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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9)] 축구계 ‘빅 마우스’ 신문선 명지대 교수 

손흥민 같은 ‘걸작’ 축구도 그림도 딱 보면 感이 옵니다 

미술 컬렉터로도 유명… 홍익대 앞 ‘와우갤러리’ 오픈
“정의롭고 재미있게 살려면 경제적 기반 갖춰야”


▎2019년 9월 개관한 서울 서교동 와우갤러리에서 인터뷰와 사진 촬영에 임한 신문선 교수는 예전보다 훨씬 밝고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신문선(61) 명지대 기록정보대학원 교수는 한국 축구계의 ‘빅 마우스’다. 축구 국가대표 출신인 그는 1986년 28세 나이에 축구 해설을 시작해 20년 동안 지상파 TV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이끄는 해설가로 자리를 지켰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부터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5회 연속 지상파 TV의 해설을 맡는 기록도 세웠다. 그는 해설가로서 정확하고 공정한 해설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의 문제점에 대해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이로 인해 대한축구협회 역대 집행부로부터 많은 공격을 당했다.

그는 2017년 1월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 선거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당시 신 교수는 축구계의 누적된 문제점을 지적하고 특정 그룹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인 구조에서 한국 축구가 벗어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신문선 교수가 새롭고 특이한 일을 시작했다. 자신이 사는 마포구의 홍익대학교 정문 바로 앞에 ‘와우갤러리’를 낸 것이다. 홍익대 인근의 와우산과 감탄사 ‘와우(Wow)’에서 이름을 딴 이 갤러리의 개관식에서 신 교수는 “대한민국 최고의 미술대학이 있는 홍익대 앞에 제대로 된 갤러리 하나가 없는 현실이 부끄러웠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비와 향락이 흐르는 이 지역에 예술과 문화의 새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대한다. 이곳이 예술가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그라운드가 됐으면 좋겠다.”

뜻밖에도 신 교수는 이 분야에서 알아주는 미술 전문가이자 컬렉터(수집가)였다. 그는 “미술과 축구는 내 인생을 지탱해 준 두 축이었다”고 했다.

지난 10월 1일 와우갤러리에서 신 교수를 만났다. 한결 부드럽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신 교수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냈다. 축구와의 만남, 미술과의 인연, 공부와 운동을 병행한 학생 시절, 한국 최고의 축구 해설가가 되기까지….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오프사이드 사건, 프로축구연맹 총재 선거 등 민감한 부분에서도 예전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와우갤러리를 연 지 한 달 가까이 됐는데요. 해 보니 어떠신가요?

“주변에서 ‘어떻게 그런 멋있는 일을 하느냐. 부럽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이 땅값 비싼 홍대 앞에서 무조건 적자인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잖아요. 최용수 FC 서울 감독, 김도훈 울산 현대 감독 등 축구 후배들에게서도 많이 연락 옵니다. 스포츠에는 종목 구분 없이 어느 정도 폭력성이 내재돼 있어요. 그걸 룰로 제한하는 거죠. 그런 폭력성을 미술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김도훈 감독에게 ‘지난번 경기 때 네가 심판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는 모습을 TV로 봤다. 억울했겠지만 네가 잘못한 부분도 있다. 그 때문에 퇴장을 당하고 몇 경기 벤치에도 못 앉았다고 들었다.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 거냐. 시즌 중이니 바닷가나 산에 갈 수도 없고, 네가 좋아하는 골프도 할 수 없지 않나. 그럴 때 그림을 보면 힐링이 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고 조언해 줬습니다.”

누드화가 박영선 화실 훔쳐보며 미술에 눈떠


▎1976년 추계연맹전 득점상을 받는 신문선. / 사진:신문선
좋은 그림을 선택하는 건 좋은 선수를 뽑는 것과 비슷하다면서요.

