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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터뷰] 김종인, 가인 김병로를 말하다 

“경제민주화는 조부의 토지개혁 구상에서 비롯된 것” 

글 한기홍 기자 glutton4@joongang.co.kr / 사진 오상민 기자 osang@joongang.co.kr
조부에게 원칙과 결단 배워, 공천 구상 추진에 두려움 없어… 비례대표 할 수도 있지만 당이 구태로 돌아가면 사퇴할 것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는 인터뷰에서 “조부는 자신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지 거두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밝혔다.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 대표가 조부인 가인 김병로의 인생 행로와 자신의 정치철학을 밝혔다. 자신의 경제민주화 소신과 가인의 토지개혁 구상을 연속성을 갖는 테마로 파악했다.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이뤄지지 않으면 사회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온다는 철학이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법원장을 지낸 조부 가인(街人) 김병로에게 양육되었다. 만 네 살이 되던 해(1944년)에 부친 김재열이 지병으로 작고한 이후부터다. 가인 김병로에게는 ‘참척(慘慽)의 슬픔’이었다. 31세의 요절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둘째 아들 재열의 재능은 뛰어났다. 보성전문학교와 큐슈(九州)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변호사 시보까지 마친 상태였다. 변호사 개업을 하기 직전, 그것도 해방을 불과 1년 앞두고 병마로 그만 작고했다.

가인의 집안 내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김재열 변호사가 살았다면 가인의 대를 잇는 큰 법조인으로 성장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김 변호사는 1936년 이필기 여사와 결혼하여 종은(鍾恩), 종현(鍾賢) 자매와 아들 종인(鍾仁) 3남매를 낳았다.

김 대표는 3월호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역시 조부를 꼽았다. 인격적인 흠모와는 별도로 조부에게 배운 것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23세 때인 1963년, 청년 김종인은 당시 통합 야당의 대표 김병로의 비서로 처음 정치를 배웠다. 그는 조부 가인을 “결단력이 강하고 약자를 배려했다”고 회상했다. 김 대표가 학문의 세계보다 정치의 세계를 먼저 경험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종인의 내면 속에서 정치와 학문은 늘 교차하며 성장의 자양분을 맞교환했다. 정치가 현실이고 학문이 이론이라면 김 대표의 사리 분별력은 두 영역을 넘나들며 형성되었을 것이다. 가인이 그에게 처음 정치를 가르친 교사였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표의 확장성이 중요하다”


▎김종인 대표는 “세력을 만들기 위해 더민주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라는 의중을 밝혔다.
인터뷰는 일요일이었던 3월 13일 국회 더민주 대표실에서 이뤄졌다. 김 대표가 가인 김병로의 정치와 경제 철학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궁금했다. 가인의 행보를 보면 김종인 정치 행보의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했다. 더민주 정청래 의원의 공천 탈락이 발표된 직후라 당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날이었다. 13일 시점으로 내일이면 이해찬 의원의 공천 탈락도 발표될 터였다. 아마도 그 시각 김 대표는 이해찬 의원의 탈락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해찬 의원은 결국 탈락하는 건가요?”라고 물었을 때 동석했던 김성수 대변인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가인의 삶을 묻겠다더니 왜 현안에 대한 질문을 하는가, 이런 불만이 얼굴 전체를 가득 메웠다. 김 대표는 짐짓 시치미를 뗐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용기를 내어 다시 채근해보았다.“어차피 내일이면 다 알게 될 텐데요.” 즉답을 피한 김 대표가 갑자기 정색을 했다. “더민주 안의 소위 ‘친노’라는 사람들이 이번 선거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라고 운을 뗐다. 귀가 솔깃했다.

“공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내가 두려움은 없다고. 나는 소신껏 하지 못하면 안 한다고 못박고 온 사람이야. 소위 친노라는 사람들은 선거판 전체를 읽어야 해요. 내년에 문재인 전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 아닌가? 그게 지고의 목표죠. 그걸 달성하려면 표의 조합을 생각해야 된다고. 어떤 표의 조합이 되어야 51%를 획득할 수 있느냐, 그런 확장성의 문제를 생각해야지. 막연하게 친노가 똘똘 뭉치면 집권할 수 있다고 생각해선 소망을 이룰 수 없어요.”

