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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살롱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18) 

대령과 독수리 

자유와 힘, 용기를 상징하는 미국의 국조 독수리를 모티브로 삼은 위스키, 버번위스키의 아버지 테일러 대령의 이름에서 오마주한 위스키를 찾아 켄터키주에 있는 버팔로트레이스 증류소로 떠났다.

▎지난 2013년 미국 중요 문화유산만 등록되는 미국 역사 기록물(National Historic Landmark)에 등재된 버팔로트레이스 증류소.
이글레어와 테일러 대령

‘이글레어’라는 켄터키의 버번위스키가 있다. 말 그대로 ‘희귀한 독수리’라는 뜻인데 미국의 자유·힘·용기를 상징하는 국조인 흰머리수리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버번이다. 스카치와 달리 숙성을 오래하지 않는 버번치고는 꽤 고숙성이라 깊은 오크 향과 함께 포트와인을 연상케 하는 달콤함과 길고 날카로운 피니시가 매력적이다. 고대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 군단의 휘장이 은독수리였고, 로마제국의 계승을 자처한 신성로마제국, 나치 독일의 제3제국도 독수리 문장을 사용했다. 심지어 더욱 위엄 있게 보이려 쌍두 독수리 문장을 사용한 동로마제국을 승계했다고 주장하는 러시아제국의 차르도 쌍두 독수리를 사용했으니, 서구 사회의 독수리에 대한 경외감을 엿볼 수 있다. 현대 세계의 로마제국으로 비유될 수 있는 미국도 그 신화에 기대어 독수리를 국장으로 사용한다. 사실 역사적으로는 미국이 로마제국의 독수리를 잇는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이므로, 미국은 북미 대륙에서 자생하며 좀 더 존재감이 있는 외양의 독수리로 상징의 치환을 시도했다.

비록 흰머리수리의 외양이 캡틴아메리카의 상징으로 충분할 만큼 거대하고 위압적이긴 하지만, 실상은 사체를 뜯어 먹거나 다른 동물이 사냥한 먹이를 가로채는 등 존경할 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미국 정부는 흰머리수리의 이미지 회복에 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이글레어를 만드는 버팔로트레이스사에서 생산하는 자매품 위스키로 Colonel E.H. Taylor, 즉 테일러 대령이란 버번위스키가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하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시음해보시라. 미군에서 대령은 독수리로 불리니, 대령과 독수리의 맛을 함께 느껴볼 수 있겠다.

대령과 장군


▎깊은 오크 향과 함께 포트와인을 연상케 하는 달콤함과 길고 날카로운 피니시가 매력적인 이글레어
독수리는 예로부터 인간이 갈 수 없었던 하늘의 끝, 신의 영역이 시작되는 곳까지 간다고 하여 많은 문화권에서 신성시했지만, 독수리가 신이 될 수 없듯이 신의 영역으로는 결코 갈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존재였다. 이러한 연유로 미군에서는 육해공군 모두 대령의 계급장이 은독수리이다. 어느 나라나 군인의 계급장은 대개 다이아몬드, 국화, 나뭇잎이나 가지 등 특정한 상징들인데 독수리라는 특정 동물을 계급장으로 사용한 것은 사실 유례가 없는 일이다.

‘장포대’라는 말이 있다. ‘장군 진급을 포기한 대령’이라 무서울 게 없다는 뜻이니, 장성들도 ‘장포대’를 만나면 조심해야 한다. 이 정도로 대령이라는 존재는 실무를 관장하는 직책으로는 최고의 직급이라, 어느 나라 군대에서나 장성에 준하는 존경과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이 말은 대령이 인간계에서는 최고의 존재이지만 결코 천상계의 별은 아니라는 말과 같다. 대령은 영어로 ‘Colonel’인데 라틴어의 ‘Columna’, 즉 기둥에서 유래한 말이니, 군대의 기둥인 대령에게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없겠다. 해군은 좀 달라서 대령을 캡틴으로 부른다. 대소 함선을 지휘하는 함장, 즉 캡틴의 최고위 계급이 대령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항공모함이나 이지스함이라고 하더라도 함장은 캡틴, 즉 대령이고 역시 해군의 기둥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그 함선엔 제독이 타고 있을 것이고 그 제독의 깃발이 나부끼겠지만, 함정의 운용엔 전혀 관여할 수 없고 이는 오롯이 캡틴의 몫이다.


▎증류소 투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는 휴게소.
하지만 독수리가 날 수 있는 하늘과 천상의 별이 존재하는 우주는 공간 자체가 다르다. 장군을 영어로는 ‘General’이라고도 하는데 장군이 되면 병과가 사라지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장성 진급 전까지 여러 단위 부대에서 각종 병과의 참모로, 지휘관으로 다양한 경험을 한다. 또 장성이 되어서는 모든 병과의 책임자로부터 보고를 받는 위치가 되었으므로 병과 마크를 떼는 것이다. 이는 기업의 임원도 마찬가지이다. 임원이 되면 회사가 맡기는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조직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거쳐 임원으로 승진하는 것이라 임원 역시 병과가 없어지는 셈이다. 최근에는 많은 기업이 인사 적체 때문에 전문인력들에게도 직급만 임원으로 올려주는 경우가 많아, 군대와는 조금 다르기는 하다. 장군이 되면 바뀌는 게 수백 가지라고 한다. 물론 권위주의 유산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늘날 시대정신이라 장성 진급에 따르는 특혜가 이전만큼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러 가지가 있다. 38구경 리볼버 권총을 소지하고 대통령으로부터 삼정검을 받는 것들을 제외하면 가장 대표적인 변화가 자신만의 장성기를 가지는 것이다. 청사 내에 머무를 때는 장성기를 게양하고 퇴근할 때는 하기하며, 이동 시에는 차량에 성판을 부착하여 장성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장성은 다른 말로는 플래그 오피서, 즉 깃발을 가진 장교라는 뜻이다.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들이 침을 튀기며 무용담을 이야기할 때면 별을 몇 개 봤다느니, 성판 달린 장성 차량과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다느니 등 온갖 사연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만큼 별은 귀한 것이고 별이 된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과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아 마땅하다.


