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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10)] ‘유도 영웅’ 조재기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2시간 훈련에 땀으로 5㎏ 빠져 난 매일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몬트리올 올림픽 ‘삭발 투혼’ 동메달… 하형주 LA 금 조련도
“뭘 잘할지는 해봐야 알아, 다음 기회 생각 말고 지금 도전하길”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단풍길을 거닐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 조재기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체육진흥공단은 88 서울 올림픽의 유산인 올림픽공원을 관리하는 일도 맡고 있다.
키 190㎝의 거구가 성큼성큼 다가와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손을 맞잡으며 손아귀에 힘을 줘 봤지만 이미 그의 풍모와 카리스마에 압도당한 느낌이다. 조재기(69)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을 만나면 늘 이런 기분이다. 하지만 사람 좋은 미소와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에 이내 마음이 녹는다. 그는 달변에다 운동만큼 책 읽는 것도 좋아한다.

조 이사장은 유도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이다. 그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남자 유도 무제한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자신의 체급(라이트헤비급)에서 아깝게 4위에 그친 뒤 주위의 만류에도 삭발 투혼을 발휘해 따낸 동메달이다. 부산 동아대 제자인 하형주를 1984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키워냈고, 동아대 교수(스포츠마케팅), 대한체육회 사무총장 등을 맡으며 학계와 공직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2018년 1월, 공모 절차를 거쳐 조재기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이 취임했다. 1988 서울 올림픽 잉여금 3521억원으로 89년에 설립된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경륜·경정·스포츠토토 등 다양한 기금조성사업을 통해 15조원이 넘는 체육진흥기금을 조성했고, 이중 11조원을 생활체육-엘리트체육-장애인체육-국제대회 등에 지원했다. 한국 스포츠의 젖줄이자 든든한 금고지기 역할을 해 왔다.

조 이사장 취임 이후 공단은 탄탄하게 내실을 다져가고 있다. 기획재정부 주관 고객만족도 최우수 등급(S), 사감위(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건전화 평가 경륜·경정 최고 등급(S),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문화정보화 수준 평가 최우수기관 선정 등의 성과를 거뒀다.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던 11월 7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조 이사장을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몬트리올 올림픽 출전과 일본 유학, ‘하형주 금메달 프로젝트’까지…. 꽁꽁 숨겨뒀던 비사(秘史)와 팩트를 그는 가감 없이 풀어냈다. 그 안에 조 이사장의 일생을 관통한 ‘유도 정신’이 스며 있음은 물론이다.

후배 양정모 금메달 덕분에 동아대 교수 돼


▎1979년 세계유도선수권대회 헤비급에서 동메달을 차지한 조재기 선수(오른쪽).
몬트리올 올림픽은 메달 따기보다 출전 자체가 더 어려웠다면서요.

“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이 맞대결했는데 우리가 참패했어요.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한 게 패착이었다. 몬트리올에는 소수정예를 보내자’는 게 당시 대한체육회 입장이었죠. 나는 정말 힘들게 출전권을 땄는데 내 체급(라이트헤비급)에는 선수를 내보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죠. ‘김택수 대한체육회장님이 마음먹으면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무작정 동아대 총장님을 찾아갔습니다. 저를 많이 예뻐해 주신 그분이 김택수 회장님과 경남고 동기셨거든요. 총장님이 김 회장께 전화해 ‘요즘 체육회가 어렵나? 장래가 촉망되는 우리 졸업생을 올림픽에 안 데려간다 하니 내가 돈 대서라도 데려가면 안 되겠나’ 하시는 겁니다. 그분 덕분에 극적으로 몬트리올 땅을 밟게 됐지요.”

라이트헤비급에서 메달을 못 따고 삭발을 한 뒤 무제한급에 출전하셨죠?

“라이트헤비급 준결승에서 소련 선수를 만났는데 당시는 소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고 정보도 전혀 없었어요. 그 선수가 러시아 전통 무술인 ‘삼보’ 식으로 유도를 하는데 당했죠. 동메달이 걸린 패자전 결승에선 굳히기 찬스를 놓친 뒤 밭다리를 들어가는데 상대가 먼저 들어오는 바람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무제한급에 나가겠다고 하니 코칭스태프가 ‘네 체급에서도 안 되는데 최중량급 강자들이 다 나오는 무제한급에서 되겠나. 잘못하면 다친다’며 허락하지 않는 겁니다. 사람이 한번 마음먹은 거 끝장을 봐야겠다 싶어서 올림픽 선수촌 내 이발소에서 삭발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죽하고 근육밖에 없는 깡마른 몸에다 인상도 험악한 놈이 머리까지 박박 밀고 들어오니까 다들 놀랐죠. 결국 ‘한번 나가 봐라’고 허락해 줬습니다.”

