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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8)] 하키 국가대표 출신 이진숙 동아오츠카 상무 

남보다 일찍 많이 끝까지… 두 겹 유리천장도 뚫리더라 

여자·운동선수 출신 차별·편견, 정신력·열정으로 돌파
스포츠 이온음료 1위 지켜 업계 최초 여성 임원 올라


▎이진숙 상무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선수 시절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으로 이겨냈다”고 말했다. 서울 용두동 동아오츠카 본사 집무실에 선 이 상무.
이진숙(51) 씨는 포카리스웨트·오로나민C·데미소다 등을 생산하는 동아오츠카의 커뮤니케이션실장이다. 동아오츠카는 동아쏘시오홀딩스그룹의 자회사로서 국내 3개 공장(안양·청주·칠서)에서 1000명에 가까운 한국 직원들이 제품을 만들고 있다. 상무이사인 그는 음료업계 최초로 여성 임원에 오른 기록도 갖고 있다. 그는 하키 국가대표 출신이고 미스코리아 인천 선(善)에 오른 특이한 경력도 있다.

이 상무는 업계에서 ‘마당발’ ‘똑순이’로 소문이 나 있다. 똑 부러지면서도 시원시원한 말투, 세련되면서도 다정다감한 매너는 만나는 사람에게 호감을 준다. 28년 동안 소비자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 파트에서 일하면서 포카리스웨트가 스포츠 이온음료 시장에서 독보적인 1위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청소년과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사회공헌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 상무는 ‘여성’과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두 겹 유리천장을 깨뜨렸다. 편견과 차별의 어두운 시기를 그는 운동선수 특유의 정신력과 열정으로 돌파했다. 지금은 여성과 운동선수 출신 후배들이 닮고 싶어 하는 롤 모델로 우뚝 서 있다.

지난 추석을 앞두고 서울 용두동 동아오츠카 본사에서 이 상무를 만났다. 그는 “최근 한·일 경제분쟁으로 인한 사회적 이슈가 있었으나 지난 40년간 동아오츠카와 포카리스웨트가 펼쳐온 ‘착한 행보’를 기억하는 대부분의 고객들은 변함없이 신뢰와 격려를 보내주고 계십니다”고 말했다. 듣던 대로 당차고 시원시원한 모습이었다.

미스 인천 출신… 업계 ‘마당발’ ‘똑순이’로 소문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지원에 나선 이진숙 상무. / 사진:이진숙
현재 직위와 하시는 일은?

“동아오츠카 마케팅본부 산하 커뮤니케이션실 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스포츠 대회와 이벤트를 후원하면서 저희 브랜드를 알리고, 새로운 제품의 타깃 방향을 설정하고, 청소년을 위한 CSR(사회공헌활동)도 관장합니다. 언론사와 디지털 매체를 대상으로 홍보와 마케팅을 전개하는 것도 저희 일입니다. 이번에 사이언스 파트도 저희가 신설 확대했습니다. 사이언스 파트는 저희 제품의 속성과 기능을 스포츠의학 전문가들이 연구해 엘리트 선수의 경기력 향상을 돕고, 일반인들이 일상에서 스포츠를 올바르고 안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포카리스웨트와 함께한 28년’이라고 자신의 직장생활을 정의하셨는데요.


▎재수생 시절 미스 인천 선에 뽑혀 미스코리아 본선에 나간 이진숙. / 사진:이진숙
“포카리스웨트는 1987년 출시 당시 소비자들에게 낯선 음료였기 때문에 맛에 대한 설명과 효과에 대한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이 생소한 음료를 알리기 위해 운동선수를 타깃으로 고군분투한 끝에 국내 이온음료 1위라는 자리까지 오게 되었죠. 지난 28년간 포카리스웨트를 국내에 알리며 수많은 난관을 만났지만, 제품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포카리스웨트와 함께 성장한 것 같아요.”

포카리스웨트가 타 스포츠 이온음료와 다른 차별화 포인트가 있나요?