“그렇죠. 좋은 그림을 모으면 그게 재테크의 수단도 됩니다. 처음 고서화나 도자기 등을 사려는 사람이 작품을 보는 안목이 없으면 헛돈을 쓰게 됩니다. 바가지를 쓰든지 가짜를 사게 되는 거죠. 그런 ‘수업료’를 안 내고 문화를 즐기면서 재테크를 하는 길은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겁니다. 저는 그런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초대하려고 합니다. 축구도 똑같아요. 딱 보면 ‘저 선수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오는 친구가 있어요. 2010년 대표팀을 이끌던 조광래 감독이 손흥민(당시 18세로 독일 함부르크 소속)을 뽑을까 말까 망설일 때 제가 ‘뽑으세요. 흥민이는 한국 최고의 선수들과 같이 훈련하는 것만으로도 동기부여가 되고 실력이 늘 겁니다. 소속팀으로 돌아가면 자신감이 붙어서 더 잘할 겁니다’고 강력히 추천했죠. 작가도 마찬가집니다. 작가의 화풍과 이력·스토리 등을 다 알면 훨씬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미술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신문선의 결승골로 서울체고가 3관왕에 올랐다는 [일간스포츠] 1976년 10월 22일자 기사. / 사진:신문선의 결승골로 서울체고가 3관왕에 올랐다는 [일간스포츠] 1976년 10월 22일자 기사.
“연세대에 입학한 뒤 게이오(慶應)대와의 교류전을 위해 일본에 갔어요. 제가 일본어와 영어를 좀 하니까 게이오대 한 선수가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가 봤더니 작은 정원에 소나무가 있고 그 밑에 우리나라 3층 석탑과 석등이 있어요. 다실(茶室)에 조선의 반닫이가 놓여 있는데 그 위에 하얀 달항아리가 있는 겁니다. 거기서 일본 선수 부친이 끓여주신 차를 마시던 장면이 흑백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기억에 선명해요. 게이오대가 한국에 왔을 때는 그 선수와 함께 부친의 심부름으로 한국 도예가들의 다완(찻사발)을 샀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문화적 임팩트가 너무 강해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죠. 연세대 축구부 숙소와 가까운 아현동 굴레방다리에 고서화점과 골동품 가게가 밀집돼 있었어요. 시간만 나면 거기 가서 그림 구경하고 그림에 써 놓은 화제(畵題)를 읽고 한자도 해석하곤 했죠. 돈이 없어서 작품은 못 샀지만 그런 즐거움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어릴 적 미술을 접한 계기도 있었다면서요.

“제 집이 서울 효창동이고 저는 청파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어요. 당시는 청파동·공덕동·만리동 등 동네끼리 돈내기 축구시합이 많았어요. 시합은 우리가 뛰고 돈은 동네 건달 형님들이 냈죠. 어느 날 동네 형님이 ‘야, 우리 동네에 빨가벗은 여자 그리는 사람이 있어’라고 솔깃한 얘기를 하는 겁니다. 국내 최고의 누드작가로 불리는 박영선(1910∼1994) 선생의 화실이 우리 동네에 있었던 거죠. 개구쟁이들이 담을 넘어서 몰래 누드 그리는 걸 훔쳐보다가 걸려서 담뱃대로 맞기도 했어요. 그게 미술에 대한 첫정이죠, 하하. 2006년에 박영선 유작전이 열렸는데 플루트를 부는 여인의 누드 브론즈(청동상)가 나왔어요. 그걸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어릴 적 창문 틈으로 훔쳐보던 박영선 선생의 화실에 있던 작품이었거든요. ‘이건 절대 안 판다’는 유족에게 매일 찾아가 설득해서 결국 샀습니다. 당시 800만원을 줬는데 내 유년의 뷰파인더로 심장이 콩닥거리며 봤던 그 실물을 갖게 됐다는 뿌듯함은 돈으로 측량할 수가 없었죠.”

신 교수는 서울체중·고 1회 졸업생이다. 당시에는 중·고 구분 없이 ‘서울체육학교’였다. 이 학교는 당시 ‘지덕체를 갖춘 엘리트 스포츠 지도자를 양성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전국에서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학생을 선발해 기숙사 생활을 하게 하고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다. 대신 학비와 기숙사비는 무료였다. 한국 체육계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이 학교를 나왔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역임한 이용수 세종대 교수가 1회, 서울대 출신 축구 국가대표로 유명했던 강신우 전 SBS 해설위원이 2회 졸업생이다.

빠르고 기술 좋은 선수… 논문 쓰기 위해 27살에 은퇴


▎연세대 재학 당시 정기 연-고전에 출전한 신문선. 오른쪽 윙이나 풀백으로 뛰었다. / 사진:연세대 재학 당시 정기 연-고전에 출전한 신문선. 오른쪽 윙이나 풀백으로 뛰었다.
체육학교 간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하셨죠.

