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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대한노인회중앙회 공동기획 同行(2) | 존경받는 시니어, 골드보이가 간다] ‘별이 빛나는 밤에’ 윤항기의 ‘카멜레온 인생’ 

“늘 새로운 걸 찾다 여기까지 왔네요” 

1959년 미 8군 가수 데뷔 후 목사·교육자 등으로 변신
내년 60주년 기념 공연·앨범 준비… “난 여전히 젊어”


▎‘원조’ 싱어송라이터 윤항기는 “나이가 들수록 욕심을 버리고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 한강의 한남대교를 지나 남산 1호 터널 요금소를 나오면 오른편으로 ‘예음음악신학교’ 간판이 보인다. 예음음악신학교가 이곳에 자리한 지는 10년쯤 된다. 1990년 설립 이래 서울 둔촌동-성남 분당-서울 오금동 등을 거쳐 이곳 중구 예장동에 둥지를 틀었다. 이 학교의 총장은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나는 행복합니다’등의 노래로 잘 알려진 윤항기(76, 교회음악 박사)다.

교명(校名)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학교는 음악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신학대학이다. 윤항기는 “1990년 개교 이후 1000명 가까운 학생을 배출했다”며 “국내에서는 음악을 가르치는 최초의 신학교라는 점에서 규모는 작지만 나름대로 자부심은 크다”고 말했다.

윤복희의 오빠로도 유명한 윤항기는 올해로 가수 데뷔 60년을 맞았다. 1959년 작곡가 김희갑(83)이 악단장으로 있던 미 8군 ‘에이-원 쇼(A-One Show)’를 통해 데뷔한 그는 목회활동(1990~2014년)을 거친 뒤 2014년 다시 가수로 돌아왔다. 윤항기는 2014년 목사직에서 정년퇴직한 뒤 원로목사의 길 대신 가수 복귀를 택했다. 그리고 그해 데뷔 55주년 기념 음반을 발표했다.

변신의 원동력은 도전의식


▎2014년 JTBC [닥터의 승부]에 출연한 윤항기.
월간중앙이 9월 4일 예음음악신학교에서 윤항기와 만났다. 하늘색 체크무늬 셔츠에 감색 재킷 그리고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의 윤항기는 영락없는 청년이었다. 팔순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군살 없는 날렵한 몸매에서 젊음과 활력이 뿜어지는 듯했다.

윤항기는 “올해로 가수 데뷔 60주년을 맞았는데 내년에 조촐하게 기념 공연과 기념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며 “팔십 가까운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가장 보람된 일은 역시 음악이었던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2011년 KBS [콘서트 7080] 300회 특집 무대에 오른 윤항기가 ‘친구야 친구야’를 열창하고 있다.
“1990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했지요. 그리고 5년 전인 2014년에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로 교회 일에서는 거의 손을 뗐어요. 지금은 가끔 주일에 국내외 여러 교회에 나가서 설교하거나 특강을 하는 정도입니다. 주 중에는 방송에 출연해서 가수로 활동하거나 각종 행사에도 나갑니다. 신학교에서는 젊은 학생들과 만나고 있어요. 예음음악신학교는 1990년에 목회 안수를 받고 제가 세웠습니다.”

가수에서 목회자로, 교육자로, 또다시 가수로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제 안에는 저 자신에 대한 도전의식이나 개척자 정신 같은 게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것 같아요. 늘 새로운 것을 찾으며 살아왔다고 할까요? 돌아보면 여려서부터 새 목표를 정하면 이룰 때까지 도전했었습니다. ‘키보이스’라는 그룹을 만들었던 것도, 미 8군에서 최초로 ‘패키지 쇼’를 연 것도 모두 새것을 갈구하는 데서 비롯된 것 같아요. 음악인으로 살 때도 늘 색다른 형태의 음악을 추구하려 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음악인으로 활동하다 목회자가 됐는데, 목회자가 된 뒤에도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음악 목사)을 걸었어요. 정년(停年)이 있어서 목사로서 은퇴는 했지만, 원로목사로 안주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늘 변화를 추구하는 게 제 삶의 근본적인 목표가 아닌가 싶습니다.”

