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21)] 천하를 쥐려 한 갑신정변 주역들의 ‘패착’ 

성패 열쇠인 정규병력 규합하는 데 소홀했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김봉균·이규완·이희정 등 박영효의 겸종으로 특채돼 고종 감시 등 ‘특공대’ 역할 맡아… 거사 실패 후 일본정부 책임 회피 급급한 가운데 조선은 급속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의 우정국 건물 전경(서울 안국동 부근). 1884년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장소로 유명하다. / 사진·중앙포토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에서 핵심 주도자였던 박영효와 김옥균. 그들은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해 목숨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들을 믿고 정변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은 체포된 후 혹심한 고문을 받고 능지처참됐다. 특히 친청(親淸)파 대신들을 살해하고 고종을 감시하는 등 온갖 악역을 담당한 사람들은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으로 간주돼 일족이 몰살되는 참화를 입었다. 그중에서도 고종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주인공은 김봉균·이인종 그리고 이희정 3명이었다.

이 중에서 김봉균과 이희정은 갑신정변 직후 곧바로 체포돼 조사를 받고 참형을 당했다. 그 소식을 들은 고종은 “김봉균은 경우궁에서부터 늘 내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던 자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원통하다. 지금 그자를 참형했다고 하니 분이 조금 풀린다”는 말까지 했다.


▎1885년 초 일본 망명 시절의 갑신정변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웬만하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고종이 이 정도의 분노를 표출했다는 것은 미움이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었다. 고종은 이인종과 이희정에 대해서도 “지난번 문을 파수(把守) 하면서 사람들을 금지하던 자들이다. 괴수는 아직 체포하지 못했지만 이 역적들을 법에 따라 처벌했으니 또한 통쾌하다”고 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런데 김봉균·이인종 그리고 이희정은 모두 박영효의 최측근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갑신정변에서 고종을 밀착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민씨 일족을 암살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의 역할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박영효의 측근이라는 사실 외에도 정변에 가담한 조선 측 정규군이 거의 없었던 탓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본래 김봉균은 박영효의 겸종(傔從)이었는데 겸종이란 청직(廳直)과 같은 말이었다. 겸종은 노비 중에서 선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신체 건장하고 무술 잘하는 평민 중에서 특채하기도 했다. 그런 겸종은 말 그대로 양반의 최측근이자 경호원이었다. 예컨대 흥선대원군의 섭정 시절에 통칭 천하장안(天河張安)으로 불리며 세도를 부리던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 같은 이들 역시 겸종이었다.

김봉균은 23세 되던 1880년에 박영효의 겸종으로 특채된 후 경호원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박영효는 바로 이 김봉균을 시켜 갑신정변 중에 고종을 밀착 감시케 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김봉균에 대한 신뢰가 컸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하겠다.

김봉균과 더불어 박영효의 신임을 받은 겸종 중에는 또 이규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김봉균보다 세 살 아래였고 역시 특채 겸종이었다. 그는 갑신정변 와중에 김봉균 못지않은 활약을 벌이다가 정변 실패 후 박영효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해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이후로도 평생 동안 박영효에게 충성을 바쳤다.

전국의 보부상 조직 쥐락펴락했던 이인종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있는 김옥균의 묘지. 일본인들은 망명한 김옥균을 냉대하다 그가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자 머리카락과 의복 일부를 가져다 묘소를 만들었다. / 사진·중앙포토
그런데 이인종은 김봉균·이규완과 달리 박영효의 겸종이 아니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인종은 종5품인 훈련원 판관까지 지냈으며 임오군란 직후 금위영 초관(哨官)으로 퇴직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그는 무관 출신의 양반이라 할 수 있다.

군에서 퇴직한 이후에 이인종은 박영효의 가인(家人)으로 불렸는데 가인이란 박영효의 집에 드나드는 측근이란 뜻이다. 이런 인연으로 박영효는 이인종을 혜상공국(惠商工局)의 소임(所任)으로 만들었다. 당시 혜상공국의 소임은 조선의 돈과 무력을 주무르는 실세 중 실세였다. 왜냐하면 혜상공국은 보부상(褓負商)을 관할하는 최고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보부상은 봇짐장사인 보상(褓商)과 등짐장사인 부상(負商)을 합친 말로 이들이 조선시대 유통업을 장악했다. 유통업이라는 특징에다 봇짐장사와 등짐장사라는 특징이 더해진 보부상은 수도 많았고 용맹한 사람도 많았다. 조선후기 들어 약 3000개에 달하는 장시를 돌아다니며 유통업에 종사한 보부상은 줄잡아 10만 명이 넘었고, 한양에만도 수천 명의 보부상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보부상의 돈과 무력을 장악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전국적인 보부상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혜상공국이었다. 혜상공국의 최고 책임자는 명목상 당상관이었지만 행정실무는 바로 소임이 맡았다. 전국의 보부상에게 유통면허를 내주고 이들로부터 세금을 받는 등의 실무를 바로 소임이 집행했던 것이다.

