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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인류의 등대(燈臺)’를 찾아서(3)] ‘세계의 아버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성자(聖者)에게 죽음은 결국 구원이었다 

장석주 전업작가
세기적 작가의 평생을 걸고 진행된 이상주의적 실험… 인간의 탄생과 종말에 대해 경이로운 탐구심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같은 그의 ‘고전’에 담겨 있다

▎러시아 야스나야폴랴나에 위치한 톨스토이의 무덤. 그는 무욕의 길 위에서 죽음을 맞은 성자의 면모를 보여준 인류의 스승이었다. 막심 고리키는 그를 두고 “한 세기에 걸쳐 체험한 결과를 놀랄 만한 진실성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고 칭송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물은 사람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그런 진지함 속에서 저 물음이 나왔을 테다.

사람은 생명의 온기를 갖고 태어난다. 때문에 태어난 순간부터 ‘살아야 한다’는 필연적 운명과 마주친다. 이 운명을 두고 자연히 ‘어떻게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솟구친다. 이를테면 사람과 생쥐로 태어난 것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생물학적으로만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생쥐의 유전체를 이루는 염기서열은 25억 개, 사람은 29억 개다. 사람의 염기서열은 생쥐보다 불과 14% 많을 뿐이다. 하지만 생쥐의 길과 사람의 길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사람에겐 동물과 식물과는 다른 사람만의 생활이 있다. 때문에 그동안 몇몇의 철학자는 인생을 두고 이러저러한 말을 해왔다. 붓다는 “인생은 행복의 열반에 이르기 위한 자기 부정의 길”이라고 말했다. 한 바라문교도 역시 인생에 대해 “점점 행복에 이르려는 영혼의 순례이자 완성”이라고 정의했다. 스토아학파의 한 철학자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이성을 따르는 게 인생”이라고 말했다.

만일 살아야만 한다면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인간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로 대다수 사람은 행복이라는 주관적 영역을 목표삼아 삶을 살아간다.

비범함과 비루함의 길목에서


▎톨스토이는 1862년 러시아 상류사회에서 명사로 꼽히던 외과의사 베르나 박사의 둘째 딸 소냐와 결혼했다. 톨스토이가 현실에 둔감한 몽상가였다면 그의 아내는 빼어난 현실감각으로 재산을 관리하며 부를 일궈냈다.
호모사피엔스로도 불리고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불리며 더러는 ‘직립원인’이라고 불리는 인류의 조상이 지구에 나타난 게 약 20만 년 전이다. 약 7만 년 전만 해도 호모사피엔스는 다른 대형 동물과 경쟁하며 자기 생존에 골몰하는 평범한 종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인류는 불을 다루고 화식(火食)을 하고 바퀴를 발명했다. 기록을 위해 문자를 만들고 시간이라는 개념과 숫자 ‘0’을 창안했다. 식량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도처에 도시를 건설했다. 바다에 배를 띄워 세계를 연결하는 교역망을 만든 끝에 상업을 부흥시켰다. 이어 굶주림과 전염병을 억제하는 의술을 발전시켜 인류 평균수명을 크게 늘렸다.

이처럼 인류는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거치며 놀랄 만큼 똑똑해져 왔다. 종국에는 지구 최상위의 지위를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이와 관련해 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류는 인간 종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쥔 신과 같은 위치에 올라서게 될 것이다”라는 낙관적인 예언을 내놓기도 했다.

과연 인류는 자연과 우주를 거머쥐고 다스리는 신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을까? 인류의 약진은 지구 생태계에 파멸적인 결과를 낳게 했다. 일례로 수많은 생물 종이 대량 멸종위기에 처했다. 때문에 자연이라는 거울에 비친 인간을 두고 부정적인 평가도 늘었다.

