 품목을 1장에 2000원을 받고 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권오섭이 드디어 미쳤다’고 수군댔지만 이내 한 달에 20만 장이 팔리는 효자 품목이 됐다. ‘마스크팩의 고급화’라는 독창적 아이디어가 빛을 본 순간이었다.

“2009년 엘앤피를 세우면서 마스크팩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시트 마스크 하나로 복잡한 피부 케어 과정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현대 여성들이 좀 바쁩니까. 빠르고 효과도 좋다면 마스크팩의 고급화가 먹힐 거라 확신했죠.”

처음엔 유명 피부과와 컬래버레이션하는 전략을 짰다. 브랜드 밸류가 없는 신생 업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피부과와 협업해 ‘리더스 끌리니에’라는 브랜드로 론칭했다. 1장에 2000원을 넘어 3000원, 7000원짜리 제품을 연이어 내놨다. 권 회장은 “‘계속 망해나가더니 드디어 제대로 미쳤다’는 비웃음에 ‘그래, 나 미쳤다’고 되뇌며 이를 악물었다”고 회고했다. 병원과의 협업은 뜻하지 않은 판로 개척의 발판이 됐다. 약국이다. 약국 유통 시스템과 화장품 유통은 완전히 달랐다. 피부과를 등에 업은 덕에 처음부터 화장품 대리점이 아닌 약국 판매에 집중했다.

“한 달에 1억원만 팔려도 좋겠다 싶었어요. 리먼브라더스발 금융위기가 터진 이듬해였는데도 2009년 15억원 매출을 올렸습니다. 2011년엔 93억원으로 뛰어올랐어요. 약국에서 파는 제품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고급 화장품이라는 이미지도 얻었습니다. 올리브영에서 먼저 입점 제안이 오더군요.”

창업 당시 권 회장을 포함해 4명뿐이던 직원도 2010년 들어 20명으로 늘었다. 코스라인 시절 동고동락했던 직원들도 다시 합류했다. 당시 “봉급 올려주지 않아도 좋으니, 제 날짜에만 받게 해달라”고 말하던 직원의 절절함은 지금도 권 회장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의 원천이다. 권 회장은 2013년 들어 피부과와 협업을 종료했다. 독자적인 시장 개척에 자신감이 생기자 내놓은 브랜드가 지금의 ‘메디힐’이다. MB 정부 시절 중국과 관계가 경색되면서 한국산 제품 판매가 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메디힐은 ‘없어서 못 파는’ 상품이 됐다. 매출이 100억원, 500억원, 1000억원을 넘더니 2016년 들어 4000억원을 넘기며 메가 히트 상품이 됐다. 그사이 샘플 취급을 받던 마스크팩 시장은 전체 화장품 시장에서 14%를 차지하는 핵심 카테고리로 거듭났다.

“기업은 오너 아닌 나라 것”

메디힐 마스크팩이 일으킨 초기 돌풍은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 덕분이었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면세점들이 중국 고객의 요청에 입점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깨지지 않고 휴대도 간편하니 선물용으로도 그만이었다. 메디힐 마스크팩은 곧 중국에서 온 보따리상이 가장 먼저 찾는 타깃이 됐다. 생산이 곧 매출이었고, 온갖 유통 채널에서 물건을 달라는 아우성이 쏟아졌다.

“삼세번 만에 성공했구나 싶었어요. 2016년 주식시장 상장을 목표로 빅 3 증권사가 공동주관에 나섰고, 2조8000억원대 기업가치를 인정받았죠. 당시 중화권 최고 스타인 배우 판빙빙과 100억원대 모델 계약에도 합의했어요. 계약서 사인만 남겨놓은 상황이었죠. 그때 느닷없이 사드 문제가 터질 줄 누가 알았을까요.”

게임, 드라마·영화, K-팝 할 것 없이 즉각적인 중국의 보복이 엄습했다. 화장품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한때 3조원대에 육박했던 엘앤피의 시장가치도 1조원대로 곤두박질했다. 결국 상장 계획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권 회장은 이후 2018년 신생 브랜드인 ‘마녀공장’을 인수했고, 2023년 8월 자회사인 마녀공장 상장에 성공했다.

중국 시장의 예측할 수 없었던 타격은 역으로 시장 다변화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2022년 ‘네모패드’ 출시 등 대대적인 제품 리뉴얼도 단행했다. 얼굴 전체를 커버하는 마스크팩 대신 특정 부위만 집중 케어하는 네모패드 역시 기존에는 없는 새로운 혁신 상품으로, 시장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2023년들어 미국 아마존 쇼핑몰의 ‘토너’ 부문에서 판매 랭킹 1위에 올랐고, 올리브영에서는 화장품 카테고리를 통틀어 판매 1위에 올랐다.