“정청래 의원과 이해찬 의원에게 하시는 말씀이죠?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죠”라고 물었을 때 김 대표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선거의 일반 원칙이라고 했다. “나를 확고하게 지지하는 층만 가지고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 전반적인 선거의 구도를 봐야 해요. 그런 걸 애써 부인하면서 선거 전략을 짠다는 건 진짜 정치를 모르는 사람의 짓이지.”

가인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일제시대 변호사로서 가인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가인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주로 변호했다. 첫째가 시국사범, 즉 독립운동가 그룹이다. 두 번째는 농민과 노동자들이다. 일제강점기 많은 농민과 노동자가 소작쟁의, 노동쟁의로 재판을 받았다. 가인은 이들을 위해 기꺼이 법정에 섰다. 가인은 종종 쟁의 현장을 방문해 실사를 했는데 오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명한 함경북도 갑산 화전민 방화사건 때도 현장을 방문했다. 일제의 만행이었음을 밝혀냈다. 사선을 넘을 뻔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내가 주장하는 경제민주화 철학도 사실은 조부로부터 비롯됐다. 조부는 해방 직후 한민당 창당의 주역을 맡았지만 토지개혁 문제로 당과 결별했다. 한민당 주류는 유상몰수 유상배분을 주장했고, 조부는 유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했다. 당시 소작인이 땅을 살 돈이 어디 있었겠나? 조부는 당시 자본주의 세계의 흐름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경제적 약자를 부양하지 않으면 사회 시스템이 붕괴될 수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도 일본 경제의 재편 원칙이 천명돼 있었다. 이후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을 통치할 때 재벌해체와 독점금지, 농지개혁을 통한 자작농 중심의 농업경영을 관철하려 했다. 패전 독일에서도 콘체른 해체가 이뤄지는데, 콘체른을 해체하지 않으면 시장경제의 효율에도 정치의 민주화에도 장애가 된다는 걸 인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고 스탈린이 베를린을 봉쇄하면서 미국의 관심은 패전국 내부의 개혁보다 집단 방위체제 구축에 쏠렸다. 어쨌거나 조부는 토지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공산화될 위험이 크다고 본 선구자였다. 그때 동유럽 농업국가 거의 전부가 토지 문제를 매개로 급격하게 공산화된 거 아닌가? 경제민주화란 것도 결국 제대로 경제 개혁을 못하면 자본주의 시스템이 위험해진다는 거니까, 조부와 나의 생각은 그 근본이 같은 것이다.”

“토지개혁을 공산주의 막는 보루로 여겼다”


▎1950년대 대법원장 시절 김병로. 소박하면서도 당당한 풍모가 좌중을 압도한다. / 사진·중앙포토
토지에 대한 가인의 인식은 철저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각종 소작쟁의의 변호사인으로서 그는 소작제도의 실상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소작제도야말로 소작인에 대한 수탈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토지의 취득 과정 또한 대부분 수탈의 축적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파악했다. 실제 당시 우리나라의 실정을 보면 남북을 통틀어 490만여 정보 농지 중 60%에 해당하는 295만 정보는 3%도 못 되는 지주가 독점했다. 더구나 이들은 연 30% 이상의 가혹한 소작료를 받고 있었다. 가인은 그 당시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는 유럽의 많은 나라가 공산주의 침투 방지의 일환으로 토지개혁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이 대목에서는 당시 유진오의 증언이 남아 있다. “가인은 자신의 입장을 한민당 지도층에 간곡하게 역설했으나 백안시당했다”는 것이 유진오의 전언이다.

