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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연구 | 한화 지휘봉 잡은 ‘야신’ 김성근의 리더십 - 왜 한국 프로야구는 72세 노감독에 열광하나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 덕분에 프로야구 사령탑 복귀… 지독한 ‘야구 열정’과 ‘성과 리더십’ 인정받고 야구 흥행 돕는 ‘스토리’까지 갖춰 


김성근 감독이 자신의 좌우명 ‘일구이무(一球二無·공 하나에는 두 번째가 없다)’를 써넣은 야구공을 들고 있다.
2014년 프로야구는 삼성의 4연속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올해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최고의 화제를 모은 인물은 따로 있다. 바로 한화 이글스의 신임 사령탑, 김성근(72) 감독이다.

어떻게 일흔이 넘은 노감독이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프로 사령탑에 복귀했을까? 그리고 왜 김성근의 리더십이 새삼 2014년 가을에 더욱 주목을 받는 것일까? 한때 ‘비호감’ 딱지를 달고 살았던 김성근은 이제 ‘야구의 신’의 의미를 가진 ‘야신’이란 별명이 이름 앞에 붙는다. 한화 팬들은 꼴찌팀 한화를 김 감독이 내년엔 단숨에 상위권까지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런 ‘김성근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 감독은 지금의 한화를 제외하고 프로팀과 실업팀, 고등학교팀, 그리고 얼마 전까지 몸담았던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를 포함해 총 13개 팀의 감독을 거쳤다. 그중 한국 프로야구팀의 감독을 맡은 건 7번이었는데, 7번 모두 해고당했다.

김 감독은 ‘야구는 감독이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스타 플레이어를 포함한 선수, 그리고 구단의 역할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늘 해고당했던 배경에는 이런 고집스러운 생각이 있다. 스타 플레이어와의 관계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 김 감독이 2007년 SK를 처음 맡았을 때 LG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자 당시 SK 최고의 스타였던 김재현 길들이기에 나섰다.

김재현은 김 감독이 LG 사령탑으로 있을 때(2001~2002년)의 애제자였다. 그러나 SK에서 김 감독은 김재현을 우투수 플래툰시스템 요원으로 썼고, 애틋했던 사제지간에 금이 갔다. 훗날 김 감독은 “김재현을 잡아야 내 말이 먹힌다고 생각했다. 김재현도 팀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팀이 바로 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결국 김재현은 풀타임 주전이 아닌 현실을 받아들였고, 2007년 한국시리즈 MVP(최우수선수)를 받으며 우승 주역이 됐다. 지금 두 사람은 더없이 끈끈하다. 방송 해설을 하던 김재현은 이번에도 김 감독의 부름을 받아들여 한화의 신임코치로 갔다.

그런데 김 감독과 프런트(구단 직원)와의 관계는 조금 다르다. 구단 입장에서 감독은 피고용자다. 모기업의 지원 없이는 야구단 운영이 불가능한 한국 프로야구 현실에서 프런트는 김 감독의 지도 방식을 프런트의 권한까지 침범하는 ‘제왕적 리더십’이라고 생각한다. 김 감독은 2002년 정규시즌 4위 LG를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이끌고도 해임됐다. SK에서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세 차례나 이끌고도 계약 마지막 해인 2011년 시즌 도중에 해임되는 수모를 당했다. 당시 김 감독은 SK 구단이 재계약 여부를 통보하지 않고 석연찮은 이유로 결정을 미루고 있다며 기자들에게 “올 시즌까지만 SK를 맡고 내가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에 구단은 다음날 김 감독에게 해임을 통보했다.

팬들이 불러낸 야신


김성근 한화 신임 감독이 10월 28일 공식 취임식 후 팬들과 인사하고 있다.
구단과 늘 불화를 일으키는 김 감독에 대해 팬들 사이에서도 처음엔 삐딱한 시선이 더 많았다. 그러나 김 감독이 점점 더 좋은 성적을 내는데도 그가 구단에 늘 ‘팽’ 당하자 ‘팬심(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 감독을 향한 뜨거운 응원은 올 가을에 정점을 찍었다.