건국 후 첫 금메달을 딴 양정모(레슬링) 선수와 경기 시간이 겹쳤다면서요?

“대회 마지막 날이었는데 양정모가 금메달 못 따면 종합순위에서 또 북한에 질 판이라 전 선수단이 레슬링장으로 갔어요. 나하고 김의태 감독님만 유도장으로 갔죠. 영국 선수와 준결승에서 ‘앗’ 하는 순간에 포인트를 뺏겨 졌지만 패자전 전승으로 동메달을 땄습니다. 유도장에 한국 기자가 아무도 없어서 당시 경기 사진이 없어요. 프랑스 기자가 ‘서양에서는 머리를 깎으면 힘이 빠진다고 하는데 왜 삭발을 했나’고 물어서 ‘내 모든 걸 다 바친다는 각오였다. 목숨을 걸고 한 경기 한 경기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양정모 금메달 덕을 톡톡히 봤다고 들었습니다.

“그 금메달이 나와서 종합순위에서 북한을 따돌렸잖아요. 귀국편 전세기가 뜨고, 메달을 딴 모든 선수가 훈장을 받았어요. 양정모가 동아대 3년 후배다 보니 부산도 뒤집어졌어요. 부산 환영대회에서 동아대 총장님이 ‘양군과 조군은 우리 대학에 교수로 와야 해’라고 하셨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갈 곳이 없어 철도청 침목 수리공, 경기대 기숙사 사감까지 했던 제가 하루아침에 대학교수가 되는 인생역전이 일어난 겁니다.”

키 190㎝면 지금도 거구인데 당시에는 엄청난 장군감이었다.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조 이사장은 “아버님이 저만한 체격에다 힘이 장사였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크게 지으시고 잠사업도 하셨죠. 씨름도 곧잘 하셨는데 당시 운동을 하면 건달이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한테는 ‘너는 장손이니 농대를 나온 뒤 고향에서 농사하고 면서기 정도 해라’고 늘 말씀하셨죠.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하동에서 부산으로 중학교 유학을 보내주셨습니다”고 회고했다.

키 크고 몸도 빠른 친구가 입학하니 농구 감독인 체육 교사가 농구부에 들어오라고 계속 권유했다. 조재기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농구부에 들어갔고, 또래들과 합숙하는 재미에 방학 때도 집에 가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배를 타고 찾아왔고, 운동장에서 농구 하고 있는 아들을 보자 격분해 감독을 후려갈겼다. 아버지는 아들을 끌고 집으로 돌아갔고, 조재기는 결국 다른 중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다.

부상으로 3개월 누워 있는 동안 일본어 독학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삭발 투혼으로 유도 무제한급 동메달을 딴 조재기 선수 (왼쪽 둘째)의 시상식 모습.
대학에 들어가서야 유도를 시작했다고 하던데요?

“고등학교까지 조용히 공부만 했는데, 서울의 점수 제일 높은 농대에는 떨어지고 동아대 잠사학과에 입학했지요. 단과대학 대항 체육대회에서 배구든 축구든 펄펄 날았더니 체육부장님이 저한테 ‘니 유도 배울 생각 없나. 유도는 예의도 바르고 좋은 운동이니까. 니 몸이 너무 좋아서 탐이 난다’고 하셨어요. 나는 촌놈이고 덩치는 큰데 싸움도 못 하니까 유도를 호신술로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유도부에 가입해 흰 띠 메고 동기가 가르쳐주는 낙법부터 배웠습니다. 워낙 힘이 좋아서 6개월 만에 초단을 땄지요. 초단 까만 띠 받았을 때가 대회에서 메달 딴 것보다 더 좋더라고요. 마침 새로 온 코치가 저하고 체격이 비슷해 잘 받아주고 연습도 시켜주고 해서 실력이 일취월장했습니다. 유도 입문 5년 만에 종합선수권 우승하고 국가대표에 뽑혔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한 유도가 제 인생을 바꾼 거죠.”

일본 톈리대학(天理大學)에서 유도에 눈을 떴다고 하던데요.