1964년 결성된 ‘키보이스’는 국내 최초의 록음악 밴드(그룹사운드)라고 할 수 있다. 그해 ‘키보이스’는 독집 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로 데뷔했다. 1960년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는 트로트였지만 윤항기는 대중에게 생소한 록음악으로 승부를 걸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키보이스’에서는 윤항기가 드럼, 김홍탁이 일렉트릭 기타, 유희백이 보컬, 옥성빈이 키보드, 차도균이 베이스를 맡았다.

예음음악신학교는 어떤 학교인가요?

“예음음악신학교 설립 목적은 음악 목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학교를 세우기 전만 해도 국내에는 음악 목사라는 개념이 사실상 없었어요. 예음음악신학교는 음악 목사와 함께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 찬양 사역자 등을 양성·배출하고 있어요. 큰 규모의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학생 수는 1년에 30여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설립한 지 30년 가까이 되다 보니 지금까지 약 1000명을 배출했습니다.”

위키리 대신 얼떨결에 무대 올라


▎목회자로 변신한 윤항기가 2007년 부인 정경신씨와 함께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여러 직업을 경험했습니다. 각각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각각의 직업이) 확연히 다르죠. 음악인으로서 저는 가수뿐만 아니라 연주자·작사가·작곡가로도 활동했어요. 저 나름대로는 한국 대중음악에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냈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그런 게 밑거름이 돼서 오늘날 방탄소년단(BTS) 등 뛰어난 후배들이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웃음). 또 목회자로서는 25년 정도 사역했는데 남들에 비하면 출발이 많이 늦었죠. 일반적으로 서른 살쯤 목회를 시작한다고 봤을 때 40대 중반이면 연륜이 쌓일 무렵인데, 저는 그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했으니까요. 목회자로서 한창 무르익을 만한 때, 뭔가 갖출 만할 때 은퇴하게 된 셈이에요.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만큼 한국을 대표할 만한 큰 교회를 세워 보지는 못했지만, 음악 목사로서 저 나름대로 소명을 다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던 것 같아요.

또 교육자로서는 29년 전 이 나라에 최초로 음악신학교를 세웠지요. 당시에는 찬양신학원이라고 불렀었죠. 그때만 해도 엄숙한 교회 예배당에서 기타 치고, 노래하고, 드럼 두들긴다는 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날라리나 이단 취급받기에 십상이었죠. 교회 음악이라고 하면 클래식이 전부일 때였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당시(기타 치고, 노래하는) 시스템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었고, 지금은 전국 어느 교회를 가도 그런 스타일의 찬양팀이 있어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저는 그런 점들에 대해서는 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돌아보면 그 모든 것들이 제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또 저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한 것도 아닙니다. 종으로서 쓰임을 받은 거죠. 부름을 받았다고 할까요?”

가수 데뷔 계기가 궁금한데요.

“1959년 제 동생 윤복희가 서울 삼각지에 있는 미 8군 ‘에이-원 쇼’에 출연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동생을 만나러 미 8군에 갔는데 문득 ‘나도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밴드마스터(악단장)인 김희갑 선생님을 졸랐고, 그렇게 해서 음악을 배울 수 있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노래가 아닌 드럼을 배웠는데 그 인연으로 나중에 그룹 ‘키보이스’ 때 드럼을 맡게 됐지요. 드럼을 배우다 보니 노래가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당시 세계 최고의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내면서 노래를 배웠지요. 1959년 ‘에이-원쇼’의 메인 싱어가 위키리(이한필) 형님이었는데, 형님이 크리스마스 공연 때 감기몸살로 몸이 너무 아파서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됐어요. 그래서 갑자기 대타로 무대에 올라서 얼떨결에 데뷔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0년 10월 해병대 군악대로 입대했지요.”

죽을병 앞에서 서원한 목회자의 길


▎‘키보이스’가 1964년에 발표한 1집 [그녀 입술은 달콤해]의 앨범 재킷.
그룹사운드로 활동하던 윤항기는 1974년 솔로 가수로 전향했다. 윤항기는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이거야 정말’,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어떡하라고’ 등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1975년에는 영화 [나는 어떡하라고]의 주연을 맡아 영화배우로 데뷔하기도 했다.

윤항기는 1986년 86서울아시안게임 홍보곡인 ‘웰컴투코리아’를 끝으로 가수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 가 신학을 공부한 뒤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2014년 목회자에서 은퇴한 뒤 그해 신곡 ‘걱정을 말아요’를 담은 55주년 골든 앨범을 발표하며 가수 인생 2막을 열었다. 윤항기는 “당초 2014년에 55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했는데 국민적 아픔이 컸던 세월호 참사로 인해 2년 뒤인 2016년에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곡은요?