그 배경엔 ‘프런트 야구’에 대한 팬들의 반발이 자리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야구가 금메달을 딴 이후 프로야구 관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구단은 팬들의 목소리와 상관없이 성적에 대한 책임을 코칭스태프에만 떠넘기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올해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낸 LA 다저스는 시즌이 끝나자마자 감독이 아닌 단장을 경질했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팀들은 올해도 감독에게 성적부진의 책임을 물었고, 각 팀 신임 감독으로 임명된 인물들은 대부분 구단과 불화가 없는, ‘사회 생활이 무난한’ 지도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 시즌 연속 꼴찌팀 한화 팬들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행동에 나섰다. 일인시위, 인터넷 청원 등을 통해 구단에 김성근 감독 영입을 적극적으로 요구했고, 결국 한화는 김 감독 선임을 발표했다. 김 감독은 10월 28일 한화 공식 취임식에서 “이번에는 감독된다는 생각을 거의 안 했다. 그런데 한화에서 불러줘서, 팬들이 뒤에서 밀어줘서 복귀 기회가 생겼다. 과거에 13번 감독 한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얼떨떨하다”고 했다.

김 감독이 프로 무대를 떠나 있었던 지난 3년간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자. ‘갑의 횡포’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정치 지도자들은 번드르르한 말로 약속을 했다가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팬들은 ‘갑에 저항하는 리더’, ‘결과를 보여주는 리더’ 김성근을 찾게 된 것이 아닐까.

김 감독은 화법에서도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가 2005년부터 2년간 일본 지바 롯데 코치를 할 때 당시 팀에는 ‘국민타자’ 이승엽이 있었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부진해 마음고생을 하는 이승엽에게 “넌 세상의 중심에만 있어서 나약하다. 평생을 모서리에서 산 나에게는 이런 어려움은 어려움도 아니다”라고 독설을 했다. 논리에 어긋나지 않고 자신의 확고한 철학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의 말은 곧 이슈가 된다. 이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아주 불편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로 적(敵)도 많이 생겼다. 이승엽 같은 애제자의 경우는 김 감독의 진심을 알기 때문에 등을 돌리진 않지만, ‘돌직구 화법’의 대상이 구단이나 KBO(한국야구위원회)일 경우는 다르다. 김 감독은 이들에게 ‘눈엣가시’다.

이제 팬들은 이런 직설화법에도 호응을 보낸다. 김 감독은 한화 감독 선임 직후 S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마무리 훈련때 주전 선수들에게는 휴가를 주나”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한화 선수들에게 휴가를 안 줄 것이다. 꼴찌가 어디서 놀아”라고 답했다. 한화의 부진에 답답해하던 팬들은 “통쾌하다”고 했고, 순식간에 야구팬 사이에서는 ‘꼴어놀(꼴찌가 어디서 놀아)’이 유행어가 됐다.

김 감독의 트레이드마크는 ‘지옥훈련’이다. 프로 선수들을 마치 아마추어 선수들을 조련하듯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새벽 훈련은 물론이고 연습 경기 후 나머지 훈련이 이어지고, 야간 훈련도 있다. 500개 이상의 펑고(수비 훈련을 위해 배팅볼을 쳐 주는 것)를 직접 쳐주는 ‘지옥의 펑고’도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선수를 혹사시킨다는 비난도 나왔지만, 정작 지옥훈련을 소화한 선수들은 불만이 없다. 김 감독이 쌍방울 시절 지도했던 투수 김현욱은 김 감독과 함께할 때 투수 3관왕에 올랐다가 이후로는 타이틀을 따내지 못했다. ‘혹사당해서 기량이 떨어졌다’는 뒷말이 나왔지만 정작 김현욱은 “그땐 내가 이기는 경기 나가서 승리를 거둔 것이고. 난 감독님 밑에서 계속 야구가 늘었다”고 했다. LG의 깜짝스타로 떠올랐다가 이듬해 무너졌던 투수 신윤호는 “내가 못한 거지 감독님은 잘 가르쳐주셨다”고 했다. 2002년 김 감독이 LG에서 해고당한 후 그해 12월에 맞은 그의 환갑 때 LG 선수들을 비롯한 그 동안의 제자들이 모여 환갑잔치를 열어준 일화는 유명하다.

