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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 그랜드 CEO in KOREA(9)] 124년 두산그룹의 新성장동력 모색하는 박정원 회장 

“일하는 방식부터 혁신적으로 시도하자” 

야구에서 경영 영감 얻는 디테일 리더십으로 재무 건전성 회복에 전력
연료전지와 소재에서 위기 돌파 모색… 두산건설 실적 반등 여부가 관건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왼쪽)이 독일 뮌헨에서 열린 ‘오토매티카 2018’에서 두산의 협동로봇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두산
두산 베어스는 10월 1일 프로야구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9회말 끝내기 역전승을 거뒀다. 한때 9경기나 벌어졌던 격차를 뒤집고, 2019년 KBO리그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했다. ‘미러클 두산’의 저력을 새삼 입증한 순간이었다. 이날 TV 중계 카메라는 잠실구장 관중석에 앉아있던 중년의 신사를 유독 자주 클로즈업했다. 그는 두산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반응했다. 절제를 유지하되 결정적 장면에서는 굳이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박정원(57) 두산 베어스 구단주였다. 박 구단주는 두산그룹 회장이기도 하다. 2016년 3월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야구단 구단주는 2009년부터 맡았다. 두산 안에서는 회장에 취임하면 구단주 지위를 내놓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박 회장은 겸임을 선택했다. 한번 꽂히면 끝까지 애정을 거두지 않는 ‘박정원 스타일’이 작동한 것이다.

사실 그가 구단주를 맡은 뒤 두산 베어스는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3승 1패의 우세를 선점해놓고 1승을 마저 못 채워 무너졌다. 2014년은 가을야구조차 못 나갔다. 책임을 통감한 김태룡 두산 단장은 사직서를 품은 채로 박 구단주를 만났다. 사의를 전했을 때, 박 구단주가 했던 말을 김 단장은 평생 잊지 못한다. “어디 다른 데 가려는 것이 아니라면 (사표는) 안 된다. 김 단장은 나와 끝까지 갈 사람이다.”

그렇게 신임을 확인한 김 단장은 2015시즌을 앞두고 김태형 감독을 영입했다. 김 단장의 유임과 김 감독의 부임 이후 두산은 두 차례의 한국시리즈 우승(2015·2016년), 세 차례의 정규리그 1위(2016·2018·2019년)를 달성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2019년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가장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수줍음 많은 재벌총수


▎두산중공업 창원 본사에서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의 최종조립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사진:두산
박정원 회장은 왜 이토록 야구단을 좋아할까? 거기에 두산의 DNA와 지향성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의 성과는 특정 개인이 아닌 팀플레이를 통해 이뤄지는 사례가 많다. 팀플레이로 이룬 성과는 훨씬 크고 지속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경영은 야구와 유사한 점이 많고, 야구를 보면서 기업 경영의 시사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박정원 회장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2월 두산산업 뉴욕지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일본 기린맥주에서 잠시 일한 뒤 OB맥주에 입사했다. 1997년 OB맥주 상무로 임명됐다. 1998년 9월부터 두산의 지주회사 격인 두산관리본부 상무와 전무를 거쳤다. 1999년 12월 두산상사BG 대표이사에 올랐다. 이후 2007년 두산건설 부회장과 ㈜두산 부회장을 잠시 겸임했다. 2009년 3월 두산건설 회장에 취임했다. 2012년 3월 ㈜두산 지주부문 회장에 올랐다. 그리고 2016년 3월 두산그룹의 총수가 됐다. 2019년 5월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두산그룹의 동일인으로 지정됐다. 2019년 3월 박용곤 명예회장이 별세하자 그 장남인 박 회장이 명실상부한 두산그룹의 수장으로 공식화된 것이다. 박 회장은 대기업 4세 경영의 출발을 알린 경영자였다.

이렇듯 돋보이는 이력과 직위에 있음에도 박정원 회장은 언론과 거의 접촉한 적이 없다. 최초 인터뷰는 2015년 11월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구단주 자격으로서 스포츠신문과 만난 것이었다. 화제는 야구 이야기로 한정했다. 당시 박 회장 화법의 특징은 단답형이었다. 필요만 내용만 간결하게 표시했다. 박 회장은 눌변으로 알려졌다. 대기업 총수답지 않게 수줍음이 많다.

그러나 짧은 말 속에 디테일을 감추고 있다. 내향적 성향의 사람이 대개 그렇듯 배려심이 강하다. 일례로 박 회장은 두산 베어스 김태룡 단장에게 업무용 차를 선물한 적이 있다. 임원들이 으레 타고 다니는 고급 세단이 아니라 RV 차였다. ‘출장이 잦은데 공간이 넓은 차로 다니라’는 박 회장의 배려였다. 야구단 업무를 세심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내릴 수 없는 조치다. 덕분에 김 단장은 RV 카를 타는 유일한 두산그룹 임원이 됐다. 김승영 전 두산 베어스 사장은 “임직원들이 자율적으로 개선하고, 역량을 발휘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리더십”이라고 박 회장의 스타일을 설명했다.