“우리는 생물학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종이다. 생태학적 연쇄살인범이라고 할 수 있다”(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자연은 인간이라는 유해 동물의 대량 발생으로 고통 받고 있다”(존 그레이, <하찮은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인류를 두고 ‘생태학적 연쇄살인범’, ‘유해 동물’이라는 평가가 나온 것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연쇄살인범, 사기꾼, 성도착자 등과 같이 남을 등치고 해악을 끼치는 존재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자연 앞에서는 기껏해야 ‘유해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단순한 재미를 위해 새, 곤충, 물고기를 마구 잡아 죽인다. 탐욕으로 가득 차 파괴와 노략질을 일삼는 존재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인류의 잔악성은 자연 생태계만을 향한 게 아니다. 종교나 정치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을 때려죽이기도 하고 불사르거나 총으로 쏴 죽이기도 한다.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 중국 난징대학살을 비롯해 최근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Islamic State)가 저지른 행위들이 바로 그런 끔찍한 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인간이 시와 동화를 쓰고 음악과 춤을 즐기는가 하면 축구와 골프에 열광하고 목숨을 걸고 세계의 가장 높은 산들을 오르며 코카콜라를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낯 모르는 타인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평범한 악에 물든 잔혹하고도 비천한 존재이면서도 아름답고 숭고한 존재이기도 하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진지하게 물었던 이는 러시아의 작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9~1910)다.

톨스토이는 불후의 대작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을 써낸 당대 최고의 문인이다. 또한 그는 제 앎을 고스란히 실천으로 옮기는 데도 성공했다. 무욕의 길 위에서 죽음을 맞은 성자의 면모를 보여준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톨스토이를 흠모하며 “그분은 ‘세계의 아버지’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는 톨스토이를 두고 “한 세기에 걸쳐 체험한 결과를 놀랄 만한 진실성의 힘과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며 “그의 사상은 세계 전체다”라고 칭송했다.

톨스토이보다 더 뛰어난 작가를 찾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 그보다 더 진지하게 탐구한 작가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 톨스토이보다 인생의 모순을 통찰하고 죽음의 공허와 삶의 신비에 대한 탐구를 평생의 화두를 삼은 작가는 없다. 특히 죽음은 누구에게나 불가사의 한 사건이자 끝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인데 톨스토이는 굉장히 쉬운 말로 삶과 죽음을 명쾌하게 정의한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생물이 태어났다가 죽기까지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사람, 개, 그리고 말이 태어나는 일은 각각 자신만의 몸뚱이를 갖고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특유의 몸뚱이는 한동안만 살다 죽게 마련이다. 이렇게 죽은 몸뚱이는 분해돼 다른 물질로 변함으로써 그 생물은 영영 없어져버린다. 즉 생명은 언제가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반대로 개나 말이 살아 있다는 것은 심장이 고동치기에 아직 몸뚱이가 분해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심장 박동이 멎는 순간 몸뚱이가 분해되기 시작하는 게 바로 죽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동물의 몸뚱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사람에게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톨스토이, <자아의 발견>, 33~34쪽)

산 것은 모두 고동치는 심장으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산다. 하지만 죽은 것은 심장이 멎고 몸은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이 대목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무엇일까? 죽음이 삶의 파괴이자 끝이라면 삶은 신비이자 신성함 그 자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세 살이었던 무렵 그의 어머니가 여동생을 낳다 산욕열로 죽었다. 6년 후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져 길에서 죽었다. 결국 톨스토이는 세 명의 형과 여동생과 함께 숙모의 손에서 자라나야 했다. 그가 죽음을 평생의 화두로 삼게 된 이유는 아마도 이른 나이에 겪은 부모의 죽음 탓일 테다.

부모의 죽음이 내면에 깊은 상실감으로 남았던 그는 장기간 깊은 통찰 끝에 죽음에 대해 차갑게 해석했다. 죽음이란 그저 몸은 썩어 사라지고 악취와 구더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죽은 자의 생전 행적들은 망각돼버린다.