박영효의 가인이자 혜상공국의 소임인 이인종은 보부상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에게는 박영효의 신임에다 보부상의 유통면허 발급이라는 절대권력이 있었다. 이인종은 동대문 안쪽에 살았기에 그 주변의 많은 보부상이 그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다. 이희정 역시 이인종과 같은 동네 사람으로 그와 결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다. 이런 인연으로 박영효는 이희정 역시 깊이 신임했고, 이런 신임을 배경으로 갑신정변 때 이들로 하여금 고종을 측근에서 감시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박영효는 이인종을 매개로 동대문 주변의 보부상 중에서 힘이 세고 무술이 뛰어난 장사들을 측근으로 끌어들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윤경순·계완 형제였다. 박영효의 겸종으로 특채된 이규완 역시 보부상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는 나무 장사꾼이었고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꾼이었다. 이규완은 태껸의 명수로 이름이 자자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어느 날인가 박영효가 그의 집에 쌀을 한 섬 보냈고, 이에 감동한 그의 아버지가 인사를 드리라고 해 박영효를 찾아가 “쌀을 보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인연이 맺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이규완의 사람들을 알아보고 쌀을 보내게 한 사람은 이인종이었을 듯하다. 이런 식으로 박영효에게 포섭된 장사는 이규완을 비롯해 윤경순·계완 형제 그리고 최은동·황용택 등 30명 정도 됐다.

박영효가 이렇게 많은 장사를 포섭한 이유는 암살단으로 써먹기 위함이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성공적인 역모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역모를 성공시킨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한양이나 한양 주변의 정규군 2000명가량을 포섭해 주력군으로 이용했다. 이들 외에 측근 경호원이나 암살요원으로 쓰기 위해 포섭하는 장사는 10명 안팎이었다.

이에 비해 박영효와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모의하면서 정규 병력을 거의 포섭하지 못했다. 그 대신 암살단 30여 명을 위시해 일본 육사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관생도 14명 그리고 신복모와 윤계완을 통해 포섭한 전영(前營)의 정규 병력 50명가량이 전부였다. 이렇게 보면 갑신정변에 동원된 조선 측 병력은 다 합해도 100명이 되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 주력은 역시 30명 정도의 암살단이었다.

조선을 ‘취업시장’으로 삼으려 했던 일본의 꼼수


▎갑신정변에 즈음해 일본에서는 실직한 사무라이들이 넘쳐났다. / 사진·중앙포토
박영효와 김옥균이 암살단을 중심으로 정변을 추진한 이유는 바로 일본의 고토 소지로(後藤象次郞)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김옥균은 1882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有吉)의 주선으로 고토를 만났는데 그때 고토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100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를 모은 후 조선으로 건너가 일거에 잡배들을 물리치고 조선을 태산과 같이 안전한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고 약속했다.

고토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본 내에서 군자금과 동지들을 모았다. 그런데 이때의 동지는 다름아니라 정변에 동원될 자객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메이지유신의 여파로 실직한 사무라이(侍)들이 넘쳐났다. 그들은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기에 낭인(浪人)이라고 불렸다.

그들 중 일부는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이 일본도 살고 자신도 사는 길이라고 해 조선이나 중국으로 진출하고자 했는데 그들을 대륙낭인이라고 했다. 고토는 후쿠자와와 의논해 대륙 낭인 수십 명을 모았고 나아가 군자금 100만 엔도 마련하고자 했다. 고토 그리고 후쿠자와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김옥균을 돕고자 한 이유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일본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후쿠자와는 그런 사실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예컨대 후쿠자와 자신이 운영하는 <시사신보(時事新報)>라는 신문에 쓴 사설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

“(조선을 원조함으로써) 조선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지위를 얻게 하면 그 이익이 특히 크다고 할 것이다. 일본에 양학(洋學)이 들어온 지 벌써 오래됐고 특히 개국한 지 30년 만에 급속히 면목을 갖추게 돼 공·사립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사람도 적지 않고 지금 공부를 마치려 하는 사람도 많다. 이는 분명 문명교육의 성과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인물을 막상 쓰려고 하면 전국 어디에서도 쓸 곳이 없다. 인간의 학술은 이미 숙성해 있지만, 그들에게 적합한 일자리가 없어 어려워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이는 그 본인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지식인이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또한 그 사람의 마음도 안정되지 못해 어떤 때는 시끄럽게 물의를 일으켜 나라의 정치를 불편하게 하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 이런 사람들을 조선으로 보내 좋은 일자리를 얻게 하게 하는 것은 흡사 우리에게 남아돌아 곤란한 것으로 상대편이 부족해 곤란한 것에 보충해주는 것과 같아서 서로에게 유익하다.”(후쿠자와 유키치 <시사신보> 1883년 6월 5일)