박 회장은 2016년 3월 취임식 당시 두산그룹의 영속성을 화두로 말했다. “두산 120년 역사의 배경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청년두산 정신이 있다”면서 “이 청년두산 정신으로 앞으로 100년의 성장을 계속해서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박 회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공격적인 경영을 두산의 색깔로 만들어가겠다”라고 강조했다.

이후에도 신년사마다 나온 그의 메시지는 일관적이었다. 2018년 신년사에서 “일하는 방식에서부터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는 일까지 디지털 전환을 통한 혁신적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9년 신년사에서는 “그룹의 신사업을 속도감 있게 키울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의 앞에 놓인 두 가지 거대 화두는 ‘재무 건전성’과 ‘미래 사업 확보’로 압축된다.

변화가 곧 생존이었던 120년史


▎2018년 9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인터드론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두산의 드론용 연료전지팩을 살펴보고 있다. / 사진:두산
재계 15위 두산그룹의 모체는 ‘박승직 상점’이다. 1896년 서울 종로4가(광장시장 부근)에 열었던 포목 가게가 그 시작이었다. 박승직 상점은 1925년 주식회사로 변모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근대적 기업 형태를 갖췄다. 박승직 상점은 1946년 ‘두산상회’로 상호를 변경했다. 박승직 창업주의 아들인 박두병이 사업을 물려받았다. 박두병은 두산을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으로 키웠다. 1953년 두산상회를 두산산업으로 또 한 번 바꾼 뒤, 무역업에 진출했다. 이후 무역 외에 건설·기계·주류 등에 걸쳐 영역을 확장했다.

이 시기 두산의 핵심 사업은 소비재였다. OB맥주가 그 당시 두산그룹을 상징하는 아이템이었다. 1998년 매각됐지만, OB맥주는 오늘의 두산을 배양한 뿌리였다. 현재 두산 주력사에 해당하는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 두산건설 등은 거슬러 올라가면 OB맥주에서 뻗어져 나온 가지들이다. 두산의 맥주 사업은 1930년대부터 유래했다. 당시 일본 맥주업계는 식민지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던 만주시장으로의 진입을 위해 한국에 회사를 차렸다. 이때 조선맥주(하이트 진로의 전신)와 소화기린맥주(OB맥주의 전신)가 생겼다. 이들 회사를 설립할 때 일본은 한국인 주주 참여를 일부 허가했다. 이때 박승직 창업주는 자본을 투자했다.

그동안의 주력 사업이었던 직물업이 쇠퇴기에 접어들자 박 창업주는 다른 곳에서 활로를 모색한 것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사업을 계승한 박두병은 정부 승인을 얻어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지배인이 됐다. 그리고 1952년 이 회사를 인수했다.

OB맥주는 두산의 오늘을 있게 해줬지만, 두산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1991년 발생한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과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의 파도를 넘긴 두산은 중공업그룹으로 전환해, 21세기를 준비했다. 두산은 창립 100주년이었던 1995년을 자축하는 대신, 오히려 강력한 구조조정 작업을 통해 미래를 대비했다. 이름만 들면 알만한 자회사들을 매각했다. OB맥주 공장 매각에 이어 아예 음료, 주류 사업 지분 전체를 팔았다. 그 대신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매입했다. 2003년에는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에는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했다. M&A(인수·합병)을 통해 그룹의 체질을 변화시켰고, 몸집을 키웠다.

이후에도 두산은 원천기술을 갖춘 해외기업을 꾸준히 사냥했다. 두산하이드로테크놀러지(담수설비), 두산밥콕(발전소 보일러), 두산밥캣(소형 건설장비) 등이 그 당시 수확했던 성과물이었다. 두산의 극적인 사업 포트폴리오 변화는 실적으로 타당성이 입증됐다. 2000년 3조4000억원이었던 그룹 매출은 10년이 흐른 2010년 23조원까지 성장했다.

두산은 시대의 흐름을 미리 포착하고 ‘트랜스포머(Transfomer)’처럼 그룹 주력사를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확장의 역사를 밟았다. 박정원 회장이 두산 베어스 야구 관람을 즐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산 베어스와 두산그룹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만 살아남는 운명’에서 닮은꼴이다. 두산 베어스는 고비 때마다 주력 선수들을 시장에 내보냈다. 고액연봉의 FA(프리에이전트) 선수를 붙잡지 않는 대신, 유망주들을 발굴해 육성했다. 선제적으로 팀 컬러와 체질을 바꿨다. 저비용 고효율을 추구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자 노하우였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성과가 쌓이다 보니 어느덧 KBO리그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팀이 됐다.