어느 날 들이닥치는 죽음은 삶을 무(無)이자 절대적 공허로 바꿔버린다는 사실을 들어 톨스토이는 삶에 대해 “누군가가 나를 조롱하기 위한 바보 같은 농담”이라 정의했다. 생전 거머쥐었던 명성은 죽음과 함께 신기루와 같이 한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방탕한 청년에서 작가의 길로


▎러시아 보로지노에 위치한 전승기념탑. 1876년 톨스토이가 소설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기 위해 답사했던 곳이다. 이 작품은 1805년 러시아의 황금시대에 펼쳐진 나폴레옹 전쟁과 12월혁명을 담은 대하소설이다.
1828년 9월 9일 톨스토이는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60㎞ 떨어진 톨스토이 가문의 영지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이는 귀족이었으며 어머니 마리아는 부잣집 외동딸이었다. 자연히 그는 부유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정교사로부터 고급 교육을 받았으며 명문 카잔대학교 법학과에 순조로이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교육에 실망해 자퇴했다. 결국 1847년 고향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온 그는 독학을 하며 영지를 돌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고향에서의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생활보다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술과 향락, 자유로운 연애가 가능했던 도시 생활이 그에게 더 어울렸다.

어느 시대에서나 젊음이란 절제를 모르며 고상한 정신적 삶보다는 욕망에 더 기울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성의 유혹과 미각의 향락에 빠지기 쉬운 것은 물론이다. 톨스토이도 젊은 시절 술과 방종한 연애, 그리고 도박 따위에 굴복한 적이 있다. 육체의 취약함을 견디지 못하고 향락을 탐하는 생활에 한동안 빠졌다가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형 니콜라이를 따라 이듬해 군대에 입대했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던 군 생활에서 그는 전투에 참여하는 한편 틈틈이 잡지에 글을 기고했는데 이때 쓴 소설이 바로 <유년시대> <소년시대> <청년시대>와 같은 작품이다. 이 시기에 톨스토이라는 이름이 러시아 문단에 알려졌다. 1854년 크림전쟁 중 세바스토폴 포위전에 참여했을 당시 톨스토이는 고작 스물여섯 살이었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 터키 등 연합군에 패배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집필했다. 용감한 일반 병사와 과장되고 왜곡된 지휘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패전의 쓰라린 경험에서 얻은 소중한 부산물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제대한 그는 185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다. 당시 톨스토이는 크림전쟁에서 집필한 작품 덕에 러시아 문학청년 사이서 우상으로 자리 잡은 차였다.

유명세를 얻었지만 톨스토이는 타고난 개인주의자로 자기 자아에 유폐돼 있었으며 사람과 어울리는 일을 꺼려했다. 1857년 프랑스·스위스·독일을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뤼체른>을 썼지만 혹평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단편 <당구점수 기록원의 수기> <두 경기병> <알베르트> <세 죽음> <가정의 행복> <폴리쿠슈카> <홀스토메르> 등을 꾸준히 펴냈다.

이 시기에 그는 러시아 농민이 열악한 환경에 짓눌리는 현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농민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농민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었다. 사람다운 존엄과 기품을 잃은 채 동물적 생존에만 매달리는 러시아 농민의 비참함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 아마도 그를 행동하도록 움직였을 테다.

톨스토이는 근대 교육만이 러시아 농민의 의식을 깨울 수 있다고 믿었다. 농민 자녀를 위한 교육사업은 초기에는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1860~1861년 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벨기에를 돌아보며 교육이론과 실상을 탐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교육이론을 알리는 잡지와 교과서를 발행했으나 사업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2년 만에 접고 말았다.

톨스토이는 가난과 무지몽매함에서 빠져 허우적거리는 농민에 대해 연민을 품었지만 내면에 뿌리내린 상류층 특유의 도덕적 불감증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그는 농노의 아내와 관계를 맺어 사생아를 낳고는 그 아이를 마부로 부리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1862년 러시아 상류사회에서 명사로 꼽히던 외과의사 베르나 박사의 둘째 딸 소냐 안드레예브나 이슬레네프와 결혼했다. 당시 톨스토이는 서른세 살이었지만 신부의 나이는 고작 열여덟 살에 불과했다. 톨스토이가 현실에 둔감한 사색가이자 몽상가였다면 그의 아내 소냐는 빼어난 현실감각으로 영지와 재산을 관리하며 부를 일궈냈다.

결혼 후 톨스토이는 교육활동을 그만두고 15년간 가정생활에만 전념하며 집필에 힘썼다. 이 기간 중 열세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의미 있는 작품도 집필됐다. 인류 고전으로 꼽히는 소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이 그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1805년 러시아의 황금시대에서 펼쳐진 나폴레옹 전쟁과 12월혁명을 담은 대하소설이다.

