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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사회부문 | 박은정 경희대 동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잡념 없는 무모함으로 달성한 세계 1% 과학자 

글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sunny@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선임기자 kgboy@joongang.co.kr
가족들의 잇단 질병 원인 찾아 환경독성 연구 시작
생활보다 연구비 조달이 더 고통스러운 기초과학자의 삶


▎제10회 ‘홍진기 창조인상’ 사회부문 수상자 박은정 경희대 동서의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가족의 질병조차도 과학으로 승화해낸 진짜 과학자다.
기자로 30년을 살면서 만난 사람이 참 많다. 하지만 ‘이 사람은 진짜다’ 하고 확 뇌리에 박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러다 이번에 ‘진짜’를 만났다. 박은정(52) 경희대 동서의학전문대학원 교수다. 박 교수는 제10회 ‘홍진기 창조인상’ 사회부문 수상자다. 그를 인터뷰하게 된 것도 이 시상식이 계기가 됐다. 궁금했다. ‘과학자인데 왜 과학기술부문이 아닌 사회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을까?’

‘2016년부터 연구 성과 세계 상위 1% 연구자’(HCR, Highly Cited Researcher)에 3년 연속 선정된 기초과학자, 한국연구재단 주관 대통령 포스닥 펠로우십(2011~2016), 2015년 ‘지식창조대상’ 수상자.

박 교수의 이력은 기초과학자로서 군더더기 없이 훌륭했다. 한데 인터뷰 전 사전조사를 하다 그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경단녀 비정규직 출신 과학자’라는 사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5겹 유리천장에 갇혔지만, 세계 1% 논문 쓴 경단녀 박사’(중앙일보, 2017년 11월18일자)라는 기사를 통해서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존에 알려진 내용들은 이렇다. 여성·흙수저·경력단절·만학·비정규직이라는 겹겹의 장애요인들을 딛고 과학자로서 성공했다는 스토리. 소위 비명문대인 동덕여대 출신으로 파트타임 잡과 주부로 살다 마흔이 되어서야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다.

성장과정과 가족사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어느 초등학교를 다녔고 졸업했는지도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부모님이 생활고에 몰려 이사를 다니다 보니 전학을 많이 다녀서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비를 못 내 교실 뒤에서 단골로 손들고 서 있었고, 대학 입학 당시 장학금을 받았지만 먼저 등록한 후 장학금을 준다는 학교 방침 때문에 일수 이자로 돈을 빌려 등록한 후 장학금을 받아 갚기도 했다.

경단녀 출신으로 HCR에 올라 주목받기 시작


▎박은정 교수가 ‘독성학’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는 암과 치매를 동시에 걸린 시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지난 20여 년간 가족의 질병도 끊이지 않았다. 10개월 된 아들이 탈장 수술을 받은 후 두 차례나 수술이 이어졌고, 이후에도 면역력이 약해진 아들을 돌봐야 했다. 그러고는 아들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박사과정을 준비하는데 친정어머니가 췌장암에 걸렸다. 친정에 들어가 병구완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이번엔 시아버지가 식도암에 걸렸다. 친정에서 싸온 짐을 그대로 시댁으로 들고 들어가 다시 시아버지 병구완을 시작했다. 5년여 만에 시아버지가 완치되셨다 보나 생각하고, 미뤄두었던 박사과정을 시작하던 무렵 시아버지가 다시 치매·중풍으로 쓰러졌다. 결국 남편이 회사를 사직하고 아예 간병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14년간 남편은 시아버지 간병에 매달렸고, 그는 연구와 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그런데도 과학자로서의 업적은 공부에만 매진해온 과학자들을 앞질렀다. 여성 과학자로는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에 이어 두 번째로 지식창조대상을 받았고, HCR에 3년 연속 선정됐다.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해낸 일이다.