“리더는 결과로 말한다”


김성근 감독이 2012년 고양 원더스 감독으로 있을 때 선수들을 지도하는 모습.
김 감독이 강압적인 스파르타 훈련을 하는데도 선수들이 따르는 이유가 있다. 김 감독은 혹독한 육체적인 훈련과 더불어 ‘멘탈 교육’을 강조한다. 그는 선수들에게 “왜 야구를 하느냐”고 묻는다. 지옥훈련을 소화해야 하는 동기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김 감독은 선수들 개개인이 자신의 가치(연봉)를 올리기 위해서는 힘든 훈련을 소화해야 하고, 어차피 프로야구 선수가 된 이상 남자로서 한 번은 가장 빛나는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한다. SK 운영팀장을 지냈던 박철호 대한야구협회 홍보이사는 “SK 선수들이 김 감독 부임 초기에는 강압적인 훈련방식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러나 계속 우승을 하고, 연봉이 뛰어오르자 선수들도 김 감독에게 감화됐다”며 “김 감독이 쓴소리도 많이 하고, 구단과도 마찰이 잦지만, 선수들도 나중에는 그게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한화의 오키나와 전지훈련 캠프에 도착한 첫날 김 감독이 선수들에게 한 질문은 “너에게 한화 이글스는 어떤 존재냐”는 것이었다.

혹독한 훈련과 더불어 김 감독의 경기 방식도 종종 도마에 오른다. 오직 승리만을 위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는 방식은 ‘재미없는 야구’ ‘더티한 야구’라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김성근 감독의 경기 방식에 대해 욕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면 난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렇다면 김 감독의 팀을 이기면 된다’고. 그런 야구를 하는 팀이 우승하지 못 하는 걸 보여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김 감독은 이런 논쟁을 늘 한마디 말로 정리한다. “리더는 결과로 말한다”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은 한화와 3년간 연봉 5억원, 계약금 5억원(총액 20억원)에 계약했다. 1942년생인 그의 나이가 올해 만 72세, 한화를 맡아 첫 시즌을 치르는 내년에는 73세가 된다. 김 감독은 한국 프로스포츠 현직 감독 최고령이고, 연봉은 최고액(류중일 삼성 감독과 공동 1위)이다. 70대에 프로 감독으로 ‘재취업’한 것에 대해 김 감독 자신도 감회가 남다른 듯하다. 그는 “다시 돌아올 수 있어 감개무량하다. 이 나이에 현장에 있을 수 있다는 게 좋다”고 말했다.

70대에 맞은 인생 전성기


2008년 SK의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는 김성근 감독.
‘70대 감독의 도전’은 의미가 남다르다. 올해 프로 무대에 돌아왔던 70대 ‘올드보이’들은 줄줄이 실패를 맛봤다. 김응용(73) 감독이 한화에서 실패한 채 물러났고, 프로축구에서는 성남FC에 복귀한 박종환(76) 전 감독이 선수 폭행이라는 불미스러운 사건과 부진한 성적을 남기고 시즌 도중 물러났다. 70대 감독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노장 감독으로서 가장 성공적인 성과를 남겼던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73) 감독도 지난해 지휘봉을 내려놓고 은퇴했다.

그런데 김성근 감독은 다른 70대 감독들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김응용 전 감독이나 박종환 전 감독이 지도자로서 현장을 떠난 지 한참 만에 복귀했다가 실패한 반면, 김성근 감독은 7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떠난 적이 없다. 이런 점에서 김성근 현 한화 감독과 김응용 전 한화 감독이 자주 비교 대상이 되곤 한다. 김응용 전 한화 감독은 최고의 팀인 해태와 삼성을 거치며 한국 프로야구 감독 최다인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을 일궈낸 지도자다. 반면 재일동포 출신인 김성근 감독은 1965년 혈혈단신으로 영구 귀국해서 한국에 온 비주류다. 그런데 김응용 감독이 한화에서 두 시즌 연속 꼴찌를 기록하자 김성근 감독이 바통을 넘겨받았다. 공교롭게도 간접적인 지도력 대결이 됐다.