“제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 체육학교가 생겼으니 운이 좋았죠. 당시 ‘청파 7번’으로 유명했을 정도로 축구를 잘했는데 부모님이 더는 축구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공부도 꽤 하는 아들이 만날 돈내기 시합 다니고, 건달 형들이랑 어울리는 게 위태했던 거죠. 돈내기 축구시합 끝에는 싸움이 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우리는 시합 갈 때 신주머니에 늘 돌멩이 10개 정도를 넣어서 갔거든요. 더는 축구를 못한다는 생각에 실의에 빠져 있는데 큰형이 신문에 난 서울체육학교 모집공고를 갖고 온 겁니다. IQ 테스트, 체력 테스트해서 들어갔죠. 육사보다 더 엄격했어요. 영어 교재 ‘모던 잉글리시’를 달달 외웠을 정도니까요. 시험 낙제하면 퇴교, 운동 못 해도 퇴교였어요. 210명이 입학했는데 120명만 졸업했죠. 왜 체육인이 글을 못쓰죠? 저는 [스포츠서울]에 20년, [중앙일보]와 [한겨레]에도 칼럼을 연재했어요. 한 번도 마감 시간 어긴 적이 없고, 원고를 고친 적도 없어요. 그 소양은 체육학교에서 닦은 거죠. 체육학교 안 갔으면 저는 반건달로 살았을지도 몰라요. 어떤 선생과 친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의 큰 변곡점이 됩니다.”

본인은 어떤 축구선수였나요?


▎1981년 태국 킹스컵에 출전한 국가대표팀. 앞줄 오른쪽이 신문선. / 사진:1981년 태국 킹스컵에 출전한 국가대표팀. 앞줄 오른쪽이 신문선.
“빠르고 기술이 좋았죠. 크로스와 롱 스로인도 인정받았고요. 득점상·미기상 등 개인상도 많이 탔고, 서울체고 3학년 때 전국대회 3관왕을 했어요. 연세대 때도 실업팀 꺾고 우승 많이 했습니다. 윙(측면 공격수)에서 뛰다가 상대 빠른 윙이 있으면 풀백(측면 수비수)으로 내려와 그 선수를 막았죠. 공군이랑 할 때는 차범근을 마크했어요. 감독이 특별한 임무를 주면 소화해 내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늘 공부하는 선수로 인정받았다는 게 뿌듯합니다. 유공(현 제주 유나이티드) 선수 때도 경영대학원을 다녔고, 84년 연세대 교육대학원도 시험 봐서 들어갔습니다. 면접관이 ‘프로 선수인데 수업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물어서 ‘수업을 안 들으면 학점이 나오겠습니까’ 반문했죠. 85년 12월, 한창 뛸 때인 27살에 은퇴를 결정했어요. 교육대학원 4학기를 마치고 논문을 써야 하는데 이 시기를 놓치면 영영 논문을 못 쓸 것 같았거든요.”

축구 해설을 하게 된 계기는?

“논문을 쓰기 위해 프로축구 선수를 은퇴했다는 얘기가 신문에 나는 바람에 제가 좀 유명해졌나 봐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MBC 라디오에서 스포츠 스크립터로 일하면서 스포츠 상식, 퀴즈 등 원고를 썼죠. 그러다 라디오에 출연하게 됐고, 중계까지 하게 됐습니다. 당시 정계춘 PD님이 ‘방송은 재밌어야 한다’면서 소니의 방송용 녹음기를 사 주시고 릴 테이프 편집하는 것도 가르쳐 주셨어요. 방송 메커니즘을 이해하니까 좀 다른 해설을 할 수 있었죠. 당시 해설자들이 쓰던 일본식 용어를 바로잡고, 제가 배운 운동 역학과 스포츠 생리학에 근거한 해설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지금도 회자되는 ‘디딤발’ 입니다. 슈팅을 할 때 디딤발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킥의 방향과 강도가 달라진다는 거죠. 좋은 찬스에서 소위 ‘똥볼’을 찼을 때 비난만 하는 게 아니라 왜 저런 킥을 하게 됐는지를 과학적인 근거에 바탕해서 설명해 준 겁니다.”

해설을 위해 남다르게 준비한 게 있나요?

“지금이야 인터넷과 이메일 등을 통해 어떤 정보든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텔렉스(전신 인쇄기)’라는 것밖에 없었어요. 외국에서 타전한 내용이 종이에 ‘지지지직’ 소리를 내며 인쇄돼 나오는 거죠. 제가 다니던 국제상사(프로스펙스)나 칼럼을 쓰던 [스포츠서울]의 텔렉스를 통해 해외 선수의 자료를 받아 꼼꼼하게 분석했어요. 데이터나 팩트가 확인이 안 되면 잠을 못 잤죠. 라디오를 하면서 마이크를 어떻게 써야 명료한 소리가 나는지를 배운 것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마이크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소리가 뭉개집니다. 방송하면서 신문에 칼럼을 쓴 것도 정말 큰 힘이 됐어요. 90분 중계를 앞두고는 이 경기의 주제를 뭐로 잡아야 할지를 정하고, 그 아래 하위개념 몇 개를 만들어서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전달되도록 애썼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게 97년 도쿄대첩이죠. 송재익 캐스터의 “후지산이 무너집니다”라는 멘트로도 유명하죠.