“‘병원에서 환자가 맞는 링거(수액)를 일반인이 마시는 음료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착안에서 나온 게 포카리스웨트입니다. 그래서 ‘내 몸에 가장 가까운 물’을 콘셉트로 잡았어요. 몸에서 배출되는 수분(땀)은 색깔이 없잖아요. 그래서 포카리스웨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무색입니다. 다른 이온음료가 색소를 써서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과는 방향이 달라요. 10대 시절엔 색소가 들어간 음료를 선호하더라도 20∼30대 군인들은 극한 훈련을 받은 뒤 수분 섭취와 갈증 해소에 포카리가 좋다는 걸 알게 되죠. 체액과 가장 가까운 포카리스웨트는 요즘 군부대 PX에서 인기랍니다. 하하.”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설득력과 스피치 기법이 돋보이는데요. 따로 훈련을 받으셨나요?

“제가 6남1녀 중 막내거든요. 대가족 공동체 안에서 소통을 배웠습니다. 단체운동인 하키를 하면서도 소통이 몸에 뱄죠. 20대 초반에 KBS 2TV에서 최동철 선생님이 진행하시던 [스포츠 쇼]에서 ‘이진숙의 스포츠클럽’이라는 코너를 맡았어요. PD님이 쓴 원고를 보고 그대로 외워서 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NG를 10번 넘게 내기도 했죠. 지금 봐도 민망할 정도로 굉장히 못했지만 그게 큰 경험이 됐습니다. 소비자 소통을 28년째 하다 보니 스킬도 좀 늘었어요. 커뮤니케이션은 상대방의 마음과 내 마음이 통하는 것,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진정성이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진정성만큼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아침 조찬이나 저녁 시간을 쪼개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다양한 지식을 나누고 있습니다.”

옆에서 지켜봐도 힘들고 별로 재미있어 보이지도 않는 하키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아버지가 검도 7단이시고, 어머니는 소학교 시절 배구를 하셨어요. 오빠 6명도 동네서 운동 좀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저희는 스포츠 가족입니다. 명절 땐 3대3 족구도 하고 그랬죠. 전 초등학교 때 테니스를 배웠어요. 필드하키부가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체육 시간에 달리기만 하면 1등을 하는 저를 하키 선생님이 ‘하키부 들어오라’고 자꾸 권하셨어요. 안 하겠다고 버텼는데 ‘소년체전 나가야 하는데 결원이 생겼다. 네가 안 들어오면 체전에 나갈 수가 없다’고 하셔서 할 수 없이 나갔고, 거기서 우승을 한 겁니다. 결국 하키가 제 운명이 돼 버렸고, 남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정말 열심히 해서 가슴에 태극마크 달아야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죠.”

그런데 뜬금없이 미스코리아에 나가게 됐네요.

“부평여고에 진학해서 열심히 했지만 늦게 하키를 시작한 터라 실력이 떨어져 대학에 못 갔어요. 재수를 시작하면서 마음을 다잡으려고 동네 미용실에서 쇼트커트를 했는데 원장님이 커트 끝날 때쯤 ‘아차, 미스코리아 인천 예선이 있는데 우리 쪽에서 한 명이 부족해. 네가 한번 나가 봐라’고 권하시는 겁니다. 예상치 못하게 미스 인천 선(善)에 뽑혔고, 미스코리아 본선에 나가게 됐죠. 있는 그대로 가식 없이 제 모습을 보여준 게 어필했나 봐요. 본선에서 탤런트상을 받았습니다.”

발목 인대 끊어져 은퇴, ‘포카리스웨트’와 재회


▎경희대 하키부 시절 이진숙. 엄청나게 많이 뛰는 미드필더였다. / 사진:이진숙
연예계로 진출할 수도 있었겠네요.