김성근 감독의 별명 ‘야신’도 김응용 감독 때문에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응용 감독은 삼성, 김성근 감독은 LG 사령탑으로 맞붙었다. LG는 정규시즌 4위의 성적으로 정규시즌 우승팀 삼성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며 맞섰다. 이때 김응용 감독이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성근 감독을 빗대 “야구의 신과 싸우는 것 같았다”고 말했고, 이후 김성근 감독의 별명은 ‘야신’이 됐다. 일설에는 당시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 뉘앙스가 칭찬과 동시에 살짝 비꼬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도 한다. 정작 김성근 감독은 ‘야신’이란 자신의 별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김성근 감독은 “야구의 신이 어딨나? 야신이란 별명보다는 모든 것을 다 보는 ‘잠자리눈’이라고 불리는 게 더 좋다”고 했다.

김 감독은 2007년 65세의 나이로 SK에서 감독으로서 생애 첫 프로 우승을 맛보았다. 그의 지도자 커리어 정점은 SK 감독 시절(2007~2011년·한국시리즈 우승 3회, 준우승 1회)이다. 그는 72세의 노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왕년의 명감독’이란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점이 지도자 김성근의 저력이다.

김 감독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야구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야구에 대해 그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김 감독과 불편한 사이인 사람들도 “그분 야구 열정은 최고죠”라고 말한다. 김 감독은 화장실에 갈 때도 프로야구 연감을 갖고 들어간다. 1998년 쌍방울 감독 시절엔 오른쪽 콩팥에서 종양이 발견돼 신장 한쪽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고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경기장으로 가서 덕아웃을 지켰다. 야구에 대한 무서운 열정과 고집은 나이 일흔쯤 되면 퇴색하거나 꺾일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성과’보다 돋보이는 ‘스토리’

27세에 마산상고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김 감독은 45년 동안 오로지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부족한 선수 자원,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1점이라도 더 쥐어짜내서 이길 수 있는가 하는 목표다. 그래서 그에겐 ‘개발도상국형 지도자’라는 수식어도 붙었고, 야구의 재미를 떨어뜨린다는 혹평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45년 동안 꾸준히 성과를 냈고, 또 끈질기게 현장을 지켰다.

김 감독은 얼마전까지도 대기업의 러브콜을 받는 명 강연자로 각광받았다. 한화 감독으로 선임된 후에도 그는 청와대 직원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기도 했다. 성공한 리더, 그리고 그 누구보다 풍성한 ‘스토리’를 보유한 김 감독은 의외로 굉장한 유머감각이 있는 달변가다. 미디어에 비친 ‘냉혈한’ 이미지와 달리 소탈한 인간적 매력이 있고 젊은 감각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았는데, 조선족 말투를 쓰는 그 사람이 나한테 ‘당신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더라.” 김 감독의 한국말 발음이 어눌하다는 약점을 소재로 한 의외의 ‘자학 개그’다. 그는 취재하는 기자들에게도 옛날 에피소드를 들려주면서 자주 웃긴다. 김 감독이 지금만큼 유명해지기 전에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짧게 잘라달라”고 하면 이발사가 “혹시 무슨 일 하시는 분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결연하고 무서운 표정, 짧은 머리가 꼭 건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 웃음을 터뜨리면, 김 감독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내가 20대에 한국 처음 왔을 때는 밖에만 나가면 소매치기를 당하는 어리숙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야구 감독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인상이 그렇게 변했더라고.” 어리숙한 ‘야신’이라니. 여기서 사람들은 무장해제된다.

김 감독은 한화에서 또 한 번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가 한화에서 성공을 거두든, 아니면 실패를 하든 그 자체가 ‘스토리’다. 이제 스타 감독이 된 김 감독이 한화에서 쏟아내는 말들은 ‘어록’으로 회자될 것이다. 72세의 김성근 감독은 아직도 ‘승리’만을 이야기하지만, 이미 그의 컴백 자체가 ‘스토리’에 목 마른 프로야구판에 새로운 흥행 키워드다.

201412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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