“마스크팩이 국내를 비롯한 아시아에선 1등 상품이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선 그렇지 못했어요. 서양 사람들은 체모가 많잖아요. 기본적으로 팩이 얼굴에 잘 붙지 않습니다. 반면 네모패드는 체모가 적은 부위에 붙여 집중 케어할 수 있죠. 네모패드는 원재료 충전 자체도 어렵습니다. 우리 연구진의 노력 끝에 완성한 제품이죠. 현재 주문량이 6개월 치가 밀려 있습니다. 진짜 없어서 못 파는 거죠. 완벽한 실패, 절반의 성공, 세 번째만에야 사업가로서 작은 성공을 거둔 것 같습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권 회장에게 위기를 극복한 원동력을 물었다. “망해도 제대로 망해야 한다”는 선문답 같은 답이 돌아왔다.

“한 번 망한다고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대신 망하더라도 잘 망해야죠. 하지만 대부분이 ‘수건 돌리기’에 급급합니다. 어떻게든 내 피해를 줄이고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우려는 행태죠.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우는 겁니다. 첫 창업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직원이 많아요. 회사가 문 닫으면 어쩔 수 없니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이도 많죠. 사람과 신용을 잃지 않는 것, 그게 재기의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사람과 신용에 이어 권 회장이 강조한 건 품질이다. “고객이 만족하는 제품은 망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오랜 제조 철학이다.

“2000년대 들어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승부하는 화장품 기업이 많아졌어요. 세계적인 OEM 제조사들이 한국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기획력과 상품성에만 치중하는 모습이 우려스럽습니다. 고객이 알아주고 먼저 찾는 화장품은 결국 품질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려면 R&D, 즉 연구소를 갖춰야만 해요. 업계 후배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입니다. 기본과 본질에 충실해야 해요.”

메디힐 마스크팩 론칭 이후 유사한 제품이 시장에 쏟아져도 업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 비결은 권 회장이 누차 강조한 품질에 있다. 권 회장은 이미 지난 2017년 연구개발을 전담하는 엘앤피코스메틱 R&D센터를 설립했다. 4년 전에는 서울 마곡지구에 대대적인 R&D센터 신축에 나섰다. 중국산 저가 부직포 시트 대신 일본산 시트를 고집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엘앤피는 업계 최고의 업무 환경과 복지로도 유명하다. 권 회장은 “기업의 사명과 책무는 고용 창출, 양질의 주거 환경 제공과 복지 등 임직원의 행복에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 등촌동 사옥 지하에는 농구장, 골프연습장, 헬스장, 사우나, 수면실이 있고, 심지어 웬만한 정형외과 병원 못지않은 물리치료실까지 갖췄다. 이곳에서 일하는 트레이너와 물리치료사들은 모두 정직원이다. 직원들의 봉급 중 가장 많은 지출 비중을 조사해 월세 지원도 시행했다. 자녀 학자금 지원 등 대기업 못지않은 복리후생은 기본이다.

“항상 ‘프로답게 일하고 프로답게 쉬자’고 말합니다. 5년 안에 주 4일제 근무도 도입할 계획입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9시간 일하면 돼요. 직원들이 동의하면 급여를 줄이는 대신, 그만큼 더 많은 직원을 채용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 전반이 더 건강해지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거예요. 매출 100억원까지는 오너의 힘이고, 1000억원까지는 직원의 몫입니다. 이후부터는 사회와 나라의 몫이에요. 오너는 보관만 하는 거죠. 기업인들이 그걸 잊어선 안 돼요.”

지난 2016년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120억원을 내놓는 등 통 큰 기부에 나선 것도 큰 화제였다. 기부금은 지질학과(현 지구환경과) 후배들을 위한 연구 시설인 ‘메디힐 지구환경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지구환경과 연구 기자재 도입을 위해 30억원을 추가로 내놓기도 했다. 권 회장은 고려대 야구장에 10억원을 들여 조명 시설을 설치했다는 사실도 이날 처음 공개했다.

“2010년 무렵입니다. 자가다 꿈에서 깨면서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첫 창업 때부터 ‘잘되면 남을 돕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날 꿈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벌어야 나와의 약속을 지키겠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너무 놀라 아내를 깨워 “약속을 지켜야겠다. 죽을 때까지 기부하고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강서구청에 매달 200만원씩 독거노인을 지원한 게 시작이었죠.”

어릴 적부터 야구 등 스포츠 마니아인 권 회장은 골프단 창단, KBO 퓨처스리그 후원 등 스포츠 후원에도 앞장서고 있다. 메디힐재단, 메디힐장학재단 등 기부 활동 외에 스포츠 후원 역시 기업의 사회 환원이라는 게 권 회장의 생각이다.

“대기업은 있어도 존경받는 큰 기업가는 많지 않아요. 규모도 좋지만 존경받는 기업을 만드는 게 제 오랜 꿈입니다. 있는 사람이 베풀고 가야 합니다. 어차피 마지막엔 가져가지도 못해요. 나를 알고 이웃을 알고 사회를 알아야 하는 게 기업하는 사람의 숙명이 돼야 합니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501호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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