“73년 국가대표가 돼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갔는데 일본 선수들이 신기(神技)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술을 보여주더라고요. 기라성 같은 국내 선배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걸 보고 ‘아, 한국에선 안 되겠다’ 싶었지요. 당시 경기대 코치로 있었는데 선배들께 부탁해 경기대 선수들과 함께 텐리대학 전지훈련을 가게 됩니다. 전일본선수권 3등을 한 선수와 연습경기를 했는데 힘으로 눌러버리니까 ‘괴물이다’며 놀라더군요. 힘 좋은 유럽 선수들을 대신할 연습 파트너로 인정받아 1년 동안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체력 유도를 하니까 한 판 하면 좀 쉬는데 기술유도를 하는 일본은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파트너를 바꿔가며 대련을 합니다. 두 달 하다가 다리를 다쳐 병원에 갔더니 비골 피로골절이라고 해서 다리에 깁스를 하고 석 달을 꼼짝없이 누워 지내는 신세가 됐죠.”

무척 답답하고 힘드셨겠네요.

“화장실도 못 가고, 모기는 물고, 말은 안 통하고, 덥기는 엄청나게 덥고…. 죽는 줄 알았죠. TV밖에 볼 게 없어 하루종일 보니 일본어가 귀에 들어와요. 그 집 손자 아이와 친구가 됐는데, 아이가 하는 말을 자꾸 듣다 보니 말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입에 뱄어요. 3개월 만에 웬만한 일본어는 구사할 수 있게 됐습니다. 깁스를 푼 뒤에는 매일 유도장에 나와 일본 선수들이 연습하는 걸 관찰했어요. 거기서 놀라운 걸 발견했지요. 일본 선수들은 잡으면 바로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몸에서 힘이 빠지지요. 우리는 서로 잡고 ‘으으으’ 하면서 힘을 쓰니까 움직일 수가 없는 거죠. 그걸 깨닫고 나서는 움직이면서 기술을 거는 연습을 혼자서 엄청나게 했습니다.”

유도가 한 단계 올라선 거네요?

“그렇죠. 게다가 말도 제법 통하니까 지내는 게 훨씬 편해졌지요. 문제는 갖고 간 돈 300달러가 다 떨어졌고 송금 받을 길도 없었다는 겁니다. 몸에 있는 수분을 전부 땀으로 내보내고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죠. 일본 친구들은 훈련 끝나고 페트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나 탄산음료를 나 보란 듯이 마셨습니다. 얼마나 먹고 싶었겠어요. 마침 숙소에 우메보시(매실 장아찌)와 얼음이 있어서 그걸로 음료수를 대신했죠. 아, 그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세계챔피언을 지냈던 당시 일본 친구들이 거의 다 당뇨로 세상을 떠났어요. 몸에 수분이 완전히 빠진 상태에서 당분이 쭉쭉 흡수되니 40대 넘어서 심각한 당뇨가 온 겁니다.”

조재기 선수가 일본 톈리대학에서 수련하던 당시가 ‘죽음의 냄새’를 맡던 시절이다. 체중 100㎏의 조재기는 매일 2시간 연습하는 동안 체중을 5㎏ 뺐다. 도복을 두 벌 준비해 1시간 훈련 뒤 갈아입었다. 땀으로만 체중의 5%를 뺀 것이다. 의사들은 체중의 7%가 땀으로 빠지면 탈수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한여름엔 7㎏ 가까이 빠지는 날도 있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는 말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낳기 위한 배우자의 조건


▎201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는 조재기 이사장. / 사진 : 국민체육진흥공단
“장마철에는 도복이 잘 안 말라요. 땀에 전 도복에 밴 퀴퀴한 냄새, 그게 딱 송장 냄새거든요. ‘난 매일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훈련했다’고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산시인협회 회장을 하던 친구 지인들과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소주 한잔 걸치고 어물시장을 지나가는데 꼬리꼬리한 젓갈 냄새가 나기에 ‘저기 죽음의 냄새가 나는데 너거들은 못 맡아봤나’ 했더니 다들 어리둥절해요. ‘자 봐라. 멸치·명태·고등어… 저 즐비한 시체들에서 나는 냄새가 죽음의 냄새가 아니고 뭐꼬. 여러분은 이 순간 살아있다는 희열을 느껴라. 살아있기 때문에 이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니…’라고 했더니 다들 감탄을 하면서 다음 달에 나를 부산명예시인으로 위촉해 줬어요. 하하.”

그렇게 준비하고 자신 있었던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은 미(美)-소(蘇) 냉전으로 인해 반쪽 대회가 됐고, 한국도 불참 대열에 끼었다. 한순간에 목표가 사라진 조재기는 엄청난 허탈감과 향수병에 시달렸다. 날이 좋으면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비 오는 날은 그마저도 못 해 미칠 지경이었다. 숙소에서 문을 잠가 놓고 한국 노래를 크게 틀고, 소리도 질렀다. “조 선생이 좀 이상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천리교(天理敎) 교회장이 그를 불러 술상을 차려주고 자초지종을 물은 뒤 말했다.