그는 2017년 HCR 시상식에 참여했다가 그 자리에 왔던 기자에 의해 그의 사연이 소개됐고, 그 시상식에서 만난 경희대 부총장의 추천으로 나이 쉰 살에야 경희대에서 정규직 교수가 되었다. 시상식에 갈 때만 해도 연구비를 더 조달할 데가 없어서 남의 연구실 한 귀퉁이를 빌려 하던 연구마저 끝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등바등 지탱하던 연구를 내려놓기 직전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참석했던 그 시상식에서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까지가 대충 알려진 스토리다.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해 가졌던 관심은 달랐다.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엔 성공적인 전문직 여성들을 업적이 아닌 인간승리 스토리로 엮어내려는 강한 동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암울한 현실과 가족사의 불운 등 각종 역경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한 여전사형 성공스토리 같은 것 말이다. 셀수록 먹힌다. 실제로 박 교수는 이 ‘센스토리 프레임’에 맞춤한 사례이긴 했다.

하지만 원래 ‘프레임’을 통해서 보면 그 프레임 밖의 진짜 사연과 사람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이런 스토리에 갇혀 HCR에 3년 연속 선정된 과학자로서의 그의 업적과 진면목이 희석된 것은 아닌지. ‘진짜’ 그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박 교수를 만나선 내 질문은 거의 하지 않고 박 교수가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도록 하고, 나는 듣기만 하는 인터뷰를 했다.

다섯 시간 넘게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는 그저 ‘진짜 과학자’라는 것. 가족의 질병조차도 과학으로 승화해낸 진짜 과학자 말이다. 또 하나는 그에게 진짜 고난과 역경은 기초과학을 육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만 높인 지 기십 년 되는 대한민국에서 기초과학자로 산다는 것 그 자체로 보였다. 장기 연구를 해야 하는 기초과학에 찔끔찔끔 연구비를 줬다 안 줬다 하면서 애를 태우는 정책. 웬만한 내공이 아니면 누가 버틸 수 있을까.

여성·흙수저 출신은 그에 비하면 장애 축에도 못 끼는 걸로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의아했던 것 같다. 왜 이런 과학자를 휴먼스토리로 풀려는 것일까.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과학자인데 사회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것을 본인은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서. 그의 대답은 페미니즘이 가미됐던 내 생각과는 사뭇 달랐다.

“‘아, 살았다’ 하고 생각했죠. 어떤 부문의 상인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상금으로 5000만원을 받게 된다는 게 중요했죠. 그저 감사했어요. 실제로 2년 동안 연거푸 한국연구 재단에 신청했던 중견과제에서 떨어져 연구비가 바닥났고, 언제까지 실험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암울해하고 있던 중이었거든요.”

박 교수는 ‘환경성 질환’ 랩을 꾸리고 있다. 환경에서 유래한 유해물질이 인체에 어떤 질병을 어떻게 일으키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그의 목표다. 말하자면 가습기 살균제의 인체 유해성을 밝히는 실험 같은 것 말이다. 이를 위해선 동물실험을 주로 하다 보니 실험용 동물과 사료 비용부터 실험을 도와주는 학생들 인건비까지 만만찮게 돈이 들어간다. 재료비가 떨어지면 연구는 중단할 수밖에 없다.

“작년에 연구비 신청에서 떨어졌을 때는 소리 내서 펑펑 울었는데, 올해는 머리가 하얘지고 기운이 없어 그냥 드러누웠죠. 그렇게 머리가 소파에 닿는 순간부터 소리도 없이 눈물만 흐르더군요.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월급을 쪼개서 재료비를 충당하고, 학생들 인건비 대신 용돈이라도 주면 몇 달을 버틸 수 있을까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이렇게 ‘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 수상 소식이 들렸으니 “온 우주에 감사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금을 연구비 명목으로 묶어서 꼬리표를 붙여 보내달라고 재단에 요청해 지금 작업 중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인간인 나를 믿지 못해서”라고 했다. 개인 돈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생활용도로 써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될까봐 아예 처음부터 자신이 손을 댈 수 없는 연구비 명목으로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는 늘 벼랑 끝으로 몰리는 삶을 산 것 같아요. 그리고 ‘아, 이제 여기서 떨어지는구나’ 하는 순간 늘 다른 길이 열렸고, 그 길로 가다 보면 또 다른 벼랑을 만나고….”