대문호의 반열에 올라서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한 장면. 러시아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귀족 출신 안나 카레니나와 젊은 장교 브론스키 백작 간의 불륜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세기적인 여성의 외도를 통해 결혼과 가족제도의 본질을 통찰했다.
등장인물만 599명에 달하며 전쟁의 격동 속에서 유전하는 인물 유형의 삶과 내면 심리를 총체적으로 그려냈다. 때문에 이 소설은 훗날 ‘인물의 백과사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톨스토이 명작의 탄생하는 과정에서 아내 소냐는 집안을 관리하면서 작가의 아내로서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례로 아이를 양육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남편의 소설 <전쟁과 평화>의 초고를 일곱 번이나 베껴 써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평탄한 결혼생활을 꾸리고 작가로서 전성기에 도달했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 했던가? 그는 삶의 목적에 대한 깊은 회의 속에서 정신적인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주어진 시간, 원인, 공간 내에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싸워왔는데 그 물음에 대한 이성적 추론이 결국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이 위기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쓰던 1879년 무렵 가장 격렬해졌다. 머리는 삶에 대한 회의와 혼란으로 복잡했지만 소설을 쓰는 그의 손은 부지런했다.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귀족 출신 안나 카레니나와 젊은 장교 브론스키 백작의 불륜을 다룬 작품이다. 세기적인 한 여성의 불륜 이야기를 통해 결혼과 가족제도의 본질을 통찰한 이 작품을 두고 비평가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대중의 지지와 비평가의 지지를 함께 이끌어낸 이 작품을 통해 톨스토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대문호의 반열에 성큼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디 그뿐이랴! 러시아의 ‘호메로스’라는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런 화려한 갈채를 받았음에도 극도의 자기 혐오감에 빠지곤 했다. 금욕적 삶을 열망하면서도 물질의 풍요와 안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과 내적 갈등을 빚었던 것이다. 자기고민이 심화되자 한때 자살을 염두에 두기까지 했다.

결국 그는 방대한 독서에 매달리며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허송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뜻밖에도 해답의 열쇠는 바로 평범한 농민들의 삶에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신념을 지키며 삶의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농민에게 크게 감동받는다. 당시 농민 대부분 문맹인데다 가난했지만 삶의 철학은 작가의 그것보다 고결했다.

이 가르침을 통해 그는 모든 사람은 신의 뜻에 따라 태어났으며 신은 인간의 영혼을 파멸할 수도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쾌락을 포기하고 고행하는 삶을 받아들임으로써 신에 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저서 <참회록>을 집필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겪어야 했던 번민과 도덕적인 고통을 절절하게 털어놓았다.

나이가 들수록 그는 자신의 가족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금욕적 삶과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했다. 모든 사적 소유를 포기하고 세속의 삶에서 해방되고자 했으나 그의 가족은 그런 톨스토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직 막내딸 알렉산드라만이 톨스토이를 이해하고 지지했다.

이상주의를 고집하는 톨스토이의 행보에 현실주의자였던 아내는 평생 고통스러워야만 했다. 게다가 톨스토이를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무리가 야스나야폴랴나로 몰려들자 톨스토이와 아내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정신적 위기를 겪자 일흔 살이 넘은 이 늙은 작가는 영지를 가족 소유로 넘기고 도덕적인 이야기를 쓰는 일에만 전념했다.

‘무소유(無所有)’를 택한 이상주의자


▎톨스토이 가문의 영지로 들어가는 자작나무 길의 모습. 톨스토이는 일흔 살이 넘자 그의 부유함을 상징했던 넓은 영지를 가족 소유로 넘기고 오로지 도덕적인 이야기를 쓰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세부 묘사를 생략한 채 건조한 문체로 구성됐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왜 인간은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많은 땅이 인간에게는 필요한가?> <세 가지 질문> <예술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톨스토이는 새로운 확신에 찼다.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anarchism, 無政府主義)에 매료됐고 영생설을 믿었으며 교회의 권위를 부정했다. 자연스레 러시아정교회와 마찰을 빚게 됐다. 결국 1901년 러시아정교회는 톨스토이를 파문했다. 그의 저작물 일부는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국가와 제도는 본래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그것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신념에 따라 정부에 반대했으며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했다. 이후 그는 모스크바 빈민굴로 들어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의 편에 서서 연대를 모색했다.