“너는 욕심이 너무 많다. 영국 같은 선진국은 집을 한 채 마련하는 데도 3대가 걸린다. 할아버지가 손자한테 적금을 들어준다. 아버지가 그걸 갚는다. 손자가 그걸로 집을 마련한다는 거다. 너는 세계 1등을 하겠다면서 당대에서 해보려고 하니 되겠나. 3대 계획을 세워라.”

그리고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아들을 낳기 위해서 구체적인 배우자의 조건을 제시했다. “키는 165㎝는 돼야 하고, 100m는 13초대에 뛰어야 한다. 그리고 머리가 좋아야 한다. 집안이든 학벌이든 아무것도 보지 말고 그런 사람 만나서 많이 낳다 보면 하나가 걸릴 거다. 너는 아버지한테 훌륭한 체격을 물려받았으니 네가 체득한 세계 정상의 기술과 경험을 아들에게 전수해라. 그렇게 따는 금메달이 정말 조국에 공헌하는 금메달이다.”

조재기는 이 내용을 귀국한 뒤 한 일간지에 기고했고, 자연스러운 공개 구혼이 됐다. 중매가 쏟아졌고 주말에는 서울 가서 선도 많이 봤다. 그런데 결국 짝은 태릉선수촌에서 만났다. “고향도 같고, 아주 차분하고, 키도 165㎝는 되고, 그런데 100m는 13초대 안에 못 뛰었어요. 양궁선수 출신이 내 짝이 됐습니다. 한창 연애가 무르익고 있는데 모 잡지에서 ‘조재기와 농구 대표 박찬숙이 사귄다’는 엉뚱한 기사를 썼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깨질 뻔했어요. ‘만난 적도 없다’고 해명해서 겨우 해결이 됐죠. 하하.”

그런데 조재기 이사장은 아들을 유도 선수로 키우지 못했다. 대신 그의 제자로서 결실을 맺은 선수가 1984 LA 올림픽 유도 95kg급 금메달리스트 하형주(동아대 교수)다.

스포츠는 체성·지성·심성·덕성·영성 개발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국민체육진흥공단 직원들이 함께 모여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 사진 : 국민체육진흥공단
하형주 선수는 어떻게 만났나요?

“잘 아는 유도 코치가 ‘진주 대아고에서 씨름하는 아이가 있는데 몸이 정말 좋다. 한번 보라’고 해서 만났어요. 알려진 대로 발이 왕발인데다 체격이 나보다 더 좋아요. 부산체고로 전학시켜 본격적으로 유도를 가르쳤지요. 내가 연습 상대가 돼서 매일 던지고, 자극 주고, 약도 올리고, 혼도 내고 하면서 키웠습니다. 그러다 내가 다시 일본으로 갔다 돌아오니 모교인 동아대로 와 있더군요. 거기서 ‘올림픽 금메달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쉬게 해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워낙 힘과 기술이 좋았으니까요.”

하형주의 들어메치기는 일품이었죠.

“한번은 연습을 하면서 오른쪽으로 파고들었는데 몸이 공중으로 붕 올라가면서 어떻게 넘어갔는지도 모르게 넘어간 겁니다. 깜짝 놀라서 다시 해 봤더니 역시나 한판이었죠. 알고 보니 하형주가 씨름에서 배운 배지기(상대를 끌어올리면서 메치는 기술)를 응용한 들어메치기를 쓴 겁니다. ‘됐다. 이거다’ 싶었죠. 일본을 넘어서려면 일본 선수한테 없는 기술을 장착해야 하잖아요. LA 올림픽에서 이 기술로 일본 최강 미하라 선수를 8강에서 꺾고 금메달까지 순항했습니다. 아들 대신 좋은 제자를 만나서 꿈을 이뤘고, ‘금메달 3대론도 완성했죠.”

그리고는 스포츠마케팅을 전공하셔서 학자가 되셨습니다.

“88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유도 담당관을 했습니다. 거기서 기획·조직 등을 배웠지요. 그러면서 스포츠 행정도 중요하지만 스포츠가 돈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스포츠산업 규모가 자동차산업의 7배’라는 문헌을 봤습니다. 눈이 번쩍 띄어서 체육진흥공단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가서 보니 프로 스포츠 산업이 굉장하더라고요. 스포츠마케팅을 전공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제대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역시 공부는 책 보는 훈련이었어요. 처음엔 하루 만화책 8시간 보는 것부터 시작해 무협지-문학전집을 거쳐 전문서적을 읽어나갔죠. 운동하는 사람이 머리도 좋습니다. 신체활동이 뇌를 활성화하고 시냅스(뇌 속 뉴런의 접합부)를 연결시키지 않습니까.”

