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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스테이지 인터뷰] 국립창극단의 ‘작은 거인’ 소리꾼 민은경 

“명창 반열? 난 아직 소리판 꼬꼬마” 

[불후의 명곡]서 가요 열창, 국악·대중음악 ‘융합 스타’로 떠올라
8월 30일~9월 8일 국립극장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에 출연


▎국립창극단의 ‘작은 거인’ 민은경. 최근 KBS [불후의 명곡]에서 열창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7월 20일에 방송된 KBS [불후의 명곡] 객석은 인순이의 ‘아버지’를 열창한 두 남녀로 인해 눈물바다를 이뤘다. 국립창극단의 선후배 민은경과 유태평양이 특유의 쩌렁쩌렁한 발성과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창법으로 ‘소리꾼의 힘’을 과시한 것이다. 창극과 대중음악을 결합한 ‘이제껏 보지 못한 신선한 무대’라는 평을 받으며 오랜만에 국악인 사이에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소리꾼의 힘이라면 ‘말의 힘’이랄까요. 판소리 자체가 종합예술이고 모노드라마잖아요. 다양한 감정을 디테일하게 표현하는 말의 전달력이 커서 그런 것 같아요. 태평양의 경우도 본인 목소리 컨트롤을 너무 잘하죠. 역할과 곡에 따라 자유자재로 목소리를 갖고 노는 친구예요. 후배들과 자주 만나고 친한 편인데, 하나같이 인물 치레가 잘된 친구들이죠. 판소리에서 인성이 가장 중요한데, 그런 게 소리에 배어 나오는 것 같아요.”

대중에겐 낯선 얼굴이지만, 민은경은 국립창극단의 간판 스타다. 아담한 체구와 앳된 외모 탓에 [서편제]의 어린 송화, [심청가]의 어린 심청 등 아역을 도맡고 있지만, 속이 꽉찬 단단한 소리로 국립창극단의 ‘작은 거인’으로 통한다. 2년 전엔 완창 판소리 무대에 서며 ‘명창’ 반열에도 올랐지만, 정작 본인은 “난 아직 꼬꼬마”라며 손사래를 친다.

8월 초 만난 민은경은 춘향가 완창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2주 동안 ‘산공부’에 들어갔다가 이틀 전에 나왔단다. “지금 제 춘향가는 고등학교 때 이수한 소리거든요. 판소리 한바탕 떼는 데 3~4년을 들이지만, 그래도 덜 닦여진 부분이 있어요. 이수한 소리라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데 다시 2년쯤 걸리죠.”

민은경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이지만 심청가와 더 인연이 깊다. 2017년 완창 때도 강산제 심청가를 불렀고, 창극단 최근 공연에서도 [심청가]의 어린 심청 역이었다. “어려 보이는 이미지 때문인지 심청 역할을 정말 많이 했어요. 예전에는 왜 나를 어리게만 볼까, 속상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이제 장점으로 인식합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심청하면 민은경이지’라는 타이틀을 얻었으니까요.”

2013년 입단했지만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훨씬 길다. 2006년 창극 [십오세나 십육세 처녀] 오디션에 붙어 심청역으로 신고식을 치렀고, 이후 두 차례 인턴 단원을 거쳐 7년 만에 정단원이 된 것이다. 국립창극단이 10년 만에 뽑은 신입단원이었다. “밖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다 32세에 입단을 했죠. 늦은 감이 있지만 오히려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마냥 어렸다면 단체의 모든 게 낯설고 무섭고 걱정이 많았을 텐데, 인턴 생활로 창극단 생리를 경험하고 들어오니 시야도 넓어져서 소리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난 7년간 국립창극단은 창극 대중화와 현대화를 위해 부단한 실험을 했고, 민은경은 그 현장을 온몸으로 겪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으론 입단 첫 작품인 [서편제](2013)를 꼽는다.