“많은 곡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별이 빛나는 밤에(1968)’에 가장 애착이 갑니다. 국내에서는 제가 초창기 싱어송라이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제가 최초로 만든 노래가 ‘별이 빛나는 밤에’거든요. 당시만 해도 트로트나 팝송을 들여와서 우리말 가사를 붙인 번안 가요가 주류였기 때문에 칸초네 스타일의 발라드 노래는 처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만일 제가 솔로로 활동했다면 그런 노래가 나올 수 없었을 텐데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팝 음악을 자주 접하게 됐고, 그런 과정에서 악상(樂想)을 얻었다고 할까요?”

목회자로 변신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원래 기독교 집안은 아니었고요. 아버지(성악가 겸 뮤지컬 배우 겸 극작가 윤부길)가 훌륭한 연예인이었는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러다 보니 어려서 저희 남매(2남2녀)의 고생이 매우 많았어요. 저는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동생 복희는 선친의 친구 집으로 보내졌어요. 저는 고아원에서 예배하고 찬송가 부르면서 잠시나마 자연스럽게(기독교와) 가까워졌어요. 성장한 뒤로는 숨가쁜 가수 활동을 하면서 신앙을 갖는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워졌지요. 하지만 어렸을 때 (신앙) 경험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그러다 한창 잘나가던 1978년에 폐결핵으로 쓰러졌는데 병원에서 말기(4기) 판정을 받은 겁니다. 당시만 해도 폐결핵 말기라면 열에 아홉은 죽는 시절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치료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1년 이상 가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망연자실해서 삶을 포기하고 있을 때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제 아내(정경신)와 동생이 저를 (교회로) 인도했지요.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만’이라는 말은 건강할 때 그냥 내뱉는 말이지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두려운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앙을 갖게 됐고, 기도원에 다니면서 금식하고 주사 맞아가면서 투병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저에게 다시 한번 새로운 삶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서원(誓願) 기도를 했어요. 병원에서는 1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던 제가 나중에 완쾌했어요. 기적이라는 말 이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그게 인연이 돼서 나중에 신학대학에 진학했고 훗날 목사가 됐던 겁니다.”

윤복희 위해 만든 노래… ‘여러분’


▎윤항기-복희 남매의 소싯적 모습. 두 사람은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 출전해 그랑프리를 거머쥐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기가수를 그만두고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요.

“동생이 1979년 초에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어요. 저도 병마와 싸우느라 힘들었지만, 동생의 마음고생을 보니 정말 안타깝더라고요. 어느 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들려 주셨어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로 시작하는 말씀이었죠. 그 말씀을 듣고 깊이 묵상하면서 ‘여러분’이라는 곡을 쓰게 됐습니다.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고 나서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나중에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87년에 신학대학에 진학하고 목회의 길을 가게 됐죠.”

1979년 6월 2일 MBC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주최한 ‘제2회 서울국제가요제’에는 12개국을 대표하는 가수 18명이 출전했다. 한국 대표로 출전한 윤복희는 오빠 윤항기가 작사·작곡한 ‘여러분’으로 대상을 받았다. 수상 직후 윤항기는 “윤복희가 외로울 때면 위로해 줄 사람은 누구? 바로 여러분!”이라고 인사했고, 윤복희는 눈물이 범벅된 채 앵콜송을 불렀다.

80년 가까운 인생을 되돌아볼 때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일까요?

“앞서 말했듯이 저는 여러 가지 직업을 경험해 봤어요. 싱어송라이터로, 목회자로, 교육자로 살아왔어요. 그중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음악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저는 신학도 음악으로 공부한 한국 최초의 음악 목사이고, 목회 활동 역시 음악으로 했어요. 음악을 떠나서는 윤항기 인생을 말할 수 없어요.”

아쉽거나 후회스러운 기억도 있나요?