가인은 1963년 박정희와 김종필이 만든 공화당에 대항하는 야당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했다. 군정종식을 그는 부르짖었다. 그때 나이가 77세. 가인은 허정의 신정당, 이범석의 민우당 등과 무조건 합당한다는 원칙에 합의하며 야권통합을 추진했다. 이들은 ‘국민에게 보내는 성명’을 발표하여 국민의 지지를 받는 단일후보를 내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세 당이 통합한 국민의당 창당 발기인 대회가 열려 가인이 대표 최고위원, 이범석과 허정이 최고위원을 맡았다. 김종인은 가인의 비서로 당시 야당 정치권의 이합집산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가인은 박정희 대장의 민정 참여를 막기 위해 분투했는데, 김 대표는 그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이러니다.

“17대 국회 때부터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대통령 감을 찾았는데, 이명박과 박근혜 두 사람 중 박근혜를 더 적임자로 생각했다. 이제는 그런 짓 안 한다. 정치인들은 후보 되기 전과 후보 된 후 다르고, 대통령이 되면 또 달라지더라. 내가 이제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조부는 정치인의 거짓말을 꿰뚫었다. 윤보선 같은 이는 63년 야당 후보 단일화 때 각서까지 썼다. ‘자신은 건전한 야당 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만 하지 대통령 후보나 당직을 갖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바로 파기하더라. 조부에게 물으니 ‘정치인의 각서는 효력을 갖지 못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한국 정치의 서글픈 역사이지만 이게 현실이다.”

결국 63년 대선에서 야당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최근 야당 통합에 실패한 김 대표의 실루엣이 가인의 모습과 겹쳐진다.

“63년 대선은 야당 인사들이 당시 공화당의 다양한 정치공작에 무력하게 넘어갔다. 소위 말해서 ‘사쿠라’가 만발했던 시기였다. 조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상황을 통제할 순 없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조부 역시 윤보선과 허정의 후보 단일화를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봤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과 여론의 압력이 워낙 거셌다. 또 성격상 명분 있는 일을 시작했으니 끝을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부는 자신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지 거두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것이 조부의 스타일이다. 단일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 정계를 떠나고자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막판까지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가인을 추대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는데.

“세 당이 통합한 국민의당의 후보 단일화 협상이 지지부진 해지면서 엄청난 여론의 비판에 직면했다. 대통령 후보지명 대회 전날인 9월 4일 인현동 우리 집에서 윤보선, 허정, 이범석 3인이 모여 최종 조율했다. 이 자리에서 이범석 장군이 조부를 대통령 후보로 밀자는 얘기를 꺼냈다. 이때 조부께서 단호하게 거절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거일을 10일 앞두고 허정 후보가 사퇴해서 자동적으로 단일화가 이뤄졌다. 하지만 야당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투표일을 맞았다. 그럼에도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 간의 표 차는 불과 13만 5000표 정도밖에 나지 않았다. 만일 후보 단일화가 순조롭게 이뤄졌다면 한국 현대정치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경제민주화 추진할 대통령감 아직 못 찾아”


▎1965년 1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1주기 추도식 장면. / 사진·중앙포토
9월 4일 가인을 포함한 4인의 후보 단일화 협상 최종 조율 현장을 참관하지 않았나?

“지금하고 상황이 비슷하다. 3당이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를 나눠 갖는 협상은 이미 끝나 있었다. 조부와 윤보선, 허정, 이범석 등이 모여 단판을 짓는데 결론이 나지 않았다. 윤보선, 허정 두 사람 중 누구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때 이범석 장군이 두 사람에게 일갈했다. ‘도대체 당신들은 날 때부터 대통령 후보였소?’ 윤보선, 허정 두 사람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에 대권 욕심으로 당을 나간 안철수의 모습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가인의 운명처럼 내년 대선 때 야당 후보들을 단일화하는 일을 맡게 되지 않을까?

“유력 정치인이란 사람들의 말을 이제 잘 믿지 못하겠다.”

경제민주화라는 철학을 정책으로 입안해 추진할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나?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유력 정치인을 만나 대화를 해봤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문재인 전 대표도 좀 부족하다는 의미인가?

“좀 부족한 게 아니라 많이 부족하다. 더 공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손학규 같은 정치인은 어떤 자질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나?

“몇 차례 대화를 나눠 봤는데 아직 충분히 준비된 사람으로 느끼진 못했다.”