실험이 각종 번뇌 잊게 하는 만병통치약


▎박은정 교수는 연구를 위해 연구비 조달에 골머리를 앓은 진짜 ‘기초과학자’다.
실제로 그는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환경독성 연구로 자기 실험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연구보다 연구비를 조달하는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했다. 또 이런 골치 아픈 문제는 실험을 하면서 잊어버리고.

그런데 이런 힘든 세월을 산 그의 얼굴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해맑다. 첫인상은 맑고 반짝반짝했다. 언어는 비관적이지 않았고 지나친 감사와 겸양의 표현이나 자기 위안도 없었다. 혼자서 얘기하도록 놔두면 온통 눈을 빛내며 실험 얘기만 했다.

4000만원짜리 마이크로웨이브라는 실험 장비를 사지 못해서 수작업으로 만든 실험도구로 실험하면서 산(Acid)에 많이 노출돼 손에 화상을 입고 머리카락이 다 부서졌다는 얘기, 독성실험을 위해 쥐에 물질을 주입할 때는 정확하게 목에 있는 혈관에 찔러야 하는데 어떤 부위를 찔러야 하는지 몰라서 아예 쥐를 해부해 충청도에 있는 어느 교수님께 가져가 물어봤다는 얘기,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실험실로 쌀 한 가마니 무게의 샘플러를 옮기는 요령…. 그가 실험 얘기를 하는 동안 느껴졌던 즐거운 에너지에 절로 동화되는 바람에 나는 듣고 옮기지도 못할 실험 얘기를 한 시간 넘게 들어줬다.

“실험은 시쳇말로 ‘노가다’예요. 몸으로 하는 거죠. 나처럼 흙수저에 험하게 자란 사람이 훨씬 더 경쟁력 있어요. 언젠가 실험실에 왔던 대학원생이 ‘저는 곱게 자라서 이런 일은 하기 어려워요’ 하더군요. 그래서 그 학생 실험 설거지까지 해주었어요. 흙수저 출신이 실험실에선 불리한 조건이 아니에요.”

문제는 흙수저가 연구원이 되는 일, 그 자체다. 최소한 석사학위는 마쳐야 연구원이 될 수 있다. 교육기간이 길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그는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라는 자산을 갖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우디 근로자로 나가고, 거제도에서 비료가게가 비교적 안정되었을 무렵 아이들을 교육시키겠다며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남의집살이를 비롯해 허드렛일을 하며 세 자녀를 공부시켰고, 모두 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냈다. 사촌들이 모두 상고에 갔던 터라 집안에서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간 첫 번째 사람이었다.

“친척들한테서 분수를 모른다고 욕도 많이 먹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꺾이지 않았죠. 어머니가 제 아픈 아들을 봐주셔서 대학원도 다녔어요. 어머니는 ‘나는 네가 돈 벌러 다닌다고 하면 안 봐주는데 공부하겠다고 하니 봐준다’고 하셨죠. 어머니는 살림을 안 가르쳐 주셨어요. 살림 잘하면 살림만 한다면서요.”

그런 어머니가 석사학위를 마치고 박사과정 시험을 보려고 준비하던 중에 돌아가셨다. 결국 주부로 돌아가 과학잡지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아버지 병구완을 하며 경단녀로 살다 다시 박사과정을 시작해 시아버지가 치매·중풍으로 투병을 하는 동안 공부를 하고 학위를 받고 비정규직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어찌됐든 그런데도 그는 HCR 과학자다. 세계 과학자들 중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1%의 과학자. 전 세계적으로 3000여 명, 국내엔 50여 명밖에 없다. 운이나 연줄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뢰할 수 있는 연구 성과를 끊임없이 내놓은 결과다.