탈원전 이후를 고민하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오른쪽)이 취임 직후인 2016년 4월 두산중공업 창원 공장을 찾았다. / 사진:두산
다시 두산그룹은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해야 하는 길목에 섰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주력사들의 수익성 극대화가 쉽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산건설 실적 부진에서 비롯된 시장의 의구심도 풀어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박 회장이 띄운 승부수는 친환경 미래사업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연료전지와 소재, 양대 사업이다. 변화를 뛰어넘는 혁신의 차원이다.

두산은 2019년 10월 1일 향후 그룹의 명운을 건 중대발표를 했다. ㈜두산의 사업 부문을 연료전지와 소재 분야로 분할했다. 그리고 이 플랜을 실행할 회사로 두산퓨얼셀(발전용 연료전지)과 두산솔루스(소재 산업)가 출범했다. 두산 퓨얼셀은 문 정부가 지향하는 ‘수소경제’의 핵심이라 할 발전용 연료전지 사업을 본격화한다. 이미 박 회장은 신년사에서 “선도업체로 자리매김한 자신감을 토대로 연료전지 사업 시장 확대에 힘을 기울이고, 협동로봇과 드론용 수소연료전지 사업은 본격적 성장을 위해 박차를 가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어 “가스터빈, 전지박, 에너지저장장치, 풍력 등의 신사업에서도 구체적 성과를 내도록” 주문했다. 박정원式 경영의 큰 길을 제시한 것이다.

두산은 이미 신재생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용 연료전지 사업에서 독보적 입지를 선점하고 있다. 두산퓨얼셀은 2017년 세계 최초이자 최대 규모로 복층형 연료전지를 부산그린에너지에 공급했다. 2018년에는 세계 최대 부생수소 발전소(한화 대산)를 수주했다. 이로써 시장 진입 3년 만인 2018년 수주액 1조원을 돌파했다. 향후 2023년까지 매출액 1조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다.

전지박, OLED는 전자 소재와 화장품, 의약품 등에 활용되는 바이오 소재 사업이다. 두산솔루스는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전지박을 생산하기 위해 2018년부터 헝가리에 공장 건설을 준비해왔다. 헝가리 생산 공장은 2020년 완공 예정이다. 2020년 하반기부터는 생산할 수 있다. 전기차 및 배터리 시장조사 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전지박 수요는 2018년 7만5000t(1조원 규모)에서 2025년 97만5000t(14조3000억원 규모)으로 연평균 4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두산중공업도 2019년 9월 ‘기계공학의 꽃’으로 꼽히는 발전용 대형 가스터빈 초도품 최종조립 행사를 가졌다. 이는 2013년부터 추진된 국책과제이기도 했다. 현재 제조 공정율 95% 수준에 다다랐고, 올해 안에 성능시험에 돌입할 계획이다. 테스트에 최종적으로 성공하면 한국은 미국·독일·일본·이탈리아와 함께 발전용 가스터빈 기술을 보유한 5개 국가 가운데 하나가 된다. 두산중공업이 공개한 발전용 가스터빈은 270㎽, 복합효율 60% 이상의 대용량 고효율 모델이다. 두산중공업은 후속작으로 380㎽, 100㎽ 모델 개발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발전용 가스터빈은 현재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상용화가 현실화되면 2030년까지 약 10조원의 수입대체 효과가 기대된다.

중공업에 디지털을 접목하다

두산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유망기술로 꼽히는 협동로봇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두산로보틱스는 2018년 6월 독일 뮌헨에서 열린 유럽 최대 규모의 로봇·자동화 분야 전시회인 ‘오토매티카 2018’에 참가했다. 여기서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해서 호평을 얻었다. 2018년 12월에는 중국 최대 산업 자동화 솔루션 전문기업인 보존그룹의 링호우사와 대리점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두산로보틱스는 전 세계 산업용 로봇 시장의 36%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에도 첫발을 내디뎠다.

이밖에 두산은 발전 및 주택·건물용 연료전지 사업에서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소형화된 모바일 연료전지를 개발했다. 2016년 12월 두산모빌리티이노베이션(DMI)을 설립하고 2년의 연구·개발을 거쳐 2018년 9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인터드론(Inter Drone) 전시회에서 드론용 수소연료전지팩을 처음 선보였다. 이 팩은 수소를 담은 용기를 탈·부착하는 방식으로, 1회 충전으로 2시간 이상 비행이 가능하다.