정교회의 파문과 정부 당국의 저작물 판매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작가이자 사상가로서 그의 위치는 흔들림이 없이 견고했다. 대중은 꿋꿋하게 그를 지지했으며 러시아정교회의 처분에 분노했다. 많은 러시아인이 톨스토이를 만나기 위해 야스나야폴랴나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젊은 시인 릴케와 그의 명석한 애인 루 살로메도 있었다.

1899년 톨스토이는 소설 <부활>을 발표했다. 일흔 살을 넘겼으면서도 식지 않은 창작열을 불태운 것이다. 떠돌이 집시와 농노의 사생아로 태어나 훗날 매춘부로 전락한 카튜샤마슬로바를 통해 영혼의 구원과 부활의 가능성을 탐색한 소설이다.

만년의 역작을 내놓자 나라 안팎에서 그의 명성은 더욱 견고해졌다. 당대의 지배 권력인 러시아 정부와 러시아정교회와는 여전히 대립하고 갈등했지만 그를 향한 대중의 지지는 여전했다. 파문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대중을 계몽했으며 부당하게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이를 위해 계속 글을 썼다. 여든 살을 맞은 톨스토이에게 세계의 명사로부터 축하의 인사말이 도착했다.

말년에 이르러서 그는 성자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다. 허름한 옷을 입고 농부의 노동을 하며 제 신발은 스스로 지어 신었다. 가족과 재산 문제로 불화를 겪었던 1910년 10월 29일 밤 그는 여든 두 살에 노구를 이끌고 집을 나섰다. 대문호가 평생 일군 어마어마한 재산과 명예를 버리고 무소유의 길로 나선 것은 인류사에 기록할 만한 장엄한 장면 중 하나일 테다.

그는 동양의 현자인 노자나 장자와 같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올곧은 양심의 길에 우뚝 섰다. 탐욕과 이기주의, 잔인함과 불의에 물든 하찮은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간의 오명을 떨쳐내고 인간이 숭고한 이상의 실천자가 될 수도 있음을, 그리고 인간은 언제라도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온몸의 실천으로 보여줬다.

초라한 간이역에서 생을 마감하다


▎톨스토이 생가에 위치한 정원의 모습. 톨스토이의 아버지는 이름난 귀족이었으며 어머니는 부잣집 외동딸이었다. 자연히 그는 부유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위대한 ‘가출’을 하기 전 그는 자신의 모든 저작권을 막내딸 알렉산드라에게 넘기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톨스토이는 주치의와 알렉산드라만을 데리고 신을 섬기며 조용히 살 수 있는 피난처를 찾아나섰다.

이 행보를 살펴보면 굉장히 감동적이다. 샤모르지노의 여동생 집에 잠시간 머물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여행길에 오른 그는 죽을 때를 감지했다. 죽을 자리를 찾아나서는 늙은 코끼리처럼 1910년 11월 20일 새벽 톨스토이는 랴잔 역의 한 외딴 마을 아스타포보의 초라한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장엄한 일생을 마쳤다.

동양 철학은 삶이 꿈이며 꿈이 삶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톨스토이는 꿈에서 깨어나 죽음을 거쳐 진정한 삶을 맞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뒤 시신은 고향으로 옮겨져 그를 흠모하던 수많은 이의 애도 속에서 안장됐다. 톨스토이가 죽음에 대해 가진 생각은 자연과학이 일러주는 진실과 부합된 것이다. 자연과학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덧없는 존재야, 입자들의 우연한 응집물질이야. 이 입자의 상호작용이 네 속에서 ‘인생’이란 걸 생산해내지. 그 응집물은 일정 기간 지속되다가 상호작용을 멈춘다. 이때 네가 말한 ‘인생’은 정지되며 아울러 너의 질문들도 중단되겠지. 너는 우발적으로 결합된 물질덩어리에 불과하니까 그 덩어리가 발효하는 거지.”