“2010년에 뮤지컬 [서편제]를 먼저 경험하면서 창극으로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어요. 그게 실현이 돼서 기억에 남아요. 뮤지컬은 소리보다 뮤지컬 넘버가 많아서 소리꾼으로서 갈증을 느꼈었거든요. 좋은 경험이긴 했죠. 뮤지컬 관객들이 창극으로 옮겨 온 경우도 있구요. 극 전체가 소리로 진행되지만 양방언 음악감독님의 음악이 잘 맞아떨어져서 일반 관객도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옹녀’ 킬링 포인트는 의녀의 랩 같은 퍼포먼스


▎민은경은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찍고 옹녀]에서 킬링 포인트로 꼽히는 ‘의녀’ 역을 맡았다. / 사진: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은 8월 30일부터 9월 8일까지 인기 레퍼토리 [변강쇠 점찍고 옹녀]를 공연한다. 2014년 연극연출가 고선웅을 초빙해 ‘판소리 열두 바탕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한 [변강쇠 점찍고 옹녀]는 창극단의 다양한 실험 중 가장 성공적인 시도로 꼽힌다. ‘19금 창극’이란 카피를 내세워 초연부터 창극 사상 최초로 장기 공연에 돌입해 대박이 났고, 이후 매년 올리고 있는 재공연에서도 늘 전석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올해 공연에서도 민은경은 의녀 역을 맡았다. 이미 여러 차례 관람한 터라 ‘또?’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민은경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오랜만에 ‘옹녀’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사실 원작의 이야기 자체는 요즘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인데 연출로 아주 잘 풀어낸 작품이에요. 해학적인 전개로 관객의 웃음 포인트를 정확히 살리면서도 옹녀의 삶이 서글프다는 느낌도 주죠. ‘웃긴데 왜 슬프지?’라는 감정 때문에 관객이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한승석 선생님의 작창도 아주 잘 짜였죠, 상황에 맞는 그림의 전개를 잘 생각하고 만들어놓은 작창이에요. 내적 정서에 깊이 빠지지 않으면서 즐겁게 표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인 것 같아요.”


▎‘심청 전문 배우’로 통하는 민은경은 국립창극단의 최근작 [심청가]에서도 어린 심청 역을 맡았다 / 사진:국립극장
개인적으로 ‘의녀’만큼 독특한 코믹 캐릭터 경험도 처음이다. 심청·단종 등 늘 “울거나 맞거나 죽는” 역할을 도맡아 온 입장에서 ‘의녀’는 딱 한 장면 등장하는 작은 비중이지만 귀한 역할이다. “정말 즐겁게 하지만 그만큼 힘도 들어요. 의녀로서 권위 있어 보여야 하니 15센티 굽의 구두를 신죠. 그걸 신고 뛰고 춤추고 해야 하니 나자빠질까 봐 굉장히 조심해야 하구요.”

‘의녀’의 소리는 판소리 수궁가에서 도사가 용왕에게 ‘온갖 약을 다 써봤지만 소용이 없어 토끼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목을 모티브 삼아 작창됐다. 자진모리장단의 빠른 템포로 휘몰아치는 랩에 가까운 퍼포먼스가 과연 ‘옹녀’의 킬링 포인트라 할 만하다.

“딱 한 장면 포인트로 재밌게 보여주고 나가야 되니까 가사가 엉키면 큰일이라 늘 긴장해야 해요. 굉장히 진지하면서 웃겨야 한다는 고선웅 연출님의 요구도 있었구요. 그런데 춤은 웃기게 추라고 하시니, 웃음 참는 것도 고역이에요. 작년에 무대서 한번 제대로 터진 적이 있었는데, 작은 실수가 나와 악사·배우 모두 이를 악물고 참았죠. 그런 모습에 오히려 객석이 빵 터져서 웃으며 마무리되긴 했어요.(웃음)”

옹녀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건 아니다. 소리 면에서나 역할 면에서나 여배우로서 탐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태평양이 변강쇠를 맡게 된 것처럼, 저도 한 번쯤 옹녀를 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연출님이 생각하는 옹녀 이미지가 있겠죠. 다양한 역할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주연 욕심보다 창극단에서 다른 역할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어요.”