이 주장처럼 고토와 후쿠자와가 김옥균을 돕고자 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일본에 남아도는 인력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함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실직한 사무라이들뿐만 아니라 학업을 마쳤지만 취업하지 못한 예비 취업자가 넘쳐났다. 이들이 사회 불안뿐만 아니라 정치 불안도 야기했다. 이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정치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딘가에서 거대한 취업시장을 확보해야 했다. 고토와 후쿠자와는 조선을 원조함으로써 조선을 취업시장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토와 후쿠자와의 조선 원조론은 방법만 달랐지 1870년대의 정한론(征韓論)과 같은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정한론은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 실직한 사무라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자 한 것이었다면, 고토와 후쿠자와의 조선 원조론은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실직한 사무라이들 그리고 새로 학업을 마친 취업 준비생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민간 사회에서 고토와 후쿠자와의 영향력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100만 엔을 쉽게 확보할 수는 없었다.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고토는 1년 가까이 노력했지만 일본 민간에서 100만 엔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884년 여름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베트남 영유권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었다.

청나라는 건국 이래로 베트남 국왕을 임명함으로써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1874년 3월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력을 받고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의 첫 번째는 ‘프랑스와 베트남은 영구 연맹하며 프랑스는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형식적으로 베트남의 자주독립을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는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영유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는 등 강력하게 항의했고, 1883년에는 국지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양국간의 무력충돌은 점차 확대됐다.

그 결과 리훙장(李鴻章)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투입할 병력을 요동 지역에서도 차출했는데 이것이 조선의 정치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리훙장은 요동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한양에 주둔하던 3000명의 병력 중에서 절반을 요동으로 이동, 배치했다. 그때가 1884년 5월.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의 전면전은 시간문제였다.

고토 소지로, 프랑스에 100만 엔 요구


▎청일전쟁 개전 소식을 듣고 술렁거리는 서울 거리의 외국인들. 당시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1894년 8월 13일자)에 실린 삽화다. / 사진· 중앙포토
고토는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했다. 고토는 도쿄의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 만약 프랑스에서 자신에게 100만 엔의 자금과 동양함대의 함선을 빌려주기만 하면 자신은 이것을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가 개화파를 원조해 친일정권을 수립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프랑스는 두 가지 점에서 큰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첫째 이익은 현재 프랑스는 청나라와 전면전을 앞두고 있는데 만약 조선에 반청적인 친일정권이 수립된다면 리훙장은 최대 해군력인 북양해군을 동원할 수 없으므로 프랑스가 승리하리라는 것이었다. 둘째 이익은 만약 조선에 반청적인 친일정권이 수립되면, 고토 자신이 나서서 조선과 프랑스의 통상을 주선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1866년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프랑스에 대한 인식이 나빠져 그때까지 프랑스와 통상하지 않고 있었는데 고토는 이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요컨대 고토는 자신에게 100만 엔의 군자금과 동양함대의 함선을 잠시 투자하면 베트남에서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에서의 통상이라는 큰 이익을 안겨주겠다고 유혹한 것이었다.

이것은 프랑스 입장에서도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100만 엔과 동양함대가 비록 큰돈이고 큰 무력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을 아주 주는 것도 아니고, 잠시 빌려주기만 하면 베트남에서의 승리와 조선에서의 통상이라고 하는 거대한 이익이 확보된다는데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주일프랑스 공사는 긍정적으로 답변하면서 본국에 회신해 가부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 같은 고토의 처신은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망동이었다. 그는 일개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조선 내부의 정권교체와 외교통상 문제를 놓고 프랑스 공사와 담판을 벌였다.

고토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옥균과의 약속, 즉 친청파를 몰아내는 대가로 자신이 조선의 고문이 되겠다고 한 약속 때문이었다. 김옥균은 조선의 자주독립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고토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고토는 그 요청을 빌미로 자신이 이미 조선의 고문이고 또 그렇기에 조선의 주권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옥균은 자신을 돕기로 한 고토가 조선의 주권을 가지고 이런 망동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토는 주일프랑스 공사와 몇 차례 담판을 벌인 결과 100만 엔과 동양함대 사용은 시간문제라는 답변을 들었다. 고토는 곧 조선으로 넘어갈 준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참의겸궁내경(參議兼宮內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토의 집을 방문했다. 고토는 취중 담소 중에 주일프랑스 공사와의 담판 내용을 떠벌렸다.

장고(長考)에 들어간 이토 히로부미의 선택은?