“그날 오프닝 때 한 말을 지금도 다 기억합니다. 송 캐스터가 ‘오늘 경기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물었고 저는 ‘일본은 오늘 경기를 하기 전에 아랍에미리트를 다녀왔습니다’고 말하고 그곳과 도쿄 간의 비행시간·시차·기온차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죠. 그리고 ‘전반전만 잘 버티면 됩니다’고 했습니다. 전반 중반에 골을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눈에는 일본 선수들의 컨디션 사이클이 급격히 떨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절대로 괜찮습니다. 따라가면 됩니다’라고 계속 멘트를 했습니다. 결국 이민성의 결승골로 우리가 2-1로 이겼지요. 이민성의 결승골이 터지는 순간 송 캐스터가 ‘후지산이 무너집니다’고 말했습니다.”

‘1등 해설’ 비결은 남다른 사전 준비


▎와우갤러리 개관 전시회 초대작가인 권순철 선생의 작품 앞에 선 신문선 교수.
2002 월드컵 때는 건국대 동문회로부터 상을 받았다면서요?

“폴란드와의 첫 경기 선제골은 황선홍, 쐐기골은 유상철이 넣었습니다. 이영표도 큰 역할을 했고요. 모두 건국대 출신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건대 출신 동문들 저녁에 소주 한잔하셔도 되겠습니다’고 멘트를 했죠. 월드컵 끝나고 건국대 동문회에서 저한테 행운의 열쇠를 선물해 줬습니다. 그런 게 방송의 역할이거든요. 경기나 선수와 관련한 스토리들을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넣어주면 시청자의 흥미를 끌 수도 있고, 뜻밖의 홍보 효과를 누릴 수도 있잖습니까. 요즘은 해설자와 캐스터의 역할이 잘 구분되지 않는 느낌이 들어요.”

신 교수의 인생에 또 하나의 변곡점이 된 게 ‘2006년 독일 월드컵 스위스전 오프사이드 사건’이다. 0-1로 뒤진 후반 막판, 우리 진영에서 스위스 선수가 패스한 게 이호 선수의 다리를 맞고 굴절돼 측면으로 흘렀다. 프라이 선수가 그 볼을 잡는 순간 바로 앞에 있던 부심이 오프사이드 깃발을 들었다. 우리 선수들이 멈칫하는 동안 프라이는 유유히 골을 넣었다. 주심은 골로 인정했다. 난리가 났다. MBC 해설위원 차두리는 “이건 사기예요, 사기”라고 흥분했다. SBS 신문선 해설위원만 “우리 선수를 맞고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에 오프사이드가 아니다. 부심이 깃발을 들었더라도 오프사이드에 대한 최종 결정은 주심이 한다. 주심이 휘슬을 불기 전까지 우리 선수들은 정상적인 플레이를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신 위원만 맞는 말을 했지만 엄청난 욕을 먹고, SBS에서 중도하차해야 했다.


▎선수 은퇴 후 국제상사에서 홍보·광고부장으로 일할 때의 신문선. / 사진:신문선
당시 상황을 좀 정리해 주시죠.

“스위스전 끝나고 방송 3사 중계팀이 한 식당에 다 모였어요. 다른 방송사 PD들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봐요.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을 들어가며 오프사이드가 아니라고 설명해줬죠. 다음날 경기도 해설을 하고 3∼4일 지났는데 서울 SBS 스포츠제작부 쪽에서 전화가 왔어요. ‘타 방송사에서 국제심판을 내세워 오심이라고 하고, 신 위원이 틀렸다고 합니다. 두 경기 정도만 쉬었다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기에 알겠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비행기 표 끊어서 한국 들어와 버렸어요. 인천공항에서 기자들에게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FIFA 부회장인데 그 상황을 오심이라며 FIFA에 제소하겠다고 한다. 예선 탈락한 책임을 왜 심판에게 돌리느냐’고 바른 소리를 했어요. 그다음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죠.”

평생 먹을 욕을 그때 다 먹은 것 같은데요.