그는 몇 해 전 재일 한국인 연출가 정의신이 연출한 창극[코카서스의 백묵원]을 할 때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여주인공 그루셰 역할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그루셰 역이 탐나서 오디션 준비를 정말 열심히 했죠. 작품 연구도 많이 하고, 연극하는 오빠한테 교습도 받았죠. 그런데 연출님에게는 다른 그림이 있었더군요. 연극·뮤지컬로 많이 공연된 작품이라 그 뻔한 이미지를 제가 해볼 만하다 싶었던 건데, 연출님은 그걸 탈피하고 정말 시골처녀 같은 순박함을 요구했던 거죠. 결국 저는 웃긴 할머니 역할을 맡게 됐는데, 그루셰를 바라보면서 공부가 많이 됐어요. 그런 공부들이 이후 제가 폭넓은 역할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구요.”

다양한 음악에 관심…JYP 오디션 1차 붙기도


▎2014년 국립극장 연말연시 레퍼토리로 부활한 마당놀이 첫 작품 [심청이 온다]에서도 열연했다. / 사진:국립극장
[서편제]의 송화만큼은 아니지만, 민은경도 소리 인생에 아버지의 영향이 지대했다. 여든이 넘은 지금도 집에서 혼자 아코디언·기타·신시사이저를 연주할 정도로 음악 매니어인 사업가 아버지가 본인이 못 이룬 꿈을 그에게 투영한 것이다.

“어릴 때 제가 목통이 커서 갖다 버리고 싶을 정도였대요. 너무 크게 울어서 부엌에 가둬 놓았다나요. (웃음) 초등학교 때 동요대회도 나가고 워낙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긴 했어요. 사실 어린 마음에 피아노나 노래를 배우고 싶었는데, 아빠가 판소리를 하라고 딱 정하셨죠.”

초등학교 5학년 때 전남 목포에서 지방문화재 안애란 선생 밑에서 소리를 시작했고, 중학교 때 상경해 성우향 명창의 제자가 됐다. 스타 소리꾼 박애리, 영화 [서편제]의 히로인 오정해 등이 그와 동문수학한 선배들이다. 시작은 반강제였지만, 결국 좋아서 여기까지 왔다는 게 그의 말이다.

“소리꾼들은 늘 합숙 산공부를 가거든요. 초등학교 때 한창 놀 나이에 방학마다 한 달 내내 산에 있었어요. 대학 때까지 반강제로 방학엔 산에 있었던 건데, 모든 다른 관심사를 차단당한 셈이죠. 소심한 시위라면, 산에서 소리 안 하고 계곡물에서 놀기, 슈퍼 나와 과자 사 먹기 정도였죠(웃음).”

오직 판소리만 바라본 건 아니다. 길거리 가요제에도 나가고, JYP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 “영상을 보내 1차 합격을 했는데, 2차 오디션이 공연이랑 겹쳐서 포기하기도 했죠. 가요나 팝도 좋아해서 20대 초반엔 퓨전 활동을 하면서 음반도 냈어요. 선생님들이 걱정도 많이 하셨지만, 그때 다양한 음악의 리듬 꼴을 들었던 게 지금까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은 다시 돌아와 전통 소리 공부를 열심히 하는 시기인데, 너무 재미있어요.”

입단 전 다양한 활동은 완창할 때도 큰 도움이 됐다. 4, 5시간을 혼자 끌어가는 완창에 대해 자기만의 색다른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완창에 대한 고민과 걱정을 몇 년 동안 했어요. 테크닉적으로 잘한다고 좋은 걸까. 나는 좀 다른 완창을 해보고 싶었던 거죠. 완창 책 한 권을 갖고 제가 극을 만들었어요. 기능적인 소리꾼이 아니라 이야기를 소리·아니리·너름 새로 잘 그려내 전달하고 싶었던 거죠. 소리를 어렵게 생각했던 사람도 오히려 완창을 듣고 더 좋아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다양한 경험들이 극적으로나 소리적으로나 도움이 많이 됐어요. 언젠간 다섯 바탕을 모두 완창하는 게 장기적인 목표예요. 지금 춘향가 준비를 하면서 수궁가도 배우고 있구요.”

젊은 팬들에게 전통 창극 매력 보여줄 것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이 장기 목표라는 민은경은 지금 춘향가 완창을 준비 중이다.
민은경은 ‘만성 열심병 환자’다. 대학 입학 후 지금까지 부모님께 경제적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활동해 왔다. 그의 대학 은사인 김성녀 국립창극단 전 예술감독도 “대학 때도 연습실이 없으면 건물 처마 밑에서 연습을 할 정도로 악바리”라며 혀를 내둘렀었다.