경제민주화가 중요한 가치라면 그것은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에게 필요하기 때문 아닌가? 그런 철학을 실천할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본인이라도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나보고 대선에 나가라고?”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갖췄다는 평가도 있다.

“정치적으로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다. 내가 특정한 목표를 갖고 이 당에 들어온 게 아니다. 사심을 갖고 이 당에 들어왔다면 지금처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세력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례대표 불출마를 선언하는 것이 분명한 의지의 피력이지 않나?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과거 네 번이나 했다. 그게 내게 무슨 매력이겠나? 문재인 대표가 내게 당을 맡아달라고 할 때도 비례대표 2번을 제안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맡을 수 없다고 화를 냈다. 그러나 아직 단언하진 않겠다. 내가 비례대표를 혹시 맡게 된다면 그건 내 욕심 때문에 맡는 것이 아니다. 설사 내가 비례대표를 맡는다 해도 당이 옛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1초도 당에 머물 생각이 없다.”

“가족에 대한 애착으로 욕심이 승하는 것 경계”

가인의 삶을 돌아볼 때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6·25 때 고향으로 피란 간 부인을 공비들이 희생시킨 일이다. 왜 부산 피란지로 같이 데려가지 못했을까?

“공과 사를 엄격히 가렸던 분이다. 1950년 6월 27일 아침 가족들을 모아놓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나는 국가에 속한 몸이니까 정부가 가는 곳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나로 인해 혜택을 받을 생각을 해선 안 된다.’ 그래서 할머님이 친정인 전남 담양으로 가셨는데, 9·28 수복 며칠 뒤 마을을 덮친 공비들에 의해 무참히 사살되었다.”

조부의 슬픔이 컸겠다.

“슬픔을 내색하지 않는 분이다. 가족주의란 게 없는 분이다. 가족에 대한 애틋한 생각으로 다른 일에 욕심을 내거나 그르치는 일을 극력 피하셨다. 소소한 정을 절대로 내비치지 않았다. 자손들의 장래에 대해서도 담담했다. 능력이 있으면 추구하되, 능력이 없으면서 뭔가에 욕심 내는 일을 싫어하셨다. 사람이란 원래 능력에 걸맞게 사는 것이란 철학이 확고했다. 그러니 가족에 대한 애착 때문에 욕심이 승하는 일이 없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가인의 생각은 더 강화된 것인가?

“조부는 일제 때 신간회 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 세력 내 좌우 합작운동에 큰 힘을 쏟았다. 해방 직후에도 중도 노선을 걸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반공 의식은 굉장히 강했던 분이다. 해방 직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지금의 창동)에 같이 살던 벽초 홍명희와 사상에 대한 소회를 나눈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이미 벽초는 북으로, 가인은 남에 남아야 하는 이유를 서로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할머님이 공비의 흉탄에 돌아가신 일이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론 내색하진 않으셨다. 그 일이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도 부지불식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군 입대를 면제받았다. 그럼에도 군에 간 이유는 무엇인가? 조부의 권유가 있었나?

“구체적으로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그런데 조부께서는 남자는 태어나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다. 내가 혹시 군대에 가지 않을까 염려하며 하셨던 말씀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분위기를 미리 감지한 것이다. 신체검사 통지서가 나오기도 전에 군에 자원입대해 육군본부와 임진강 근처 20사단에서 근무했다.”

가인이 양주로 이주한 때는 1930년대 초중반 무렵이다. 당시 일제가 민족 지도자급 요인에 위해를 가한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이후 많은 민족 지도자가 이곳을 찾았다. 북쪽으로는 도봉산, 동쪽에는 중랑천, 서쪽에서 남쪽으로는 우이천이 흐르는 곳이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이면서도 경원선의 창동역이 있어서 경성을 오가기에도 편리했다. 가인이 이곳에 거주하게 된 것이 다른 민족 지도자들의 이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인의 이주 이후에 고하 송진우,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등이 연이어 이사를 오게 되었고, 이들의 거주지에 한용운, 안창호 등 여러 지도자가 찾아오게 됐다. 이들은 모두 일제의 요시찰 인사였다. 이들이 창동에 거주하면서 양주 경찰서에 고등계가 설치되었고, 창동 주재소에는 고등계 형사가 상주했다고 한다. 전쟁 말기 일제의 탄압이 더욱 거세지면서 이들 중 일부는 창동을 떠나 아예 시골로 낙향하기도 했다.