“왜 없었겠어요? 우리가 젊었을 때만 해도 음악을 하는 게 너무 힘든 일이었어요. 돈을 모으는 건 고사하고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것조차 힘들었지요. 가수가 아닌 보통 젊은이들도 너무 가난한 게, 너무 힘든 게 싫어 조국을 떠나 해외로 많이들 나갔지요. 사실 저한테도 1960년대에 해외로 나갈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해외로 나가서 음악 공부를 하고, 거기에서 활동했다면 좀 더 큰 가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아요. 하지만 목회나 신학교는 제가 한 게 아니니까, 부름을 받아서 한 일이니까 아쉬움 같은 건 없어요. 그렇지만 음악은 제가 원해서 스스로 한 거니까 아쉬움이 좀 남지요.”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아내와의 사이에 1남4녀가 있어요. 다들 출가했지요. (그룹 ‘큐브’의 멤버인) 아들 주노(윤준호)는 한국예술사관실용전문학교 전임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을까요?

“사실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저는 젊었을 때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 건강을 많이 상한 사람이잖아요? 특히 폐결핵 말기까지 앓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만큼 폐 기능이 약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감기에 걸리기 쉽고 피곤해지기도 쉬워요. 그래서 비타민 섭취 잘하고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틈나면 집사람과 함께 집 근처 공원을 부지런히 걸어요. 한 바퀴 돌고 나면 금세 1만 보가 넘지요. 과격한 운동은 멀리 하지만 걷는 운동만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틈만 나면 걷는 게 체력의 비결인 것 같아요. 예음음악신학교 근처 남산한옥마을도 자주 걷곤 하지요.”

욕심 버리고 긍정적으로 살아야


▎데뷔 60주년 기념 공연 연습에 한창인 윤항기.
자기관리가 철저하시군요.

“저처럼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 이제는 쉬어야 할 때가 아니냐는 말을 자주 듣게 돼요. 실제로 제 주변에 있는 선후배들이나 동료들도 대부분 쉬고 있어요. 그런데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정신력과 체력을 갖고 있음에도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다 보니 일을 못 하는 분들도 많아요. 우리 부모님 세대와 비교해 보면 과거 50대 중·후반의 체력이 요즘의 70대와 비슷한 수준일 겁니다. 그렇게 봤을 때 저는 너무 감사할 수밖에 없죠. 이 나이에 은퇴하고도 다시 가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일입니다. 어떤 목표나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일하는 것이 건강 비결이자 자기 관리 아닌가 싶어요. 정신이 건강해지니까 자연히 육체적인 건강도 따라오는 것 같더라고요”

목소리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솔직히 그건 타고난 것 같아요. 심지어 지금 목소리가 예전보다 더 힘이 있고, 예전에 불렀던 노래보다 지금 부르는 노래가 더 듣기 좋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어요.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노래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지요.”

백세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긍정적인 마인드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병은 마음에서 옵니다. 더 많은 것, 더 높은 곳을 바라보다 보면 결국 노예가 되고 병이 생깁니다. 욕심을 너무 부리다 보면 탈이 난다는 거죠. 성경에도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이 나와요. 백세 시대에는 긍정적인 마인드 그리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조나 좌우명이 있으신지.

“사랑입니다. 강의하든 설교하든 저는 늘 사랑을 강조합니다. 다른 이에게 사랑받기를 원할 게 아니라 다른 이를 사랑하라고 강조합니다. 사랑 안에서는 시기도 질투도 원망도 녹아들게 돼요. 윤항기의 철학·신조·좌우명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이에요. 내년에 발표할 60주년 기념 음반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음반의 테마 역시 사랑입니다.”

동생의 근황도 궁금합니다.

“우리 윤 여사가 1945년생이니까 한국 나이로 올해 75세잖아요? 그런데도 정말 대단합니다. 아직도 소녀예요. 지금도 미니스커트 입고 씩씩하게 다니고, 뮤지컬 공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요. 그래도 동생과는 자주 만나는 편이에요. 우리 남매가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살거든요. 우리 집은 분당 중앙공원 쪽, 동생 집은 율동공원 쪽입니다.”

비슷한 연배의 팬들에게 인사 말씀을 전한다면.

“올해가 데뷔 60년인데 이렇게 귀한 지면을 통해 인터뷰할 수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팬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흔한 말이지만 세상을 다 줘도 건강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나이 들수록 건강을 잘 챙겨야 합니다. 내 몸에 좋은 것은 잘 먹되 끊을 건 끊으라는 말씀을 나이 드신 팬들에게 전하고 싶네요.”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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