“워낙 가만히 못 있는 스타일이긴 해요. 아빠 닮아서 잠도 없는 편이고, 일찍 일어나서 꼭 뭔가를 해야 하죠. 늦둥이라 아빠 연세가 많아서 빨리 독립해 혼자 해내려는 강박도 있었어요. 학생 때부터 공연 기회를 열심히 찾아다녔고, 전공 쪽 아닌 알바도 많이 했죠.”

하지만 ‘열심병’에도 힐링이 필요하다. 요즘은 비교적 내려놓고, “의식적으로 좀 가만있으려고도 한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요새는 필라테스랑 요가 등 운동을 하면서 얻는 게 많아요. 그간 너무 나를 가혹하게 혹사했던 것 같아요. 오랫동안 혼자서 소리와의 싸움을 해왔거든요. 그 결과 상도 많이 받고 지금까지 왔지만, 모든 걸 혼자 하다 보니 과부하가 걸렸죠. 요가까지 너무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요가 선생님이 ‘은경님 너무 열심히 안 하셔도 돼요’라고 하시더군요. ‘몸을 보니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겠다. 하다 보면 언젠간 되니 너무 열심히 할 필요 없다’구요. 일도 그런 것 같아요. 이젠 나를 좀 더 바라보면서 내가 왜 이걸 열심히 하려 하는지 생각하면서 하고 있죠. 내려놓으니 마음이 좀 편해진 상태예요.”

‘열심병’을 극복했다지만 민은경은 여전히 분주하다. 완창을 준비하느라 소리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면서도 외부 활동도 열심이다. [불후의 명곡] 이후 외부 섭외도 부쩍 늘었다.

“안주해선 안 되니까요. 단체와 개인 활동 두 가지를 같이 해야 해요. 20대 때부터 워낙 창작곡 공연을 많이 다녔고, 국악가요도 많이 불렀어요. 지난주에도 김준수·유태평양과 함께 공주에서 열린 제1회 국악재즈페스티벌 무대에 섰죠. 무대는 나에게 가장 즐거운 곳이니까 부담은 없어요. 열심병이 아니라 여유롭게 즐기고 있어요.”

응원해주는 팬들도 많다. ‘국악계 아이돌’ 김준수 등 젊은 소리꾼들이 대중적 활동을 많이 하면서 국악계에도 팬덤의 저변이 확대된 것이다.

“요즘엔 준수 팬이 너무 많죠. 그런데 처음에 준수 팬으로 시작해서 창극단 팬이 된 분들이 많아요. 주로 젊은 세대들인데, 창극단의 모든 공연을 보시고 응원 메시지를 보내고, 제 개인 공연까지 찾아주시죠. 6회 공연을 하면 매번 보러 오시는 팬들도 있어요. 요즘엔 방송에서도 국악인들을 많이 불러주시네요. 남상일·박애리 선배가 길을 잘 다져놔서 젊은 세대들이 스타가 될 수 있었죠. 저도 후배들 활동을 지지해주고 싶어서 같이 모니터하면서 의견도 나누곤 해요. 전통 소리에 대한 아집은 유지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대중화됐으면 하는 바람이죠.”

이번 시즌 국립창극단의 유일한 신작은 국립극장 70주년 기념 공연으로 기획된 [춘향가]다. 국립극장장을 지낸 김명곤 연출로 내년 5월 오랜만에 전통에 충실한 창극을 선보일 예정이다.

“아마도 관객분들이 이번 춘향을 굉장히 기다릴 것 같아요. 다섯 바탕 중 춘향을 오랜만에 선보이게 됐는데, 그간 목마른 매니어들도 많지만 지난 7년간 창극 관객층이 두꺼워지면서 이제는 그들에게 전통 공연을 보여줄 시즌이 왔다 생각해요. 이 관객들이 예전에 전통 공연을 봤다면 어려웠겠지만, 지금껏 다양한 창극을 경험해 봤기에 제대로 된 전통도 느껴볼 만하다 생각해요.”

- 글 유주현 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기자 yjjoo@joongang.co.kr / 사진 지미연 객원기자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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