▎위스키 원액을 담아 숙성하기 위한 오크통을 조립하고 있다.
해군에서는 이순신 장군도 이순신 제독으로 부르며 모든 장군을 제독이라 부른다. 그래서 제독이 타는 함대의 기함을 플래그십이라고 하고, 제독은 플래그십 오피서이다. 플래그십은 군대뿐만 아니라 일반에서도 많이 쓰는 말이다. 자동차 회사의 라인업 중 가장 대표적인 차량을 플래그십이라 하기도 하고, 이 외에도 플래그십스토어, 플래그십 상품 등 생활 속에서도 무언가를 대표한다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별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군대, 기업을 불문하고 별을 단 사람은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에 대해 축하와 존경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고, 별을 단 사람들은 애써준 다른 이들에게 신뢰와 감사를 보내야 할 것이다. 나는 특히 군대의 기둥으로서 묵묵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모든 대령에게 이 모든 존경과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들의 헌신과 봉사는 별의 여부만으로 쉽게 재단해서는 안 된다. 또 독수리보다 더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들은 그들을 받쳐주는 현실의 기둥들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별의 순간, 슈테른슈툰데(Sternstunde)


▎증류소에서 생산된 위스키를 운반하는 탱크로리와 트레일러.
흔히 기업체에서의 임원 진급을 군의 장성 진급에 빗대어 ‘별을 단다’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실제로 실무자의 최고 한계인 부장 직급에 비해서는 의전, 처우, 복지 등 많은 것이 달라지기에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한 번쯤 임원이 되어보는 꿈을 꿀 때가 있다. 몇 년 전 어떤 정치인이 ‘별의 순간’이란 말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독일어인 원어 ‘Sternstunde(슈테른슈툰데)’는 미래의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독일어 원뜻과는 조금 다르게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는 뜻으로 통용된다. 이 해석에 동의한다면 직장인이나 군인에게 임원이나 장군이 된다는 것이 바로 별의 순간인 것이다. 임원은 여러 가지 표현이 있지만 영어로는 ’Director(디렉터)’라고 한다. 디렉터는 디렉션(Direction), 즉 방향을 정하고 지시하는 사람이니 회사의 경영진으로 이보다 적합한 말은 없을 것이다.


▎증류소 외부에는 위스키 주조에 사용되는 물을 저장하는 물탱크가 있다.
요즘은 대기업일수록 인사 적체가 심해 부장 직급이 많아져서 그리 귀해 보이지는 않지만, 실무에서 최고 책임자인 부장의 위상은 사실 군대의 대령과 같아야 한다. 대부분의 실무적인 실행과 조정은 부장과 그 아래 구성원들이 하지만, 임원들이 정하는 회사의 전략 방향과 추진 전략에 따라 그들의 노력이 엄청난 성과를 거둘 수도,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그만큼 임원의 책임과 역할은 조직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 보상으로 많은 혜택을 받는 자리인 만큼 책임 또한 엄중하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별의 순간은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오지 않음을 명심하고, 그 순간이 내게 왔을 때 기회를 잡도록 늘 준비해야 한다.


▎버팔로트레이스 증류소 전체의 마스터 디스틸러인 하렌 휘틀리(Harlen Wheatley)의 사인이 담긴 E.H. 테일러 스몰 배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평생 자신의 사무실에 걸어둔 바다 풍경의 그림에는 “The high tide will come, On that day, I will go out to the sea”라는 글귀가 있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그 날 나는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인생에는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도 있는 법, 그 높낮이에 상관없이 꾸준히 준비하는 자만이 별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고 그 별의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바로 별의 순간, 독일어의 원뜻인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그 순간에 말이다. 오늘은 대한민국 모든 대령의 노고와 헌신에 감사하며, 그들을 위하여 이글레어와 테일러 대령을 한 잔씩 들어야겠다. 그들 모두에게 별의 순간이 찾아오기를 기원하며 충성!

※ 박병진 - 30여 년간 IBM, SAP, SK 등 국내 및 외국계 기업,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망라하여 임원 및 CEO로서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최근에는 포브스를 포함한 각종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는 위스키 칼럼니스트이자 동아일보사의 최고위과정인 ‘광화문살롱’의 주임 교수로서 위스키를 주제로 MZ세대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소통의 지혜를 나누고 있다. 더불어, 요리서적 전문 출판사인 ‘북스 레브쿠헨’의 대표로서 이 시대의 대표적인 N잡러이다.

202408호 (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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