스포츠를 하면 오성(五性)이 발달한다고 하셨는데요.

“몸이 튼튼해지는 체성(體性), 머리가 좋아지는 지성(知性)은 기본이지요. 세 번째는 규칙을 준수하고 반칙을 하지 않는 심성(心性)입니다. 네 번째는 덕성(德性)인데요. 운동은 파트너가 있게 마련입니다. 특히 투기 종목은 스파링 파트너가 없으면 연습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상대를 인정하고, 베푸는 것이 몸에 배는 겁니다. 마지막은 영성(靈性)입니다. 이건 우리같이 최고의 단계에 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건데요. 우리는 늘 이기는 길과 지는 길 중에서 이기는 길을 찾으면서 왔잖아요. 이기자, 이기자 하면서 결국 자신을 이기는 길로 접어드는 겁니다.”

영성은 심오한 단계 같은데요.

“어느 순간 깨달음이 오는 겁니다. 내 경우는 이기는 길이 뭘까 깊이 탐구하다가 ‘실수하지 마라’는 게 딱 잡혔어요. 실패를 통해서는 더 배우고 도전할 수 있죠. 하지만 실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놓치는 겁니다. 몬트리올에서 승자 결승에 갈 수 있었는데 한번 실수로 패자전으로 떨어졌어요. 준결승에서 팽팽하게 맞섰을 때 당기고 끌려가고 하면서 상대 실수를 기다려야 하는데 내가 먼저 그 긴장을 깨뜨리고 들어가다가 당한 겁니다. 그 뒤부터 내 삶은 ‘실수하지 말자’가 원칙이 됐어요. 운동뿐만 아니라 시간 관리나 인간관계에서도 실수하면 안 된다고. 사람을 잃지 않으려면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유도에서 말하는 예시예종(禮始禮終, 예로 시작해 예로 마친다)입니다.”

“우리가 후배 앞길을 막지는 말자”


▎지난 11월 7일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하는 도중 파안대소하는 조재기 이사장.
그 원칙으로 공단 이사장직도 수행하고 있겠네요.

“물론입니다. ‘경험을 살리되 절대 실수하지 말고, 무리도 하지 말자’는 다짐을 새기고 있습니다. 한국 체육의 금고 역할을 하는 거대 조직의 수장을 전문 체육인으로서 처음 맡았는데 내 뒤에는 메달리스트도 많고,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체육계 자리는 전문가인 체육인들이 맡아야 한다고 봅니다. 미술은 미술인, 음악도 음악인이 맡는데 체육은 어떤가요. 농담으로 ‘새마을운동도 운동, 숨쉬기운동도 운동’이라고 합니다. 우리 공단 자회사인 한국체육산업개발 대표가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씨입니다. 최 대표를 만나면 늘 ‘우리가 후배 앞길을 막지는 말자. 정말 열심히 하자’고 다짐합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중앙SUNDAY와 서울대 의대가 벌이고 있는 건강경영 캠페인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팀이 개발한 건강경영지수를 활용해 기업들의 건강 경영 수준을 진단하고 건강경영의 개념을 알리는 기획이다.

조 이사장은 “우리 공단의 목표가 국민이 건강하고 즐겁게 살도록 돕는 건데 와서 보니 범위가 너무 넓더라고요. 마침 의학계와 언론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 눈이 번쩍 뜨였죠. 국민 건강에 1만원 투자하면 국가 건강보험 재정 6만5000원이 절약된다고 합니다. 참 좋은 사업에 공단이 힘을 보태야죠”라고 말했다.

조 이사장에게 “오성(五性)이 두루 계발된 건강한 인격체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었다. 유도 레전드가 답했다. 한판승처럼 후련한 일갈이었다. “꿈은 클수록 좋고, 내가 뭘 잘할 수 있는가는 끝까지 가 보면 답이 나옵니다. 젊은이들은 쭈뼛쭈뼛하지 말고 도전하세요. 내가 몬트리올 올림픽 출전 길이 막혔을 때, 무제한급 출전을 못 하게 됐을 때 ‘다음 기회’ 어쩌고 하면서 물러섰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머리 박박 밀고 나가겠다고 들이댔으니까 인생이 바뀐 겁니다. 시간 끌지 말고, 이것저것 재지 말고 지금 도전하세요.”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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