“그렇죠. 하지만 전 하키선수로서 대학에 가고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목표를 바꾸지 않았어요. 경희대에 진학해서 각고의 노력 끝에 국가대표 2진이 될 수 있었어요. 다른 선수들이 외출이나 친구 만나러 나갈 때 혼자 모래주머니 차고 뛰고, 남자 선배들과 같이 크로스컨트리를 했죠. 60㎏ 무게를 들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배에 15㎏ 바벨 올려놓고 윗몸일으키기도 하고요. 단체로 운동하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게 훨씬 힘들어요. 1시간 운동하기로 했다가 45분 하고 ‘힘들어서 못 하겠다’ 해도 누구도 뭐라고 안 하거든요. 저는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국가대표가 됐는데 이진숙은 부상으로 스틱을 놓게 된다. 1989년 대표 2진이 돼 대표팀 훈련 마치고 경희대에 복귀해 러시아 원정을 갔다. 하키 선수는 인조잔디에서 경기를 하고 상대 선수 스틱을 밟는 경우가 많아 발목을 잘 다친다. 그때도 상대 스틱을 밟아 발목을 접질렸는데 뛰고 싶은 마음에 발목 테이핑만 하고 다음날 경기에 나갔다. 결국 발목 인대가 완전히 끊어졌다. 가톨릭 신자인 이진숙은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했다. ‘연예계도 포기하고 이렇게 힘들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라고.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교직을 이수하고 수원 영신여고에서 3개월간 강사를 하던 중학교 선배 추천으로 동아오츠카(당시는 동아식품)에 입사하게 된다.


▎동아오츠카 직원들의 연탄봉사에 함께한 이진숙 상무. / 사진:이진숙
포카리스웨트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포카리가 한국에 소개된 게 1987년인데 저는 한국에 론칭되기 전 원정 훈련 중에 이 친구를 만났어요. 저는 공격과 수비에 모두 가담하는 미드필더라 많이 뛰어야 해요. 땀도 많이 흘리는 체질이어서 조금만 뛰고 나면 유니폼이 다 젖어서 짜면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죠. 전반 끝나고 수분 섭취를 많이 해야 하는데 감독님이 ‘물 많이 마시면 배가 출렁출렁하고 나중에 복통이 온다’면서 소금 캡슐 한 알과 물 한 컵만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다른 나라 선수들은 물통에 하얀 가루를 넣고 흔들어서 벌컥벌컥 마시는 겁니다. 말도 안 통하는데 가서 좀 달라고 해서 마셨더니 평소에 전혀 접해보지 못한 맛이었어요. 그래도 갈증이 나서 벌컥벌컥 마시고 후반전에 들어갔는데 갈증ㆍ복통 전혀 없었어요. 다른 나라 선수들은 이렇게 관리를 하는구나. 마시는 것도 의학적으로 하는구나 싶었죠. 하키계에서는 그때부터 포카리스웨트를 생명수로 생각할 정도가 됐죠. 하하.”

여성에다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더블 핸디캡’을 안고 직장생활을 시작하셨죠.

“입사하자마자 팀장님이 기안지를 작성하라고 하셨어요. 수기(手記)인데다 한자가 워낙 많아 거의 그리다시피 했죠. 시간도 오래 걸리고 오타도 많았는데 팀장님이 ‘야, 이런 것도 틀려?’ 하시는 겁니다. 운동 안 한 사람도 틀릴 수 있는데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색깔을 갖고 본 거죠. 나중에 그 선배가 ‘사실 네가 경력이 화려해서 일찍 그만두고 나갈 줄 알았어. 그래서 더 심하게 대한 건데,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고 공부하는 게 후배지만 존경스러웠다’고 하셨어요. 안팎으로 부딪치고 깨지면서 하나하나 배워나갔죠.”

입사 초기에는 새벽 출근이 많았다면서요.

“능률협회에서 하는 CEO 조찬포럼에서 저희 제품을 홍보하는 일을 맡았어요. 장충동 신라호텔에 아침 일찍 도착하려면 인천에서 전철 첫차를 타야 했어요. 제품 홍보만 하고 회사로 들어가면 편한데, 그분들이 뭘 하시는지 궁금해서 살짝 들어가 봤어요. 앞에 커다란 화면을 띄워놓고 뭔가를 공부하는데 무슨 말인지 귀에는 안 들어와요. 그러나 연세 지긋하고 다들 성공하신 분들이 그 이른 아침에 와서 공부하는 걸 보면서 자극을 받았죠. ‘지금은 홍보 맨이지만 내가 앞으로 이 자리에 앉으리라’ 다짐을 했어요.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 부족함을 하나씩 채우다 보니 여성 임원까지 오게 됐네요.”