“경제 정책도 부작용 두려워 결단 못하면 화 당할 수도”


▎김병로의 묘비석. 묘소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둘레길 2구간인 순례길 가에 있다. / 사진·주미영
가인은 사법부의 기초를 닦으며 반민특위 재판을 이끌던 1949년 10월 왼쪽 다리에 신경통이 발병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으나 골수염으로 판명되었고, 1950년 2월 왼쪽 다리의 무릎 이하를 끊어내는 큰 수술을 받았다. 김 대표는 조부가 투병했던 당시의 상황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조부의 다리 절단 수술을 보며 느낀 게 있다. 무엇이든 과단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원래 조부의 주치의가 있었는데 그 양반이 조부를 너무 무서워했던 것 같다. 조부의 용태를 있는 그대로 진단하고 의사로서 신속하게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발가락 몇 개를 절단하는 선에서 치료가 끝났을 것이다. 그것을 살리기 위해 결단을 미루다가 큰일을 낸 것이다. 그때 상황이 너무 크게 뇌리에 박혔다. 어떤 일에 직면해서 두려움에 조치를 미루면 언젠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진다는 교훈이다. 경제정책도 마찬가지다. 부작용이 두려워 결단을 못 내리면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인의 품성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내가 그분에게 가장 탄복한 건 의무를 가장 성실하게 수행하는 공적인 인간이란 측면이다. 지금도 기억난다. 대법원장 시절에도 퇴근할 때 서류를 한 보따리씩 가지고 오셔서 저녁 식사 후 자정 무렵까지 그 기록을 검토하곤 했다. 학생이나 교수보다 더 열심히 연구했다. 대법원장 겸 법전편찬위원장을 맡았는데 위원들이 게으름을 피워 쌓인 일을 다 떠안고 처리했다고 한다. 집에서는 펜에 잉크를 묻혀 법 조문을 적곤 하셨다. 볼펜도 없을 때였다. 기초 자료가 변변찮으니 40년 동안 머릿속에 간직해온 법률 지식을 써 내려간 거다. 생활인으로는 굉장히 검소하고 엄격했다. 내가 가장 사랑받는 손자였음에도 일절 어리광을 부릴 수 없었다.”

가인의 검소함과 관련해서는 에피소드가 수없이 많다. 반 토막 난 수정도장 삽화가 대표적이다. ‘金炳魯’가 새겨진 수정도장은 대법원장 취임 후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수정 윗부분이 부러져 반 토막이 되었다. 초기에는 결재할 때 이 도장을 직접 찍었으나 후에는 가인이 직접 보는 앞에서 관계자에게 찍도록 했다. 반 토막 도장이니 찍는데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직원이 “결재 도장 하나 파시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했지만 가인은 “그것 하나 제대로 찍을 기술이 없나”라고 웃어넘기는 바람에 다시는 도장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가인 선생을 생각할 때 잊을 수 없는 장면 하나를 떠올린다면?

“장면 총리가 문병을 오셔서 할아버지에게 ‘인촌 김성수 선생도 돌아가시기 전에 종부성사를 했으니 당신도 하시라’고 권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내가 인생을 잘못 산 게 없는데 죽으면서 남의 신세를 지라고 하느냐’고 잘라 말씀하셨다. 장면 총리가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했던 기억이 난다.”

가인의 묘소는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순례길 안에 있다. 김 대표는 “가인(街人)이라는 호 때문인지 당신의 묘소만 등산로 옆 길가에 있다. 등산객들이 돌아가는 게 싫으니 산소를 밟고 지나가 훼손이 되곤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뜻이라서 그대로 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가인이 쌓은 음덕이 김 대표의 총선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 글 한기홍 기자 glutton4@joongang.co.kr / 사진 오상민 기자 osang@joongang.co.kr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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