박정원 회장이 주력하는 또 하나의 분야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다. 그룹 주력업종인 중공업, 건설기계에 ICT(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하는 방식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두산인프라코어는 2018년 4월 미국 빅데이터 유니콘기업 팔란티어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팔란티어가 보유한 데이터 분석기법을 적용해 빅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할 예정이다.

중국 상하이 건설기계 전시회에서는 5G 통신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880㎞ 원격제어 기술을 선보였다. 독일 바우마 2019 전시회에서도 8500㎞ 떨어진 한국 인천의 굴착기를 원격 조종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굴삭기 센서인 ‘3D 머신 가이던스’ 솔루션과 건설기계를 원격 모니터링하는 텔레매틱스 서비스 ‘두산커넥트’도 국내는 물론 중국·유럽·북미에 출시했다.

두산중공업은 발전소 플랜트 부문에서 디지털 전환 속도를 높여가고 있다. 첫 글로벌 협력사업으로 인도 사산파워가 운영하는 석탄화력발전소에 디지털 솔루션을 적용하고 있다. AI 기술을 활용한 운전 시나리오 분석을 통해 발전소의 연소를 최적화하고 있다. 실제 디지털 솔루션 도입 후 5개월간 질소산화물 등 환경 유해 물질 발생은 약 30%가 줄어들었다.

유동성 위기의 파도를 넘어

두산은 박정원 회장 취임 1년 만인 2017년 영업이익 1조원(1조1676억원)을 넘어섰다. 그다음 해에도 두산은 매출 18조1722억원, 영업이익 1조2159억원을 달성했다. 그러나 두산은 끊임없이 ‘유동성의 위기’에 노출됐다. 두산건설의 재무 리스크 탓이다. 두산의 그룹 지배구조를 보면 ㈜두산 아래 두산중공업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건설이 위치한다. 두산인프라코어는 두산밥캣의 최대주주다.

구조적으로 두산건설이 불안하면 두산중공업이 흔들린다. 이는 ㈜두산 등, 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끼친다. 두산건설을 살리기 위해 전사적으로 지원을 감행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두산건설은 2018년 영업손실이 발생했고 적자가 증가했다. 부채비율은 1년 만에 194.7%에서 552.5%(2018년 기준)로 확대됐다.

두산건설을 돕느라 두산중공업도 고단해졌다. 게다가 정부의 탈원전 정책, 글로벌 경제의 위축으로 더 어렵게 된 실정이다. 실제 두산중공업은 2018년 말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자칫 두산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에 빠질 우려도 나온다.

그렇다고 건설업 현황을 볼 때 두산건설 실적이 단기간에 반등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2019년 2월 두산중공업과 두산건설은 유상증자를 발표했다. 두산중공업은 시장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증자에 성공했다. 부동산도 팔아 추가로 자금을 확보했다. 그러나 두산건설은 목표했던 유상증자 액수에 도달하지 못했다. 문제는 두산중공업이 두산건설을 지원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상황이 되는 현실이다. 최악의 국면으로 가면, 두산그룹 전체의 신용도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도 두산그룹이 두산건설을 잘라내지 않는 데에는 최종 결정자인 박 회장의 의중을 빼놓곤 설명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박정원 스타일’이 일정 부분 작동한 셈이다. 박 회장은 두산건설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했다. 그만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한때 그룹의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두산인프라코어도 박 회장의 인내에 보답해 실적 회복을 이뤄낸 전례가 있다.

또 하나 두산건설에 대한 결단이 쉽지 않은 배경으로 두산그룹 특유의 가문경영 문화가 거론된다. 이는 두산의 후계 구도와도 연결된다. 두산은 박승직 창업주, 박두병 초대회장 이후 박용곤 명예회장까지 3대 경영이 이뤄졌다. 이후 박 명예회장의 동생들(박정원 회장의 작은아버지)인 故 박용오 전 성지건설 회장, 박용성 전 중앙대 이사장,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대한상의회장) 등이 최고 경영자를 맡았다. 그런 다음에 박 명예회장의 아들인 박정원(두산그룹 회장), 박지원(두산중공업 회장·㈜두산 부회장)에게 그룹을 물려줬다. 이런 집단 지배체제에서 그룹의 중대 결정을 박 회장 홀로 결단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재계의 중평이다.

결국 두산그룹은 두산건설이 진앙인 유동성 위기를 어떻게든 돌파해야 길이 열린다. 재무안정성을 확보할 때, 그룹 승계 작업도 구체화할 수 있다. 박정원 회장이 그리는 124년 두산그룹의 미래 구도는 무엇일까. 그 과정에서 어떤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까.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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