애 키운다고 승진 불이익, 이 악물고 재도전


▎동아오츠카 제품들을 전시한 본사 로비에서 밝게 웃는 이진숙 상무.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이진숙 상무의 개인적인 경험담이지만, 1980∼90년대 여성 직장인이 겪어야 했던 보편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동아오츠카만의 기업문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95년 3월에 결혼을 했고 11월에 덜컥 아이가 생겼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여성이 결혼을 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게 보편적이었다. 심지어 임신까지 했다면 당연히 퇴사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이진숙 사원은 6개월간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외부 관계자들과의 회의에서 자욱한 담배 연기를 맡아야 했고, 심지어 임신 사실을 모르는 동료도 홍보물을 싣고 가는 봉고차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이진숙은 담당 임원의 배려로 임신 사실을 알리고 난 뒤에도 퇴사하지 않았지만 대신 출산 하루 전까지 회사에 다녀야 했다.

워킹맘으로서 승진 등에 차별도 있었다면서요.

“아이 낳고 21일 만에 출근을 했어요. 요즘이야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그해 진급시험에 저 포함 4명이 올라왔어요. 새로 오신 사장님이 인터뷰를 하시는데 저한테는 ‘아이는 잘 커요?’ 한 마디 묻고, 다른 후배들한테는 업무 관련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아, 안 되는구나’ 하는 직감이 왔죠. 끝나고 사장실을 찾아가서 ‘저는 아이 낳기 하루 전까지 일했고, 출산 후 21일 만에 회사 나와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억울합니다’고 말씀드렸더니 ‘아, 알았어요. 필기시험 잘 봐요’ 라면서 내보내시더라고요. 결국 진급이 안 됐죠. ‘이 조직은 안 되나 보다’ 싶어서 사표 내고 학교로 가려다가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나와 같은 여자 후배들에게 기회가 없을 거다’는 생각에 운동했던 사람으로서 사명감과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다음달 1일부터 31일까지 매일 출근부에 도장을 찍었죠. 그다음 승진 시험에서도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부터는 회사에서 제 진심과 열정을 알아주시더라고요. 현재는 많이 개선되어 여성 관리자도 늘어나고 있고, 여성가족부에서 지정한 가족 친화 기업도 됐어요.”

그만큼 가족을 돌보는 데 시간을 내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제가 부장 시절에 당시 사장님 상가에 갔는데 사장님이 남편에게 ‘매주 행사가 많아 이 부장을 못 쉬게 해서 미안합니다’고 하셨어요. 남편이 ‘아닙니다. 저는 이진숙 씨와 결혼은 했지만 다시 동아오츠카로 시집보낸 마음입니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잘 지켜봐 주세요’라고 응답했어요. 사장님이 미안해하시던 게 기억납니다.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맡아주셨고, 남편이 이해하고 희생해 준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모처럼 일요일에 쉬게 됐는데 아이가 ‘엄마, 오늘은 일 안 나가?’라고 물어요. ‘응, 오늘은 아들이랑 놀아주려고’ 했더니 아이가 ‘엄마는 항상 일하는 사람이잖아. 난 괜찮으니까 회사 가’ 이러는 겁니다. 서운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해서 눈물을 왈칵 쏟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 상무의 눈시울이 불그레해졌다.)”

많은 워킹맘들이 아이 문제로 고민하는데요.