무모하게 도전한 독성학 박사과정

그를 여기까지 끌고 온 힘은 무엇이었을까. 세간의 기대처럼 불굴의 의지, 생활의 절박함 같은 건 아닌 걸로 보였다. 오히려 ‘세상물정 모르는 무모함’이 그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가 참 무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박사과정을 옮겼다는 얘기를 들으면서였다. 그는 한 대학의 생약학 박사과정에 들어가 약초의 효능을 연구했다. 그러다 문득 ‘질병이 왜 생기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질병의 원인을 모르는데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제로 어떻게 병을 고치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그는 질병 원인 연구 과정을 찾아보다 ‘독성학’으로 바꿀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좁은 대학사회에서 박사과정 중 지도교수를 바꾼다는 건 도대체 얼마나 무모해야 할 수 있는 일일까. “자칫하다 대학 사회에서 매장될 수도 있었어요”라고 했더니 “사실 그때는 그런 생각 못했어요. 그냥 질병의 원인을 알고 싶다는 생각에 너무 사로잡혀서…”라고 했다.

‘질병의 원인.’ 그를 사로잡은 이 궁금증을 독성학으로 풀어보려고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시아버지 치매가 큰 이유였다.

“암과 치매는 서로 견제하는 시스템이 있어요. 암에 걸린 사람은 치매에 잘 안 걸리고, 치매에 걸린 사람은 암에 잘 안 걸리죠. 그런데 우리 아버님은 두 개가 동시에 왔어요. 왜 그랬을까 생각했죠. 아버님은 담배를 오래 피웠고, 기름차를 운전하셨죠. 이런 생활로 인해 체내에 쌓인 환경독성 물질이 견제시스템을 무너뜨린 게 아닐까. 아버님은 80세까지 사셨지만 19년 동안 투병했고, 그중 14년은 천장만 보고 누워계셨죠. 요즘 기대수명은 늘어도 건강수명은 줄어드는 게 현실입니다. 게다가 원인이 알려진 질병의 거의 없는데 치료약이 아닌 증상완화 약품으로 얼마나 건강수명을 유지시킬 수 있을까요. 그러니 알아야죠. 최소한 환경독성이 질병을 일으키는 기전 정도라도 연구를 해야죠.”

어쨌든 그는 동덕여대 독성학교실로 옮기기로 결심했고, 나름의 우여곡절 끝에 편입할 수 있었다. 동덕여대로 옮길 때 그는 SCI(Science Citation Index,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급 논문 5편을 써야 졸업시켜 주겠다는 지도교수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세계 학계가 인정하는 유력 학술지에 논문을 5편이나 등재한다는 건 웬만한 학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게 뭔지 잘 몰라서 그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미세먼지의 유해성’을 집중 연구해 이 조건을 맞췄다. 그런 식으로 그는 스스로도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박 교수는 요즘 엉뚱한 일 때문에 속상한 일이 많다고 했다. 갑자기 뜨다 보니 ‘자기 사연 팔아서 떴다’는 욕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연구비 지원에서 자꾸 떨어지는 것도 자업자득이라는 말까지 듣는다고 했다.

“한 지인은 내가 딱했는지 연구비를 타려면 이젠 실험실은 조교들한테 좀 맡기고 인사도 다니고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고 조언하더군요. 내가 연구를 하려고 연구비가 필요한 것인데 연구비 따려고 실험실 비우고 다녀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기인가요?”

그는 어쨌든 상금으로 연구비가 생기니 배짱도 생겼다고 했다. “내가 이 상을 받은 게 ‘사연을 팔아서’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죠. 저는 속상할 때 실험을 하면 다 잊혀요. 게다가 1년을 더 실험할 수 있는 돈이 생겼는데 욕먹는 게 대수인가요.”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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