톨스토이는 자연과학이 일러주는 것이 결국에는 아무 대답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소크라테스, 솔로몬, 석가모니, 쇼펜하우어 등에게서 해답을 구하고자 책을 파고들었다. 결국 죽음이 고통이자 박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이 깨달음으로도 죽음이 가져오는 허무와 절망을 넘어설 수 없었다.

톨스토이는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죽음의 문턱에 서있는 자의 공포, 고통, 번뇌를 세세히 묘사하면서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탐구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현대적인 죽음의 의식을 본격적으로 파고 든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귀족으로 태어나 순탄한 삶을 이어온 항소법원판사다. 그는 세속의 권위와 명예, 그리고 부를 누리며 인생의 쾌락을 적당히 즐기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불치병에 걸려 석 달 동안 끔찍한 병고와 절대 고독 속에서 죽음의 공포와 마주한다.

유쾌한 사교생활과 관료주의에 안주하며 향락적인 삶을 누리던 그가 죽음에 직면해 비로소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구나! 고통과 죽음은 도대체 왜 생기는가?”라는 궁극적인 물음과 마주한다. 이 물음은 톨스토이의 궁극적인 화두인 “날 기다리고 있는 회피불가능성의 죽음도 감히 파괴할 수 없는 의미를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와 겹쳐진다. 이반 일리치가 깨달은 것은 어떤 삶을 살았던지 간에 인간은 결국 죽음과 마주치게 되리라는 것이다.

“죽은 것만 같은 공직생활과 돈 걱정들, 그렇게 1년이 가고 10년이 갔다.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었다. 하루를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런 삶이었다. 한 걸음씩 산을 오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 걸음씩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맞다. 세상사람들은 내가 산을 오른다고 봤지만 내 발 밑에서는 서서히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결국 이렇게 됐지. 죽는 일만 남은 것이다.”

“아, 죽음이여, 내게 오라”


▎러시아 화가 I. E. 레핀의 작품 <숲에서 쉬고 있는 톨스토이>. 말년에 이르러서 톨스토이는 성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허름한 옷을 입고 농부와 함께 노동을 하며 제 신발은 스스로 지어 신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 따위를 모르는 주변 사람을 ‘바보’ 혹은 ‘짐승’이라고 몰아세운다.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뭐가 있는 거야? 아무것도 없겠지.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난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이게 죽는다는 것일까? 아냐, 죽음이야. 그래 죽음이지. 저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군. 나에게 일말의 동정도 보여주지 않고 잘들 놀고 있군. 어차피 똑같은 거야. 그러나 그들도 곧 죽잖아. 바보 같은 것들. 내가 먼저 그리고 그들이 나중에 그들에겐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겠지. 지금 저렇게 희희낙락하고 있다니. 짐승만도 못한 놈들.”

인간은 죽음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오직 인간만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동물은 죽음에 대한 사유 따위는 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동물은 삶의 의미나 목적 따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탓에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제쳐놓고 희희낙락하고 있는 사람을 두고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는 임종 순간 타인에 대한 자비심을 갖게 되면서 저를 물고 늘어지던 죽음의 공포에서 홀연히 벗어난다. 아울러 삶의 목적이자 궁극인 선한 의지에서 멀어진 채 오만과 위선으로 얼룩진 삶을 사는 동료에게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 가족이 제 죽음으로 인해 고통받기를 원치 않기에 홀로 죽음을 맞으려 한다. 그러자 통증이 사라지고 알 수 없는 환희가 온몸을 감싼다.

죽음에서 비롯된 공포가 씻은 듯 사라지고 빛이 주변에 가득 찬 것을 느끼며 “죽음은 끝난 거야. 그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라고 낮게 외친다. 이반 일리치에게 죽음을 맞는 순간은 정신적 고양을 일으키는 계기적 각성의 순간이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를 통해 죽음이야말로 실존의 무의미함에서 영적인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써 내려간 것이다.

죽음은 톨스토이에게 결국 구원이었다.

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201603호 (201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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