▎청말의 정치가로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했던 리훙장. / 사진·중앙포토
고토는 자랑삼아 한 얘기지만 이것은 일본정부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중대한 사안이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에 중립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길지 알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혹 청나라가 진다고 해도 청나라와 적대국이 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그런데 만약 고토가 프랑스의 군자금과 동양함대를 빌려 조선으로 가서 친일정권을 수립한다면 일본으로서는 청나라와 적대국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그럴 경우 일본의 정치와 외교는 고토를 비롯한 자유당 관계자들이 주도하게 되고, 일본정부는 사후 수습이나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토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외무경인 이노우에 카오룬(井上馨)과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조선에서 일본 이익을 최대화하는 대신 위험요소는 최소화할 것인지 고민했다. 즉 조선에서의 국익을 최대화하면서 동시에 청나라와의 적대관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결론은 고토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대신 일본정부가 전면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다만 조선에서의 정변이 성공할 가능성과 실패할 가능성이 다 있기에 양쪽 모두를 상정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일본정부의 개입을 공식화하고, 실패하면 일본정부의 개입을 부인한다는 것이 대책이었다. 결국 조선에서의 정변에 적극 개입하면서 결과에 따라 인정하거나 부인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1884년 10월 30일 한양에 도착했다. 다케조에는 현재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청나라는 결국 패배할 것이며, 일본정부는 프랑스를 도와 참전할 예정이라고 큰소리쳤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하루속히 친청정책을 폐지하고 친일정책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위협했다.

다케조에는 일본 공사관의 병력을 동원해 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당시 청나라 군대가 프랑스 군대에 연전연패하는 상황에서 다케조에의 협박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영효·김옥균 등은 고토의 도움을 받기로 한 기왕의 계획을 변경하고 다케조에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훗날 박영효는 당시의 정변계획을 요약해 이렇게 회상했다.

“1. 비상수단으로써 민영익 이하 사대당의 거두를 제거해 청국의 간섭을 끊고 독립국의 체면을 바로 잡을 것.

2. 궁중의 요망한 무리를 소탕하고 민비의 정치 간여를 금지할 것.

3. 주상에게 요청해 튼튼한 책임 내각을 조직하게 할 것.”(박영효, <갑신정변>, 1926)


위에서 ‘민영익 이하 사대당의 거두를 제거한다’는 것은 당시 친청파의 핵심인물인 민영익·윤태준·이조연·한규직 등을 암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양의 핵심군사력인 4영의 영사(營師)로서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제거하면 민씨 척족 세력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정치권력 그리고 군사권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변의 성패는 바로 이들 4명을 성공적으로 암살하느냐 아니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따라 박영효와 김옥균은 이들을 암살하기 위해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30여 명의 조선 암살단 중에서도 무예와 담력이 뛰어난 자들을 암살자로 선발했다. 그 결과 민영익의 암살자로 윤경순과 이은종이 선정됐고, 윤태준의 암살자로는 박삼룡과 황용택, 이조연의 암살자로는 최은동과 신중모, 그리고 한규직의 암살자로는 이규완과 임은명이 선정됐다. 이인종은 암살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고 현장에서 지휘하기로 했다.

하지만 박영효와 김옥균은 이것으로도 불안했다. 왜냐하면 조선 암살자들은 주먹질은 해봤지만 살인까지는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암살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 일본인 자객 4명을 불러 이들이 조선 암살자들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손을 쓰게 했다.

청(淸) 간섭 심해지고 개화운동은 역적질로 간주돼


▎1909년 11월 5일 일본 도쿄에서 치러진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그는 조선에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 사진·중앙포토
갑신년 12월 4일 박영효와 김옥균 등은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계획대로 윤태준·이조연·한규직 등은 암살했지만 민영익은 암살하지 못했다. 조선의 암살자들이 서툴렀기 때문이다. 정변을 일으킨 박영효와 김옥균은 3일간 권력을 잡았고 그동안 이인종·김봉균·이희정 등이 고종을 밀착 감시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의 군사개입으로 실패했다. 정변에 참여했던 조선 암살자들 중 일본으로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체포돼 참수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정부는 모든 책임을 부인했다.

그 결과 갑신정변의 모든 책임은 박영효와 김옥균 등의 개화파 그리고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오판으로 귀결됐다. 아울러 조선에서 청나라의 간섭은 더욱 심해졌고 개화운동은 곧 역적질로 인식됐다. 결국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내세웠던 갑신정변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로 조선의 퇴보를 초래했던 것이다.

<대학연의>에는 ‘간웅절국지술(姦雄竊國之術)’이라는 항목이 있다. 자고로 나라를 훔치는 간웅은 제왕의 탐욕이나 공포심, 조바심 같은 허점을 파고들기에 이런 탐욕이나 공포심·조바심 등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 또는 대사를 도모하는 자는 탐욕이나 공포심·조바심 같은 허점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상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상태 나아가 천하형세까지도 냉정히 분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간웅절국지술’의 교훈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609호 (2016.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