“저도 그랬죠. 말썽 한번 안 피우던 녀석이 중학생 때 사춘기가 오면서 살짝 방황했어요. 휴대폰과 게임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 야단을 치면서 손을 올렸더니 제 팔을 꽉 잡는 겁니다. 그 손이 아들 손이 아니라 남자 손이었어요. ‘아, 이제는 내 힘으로 안 되는구나’ 싶어서 고민하고 기도했죠. 다행히 중국에 좋은 학교를 소개받아서 아이에게 ‘가겠느냐’ 했더니 일주일 고민하다가 가겠다고 했어요. 그 아이가 베이징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올해 들어와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청소년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고, 스포츠를 통해 청소년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이끌어주는 일에 더 매진하게 됐습니다.”

동아오츠카는 이진숙 상무의 진두지휘 아래 청소년 지원 사업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 매년 여름방학에 155명의 청소년이 휴전선 155마일을 걸으며 분단 조국의 현실과 안보를 생각하고, 협동심과 인내심을 키우는 휴전선 155마일 횡단 행사를 한다. 올해로 벌써 25회째를 맞았다.

‘풋살 히어로즈’도 이 상무가 애착을 갖는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팀당 11명의 인원과 넓은 축구장이 필요하다. 좁은 공간에서 적은 인원이 축구를 즐길 수 있는 게 풋살이다. 동아오츠카가 교육청과 함께 기획하고 한국풋살연맹(회장 김대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청소년들이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열어줬다. 동아오츠카는 이 아이들을 주인공(히어로즈)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큰 예산을 들여 특별한 무대를 꾸민다. 서울 올림픽공원, 한강시민공원 등에서 대회를 했고 올해는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명문대에서 풋살 히어로즈 대회를 열었다.

지·덕·체가 아니라 체·덕·지로 아이들 키워야


▎동아오츠카가 내놓은 이온 워터 행사장의 이진숙 상무. / 사진:이진숙
대학 캠퍼스에서 풋살 대회를 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 1회 풋살 히어로즈 출신으로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이 있어요. 요즘은 공부와 스포츠를 어떻게 병행하느냐가 화두잖아요. 부모들이 ‘국·영·수 해야지 체육 할 시간이 어디 있나’고 하는데 그건 정말 짧은 생각입니다. 공부는 결국 체력 싸움이거든요.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얼마나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느냐가 성패를 좌우합니다. 지·덕·체(智·德·體)가 아니라 체·덕·지 순으로 가는 게 맞고,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면 실패할 확률이 낮아요. 청소년 시절 스포츠 활동을 통해 추억도 쌓고 공부할 수 있는 기본 체력도 키워서 자신의 목표를 이룬 선배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지요.”

그런 점에서 스포츠의 역할과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겠네요.

“제가 동아오츠카에서 28년을 일할 수 있었던 건 스포츠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키 선수를 하면서 페어플레이·책임감·협동심·정직함, 이런 가치를 내면화했어요. 상대에게 거친 플레이를 하면 심판이 휘슬을 불어 파울을 지적합니다. 그러면 내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미안함을 표현하고 다시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잘했을 때는 칭찬과 격려를 받고, 못했을 땐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스포츠를 통해 배운 가치가 사회에서 얼마나 큰 힘으로 작용하는지 몰라요.”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을까요?

“제가 대한체육회 산하 스포츠혁신위원회 위원으로 있어요. ‘학기 중 모든 대회를 주말에만 열어야 하느냐’는 문제로 체육계가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요. 획일화보다는 현실을 반영한 시스템 도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수들이 처해 있는 환경을 고려해 선수촌 학습, 인터넷 강의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학습권을 보장하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상무에게 앞으로의 계획과 비전에 대해 물었다. 그는 “현역에서 마지막까지 누구보다 열정적인 마케터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싶어요. 그때까지 청소년들의 건강한 성장을 돕고, 우수한 제품으로 사람들의 건강에 이바지하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운동선수 출신과 여성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싶어요. 땀의 가치와 진정성을 믿는 후배들이 의지할 수 있는 선배이고 싶습니다”고 대답했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이 상무가 “근데, 전 절대 레전드가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레전드를 찾아서’에 소개했던) 서장훈·안정환 같은 분들도 자기는 레전드가 아니라고 합니다”고 내가 맞받았다. 이진숙이 레전드인지 아닌지는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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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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