“마녀사냥 당해서 욕먹는 건 견딜 수 있었어요. 가장 마음 아팠던 건 일부 선후배 축구인의 모습이었죠. 사석에선 ‘신문선이 맞다. 옳은 얘기를 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방송 카메라가 돌아가면 그 얘기를 쏙 빼더라고요. 집에서 LP 판으로 베토벤 교향곡 영웅·운명, 바흐의 무반주 첼로 곡 실컷 들었어요. 이천의 도예가를 찾아가기도 했고요. 비 오는 날에도 한강 공원을 혼자 뛰었어요. 자전거 타고 가던 분들이 날 보고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와 인사하고, 존경한다는 말도 했어요. 지금도 제 목소리 흉내 내는 분들이 있잖아요. 감사한 건 ‘바른말 옳은 해설 했다.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쓴소리를 한다’고 인정해 주시는 겁니다.”

명지대 교수로 재직 중 2014년 성남 FC 사장을 맡으셨는데요.

“안식년이라 생각하고 봉사하러 간다는 마음이 컸어요. 공모 사장으로 뽑히면서 ‘정치적 중립’ 선언을 했습니다. 낙하산(윗선의 부탁이나 압력)으로 지도자나 선수 받는 일 절대 없다, 경영 투명성을 지키겠다고 약속했고 끝까지 해냈습니다. 2부리그 강등 위기에서 벗어나고, 그해 FA(축구협회)컵 우승으로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도 나갔죠. 시의회에서 예산 받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그때 이렇게 머리가 세었죠(웃음). 그래도 시민구단으로서 부정의 소지를 없애고, 성남 FC 연고 팀 선수와 가족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고 나왔다는 게 보람이죠.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 그렇게 붙잡았는데 깨끗이 학교로 복귀했습니다.”

45세 전에 월 2000만원 수입, 자신과 약속 지켜


▎캐스터 송재익-해설 신문선 명콤비가 함께한 SBS의 2002 월드컵 중계팀. / 사진:신문선
성남 구단 사장 경험을 바탕으로 2017년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에 도전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죠.

“당시 권오갑 총재(현대중공업 부회장)가 더는 맡지 않겠다고 했고, 제가 단독출마해 찬반을 묻는 형식이 됐죠. 시·도민 축구단이 적극 지지를 약속했는데 투표 일주일 남기고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어요. 제가 당선되면 힘들어지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23표 중 5표를 얻었는데, 저는 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총재가 됐으면 축구의 공정성만큼은 확실히 세워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판정에 이의신청해서 패소해도 상고할 수 있게 하고, 승부조작에 대해서는 지구에서 가장 엄격한 벌을 내리겠다고 공약했어요. 저는 경제적 기반이 있으니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소신껏 할 수 있다고 믿었죠.”

2년 전 프로연맹 회장 선거 당시와 비교하면 표정이 한결 밝고 여유 있어 보입니다. 앞으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2014년 FA컵 우승을 차지한 성남 FC. 왼쪽부터 이재명 시장, 김학범 감독, 신문선 사장.
“요즘 시간 날 때마다 제주도에 가서 한라산 둘레길과 미술관·박물관 돌아다니는 게 큰 즐거움입니다.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할 사람은 대중성·전문성을 갖추고 마케팅과 스포츠외교도 알아야겠죠. 축구를 위협하는 공정성 훼손을 바로잡는 일도 시급합니다. 누가 용기 있게 올곧은 철학을 갖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만약 그 일에 나선다면 지금보다 머리가 더 셀 거고, 지금처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도 없겠지요. 그러나 만약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면, 욕심은 없지만, 심각하게 고민은 해야겠죠.”

신 교수에게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주변의 평가에 크게 신경 쓰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정의를 위해 살았는가, 옳은 행동을 하며 살았는가,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그림자를 밟혔는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한 뒤에 ‘야, 넌 잘 살았니?’ 에 대한 답을 내면 됩니다”고 말했다.

정의롭게 살면서도 즐겁게 살 수 있는지 물었다. 그 대답 또한 명쾌했다. “물론이죠. 그러려면 인생의 플랜을 짜야 합니다. 저는 5년 주기로 잘라서 플랜을 짭니다. 45세가 되기 전에 월 소득 2000만원을 만들겠다고 계획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IMF 구제금융 위기 때 이 건물(와우갤러리)을 샀어요. 경제적인 안정, 큰 문제 없는 가정,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내 일’이 있으면 할 말 하면서도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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