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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71)] 엄정한 자기관리 빛난 청렴의 본보기, 노촌(老村) 이약동 

말채찍까지 반납한 ‘조선 대표 청백리’ 

백성에 고통 주는 적폐 잇따라 청산, 제주목사 3년 선정 유명
성종 신임 얻어 관직에서 승승장구 하고도 말년에 끼니 걱정


▎노촌의 19대 이병권 종손이 하로서원 강당 앞에 섰다. / 사진:송의호
"상자나 농은 새로 만든 것이 없고, 구슬과 옥, 옷감은 그 지역 산물이 없어야 맑은 선비의 돌아가는 행장이다. 제주목사로 있던 이약동이 돌아갈 때 가죽 채찍 하나만 가졌을 뿐이었는데, ‘이 역시 제주도의 물건이다’ 말하고 관아의 문루(門樓)에 걸어두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그 가죽 채찍을 보물처럼 보관하여, 목사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내걸었다. 세월이 흘러 채찍이 낡아 버리자 고을 사람들이 처음 채찍을 걸었던 곳에 그 사적을 그림으로 그려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정약용의 대표 저술 [목민심서(牧民心書)]의 마지막 부분 ‘해관(解官, 벼슬자리를 내놓는 것) 6조’의 두 번째 내용이다. 여기서 정약용은 앞부분에 존경받는 지방 수령이 되기 위한 자세를, 뒷부분엔 생생한 모범 사례를 들어 생각을 정리한다. “이약동이 바다를 건너올 때 배가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기울고 맴돌아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그가 ‘나의 행장에 떳떳지 못한 물건은 하나도 없는데, 혹시 막객(幕客, 목사 일을 돕는 무관) 중에 누가 나를 속이고 욕되게 해 신명이 나에게 경고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당초 제주 군졸들이 갑옷 한 벌을 싸서 수행하는 사람에게 몰래 맡기고 바다를 건넌 다음 아뢰도록 했다. 이약동은 그 사실을 듣고 갑옷을 물에 던지게 했다. 그제야 파도가 자고 배가 제대로 움직였다. 지금도 그곳을 투갑연(投甲淵)이라 부른다.”

2021년 12월 18일 [목민심서]가 주목한 조선 청백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경북 김천시 양천동 하로서원(賀老書院)이다. 하로마을 자두 과수원을 지나 청백리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 1416~1493) 선생을 배향한 하로서원으로 들어섰다. 서원 동재인 염수료(念脩寮)에 이병권 종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마치자 종손은 먼저 노촌의 새로운 사승(師承) 관계를 조심스레 언급했다. “스승은 알려진 대로 강호 선생(김숙자)입니다. 그동안은 선조(先祖)가 점필재 김종직, 매계 조위와 동문수학한 사이로 보았는데 선조가 강호의 학문을 점필재에게 전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노촌과 점필재의 15년 나이 차로 보나 성균관 교수 자리를 물려받은 것 등으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점필재는 또 노촌을 두고 “문무의 재량에 도덕 또한 갖추었다”고 찬미한 시를 남겼다. 그게 밝혀지면 도학의 계보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배경으로 유림은 1648년(인조 26) 김천시 감천면에 경렴서원(景濂書院)을 세워 노촌을 점필재·매계 등과 함께 배향했다가 대원군 시기 훼철됐다. 노촌은 그만큼 성리학의 기반 위에 도덕을 중시한 사림파의 학자 관료였다.

3판서 6좌랑을 배출한 마을


이 마을을 들어서면서 ‘노촌(老村)’ ‘하로(賀老)’ 등 ‘노(老)자가 들어가는 지역 이름이 궁금했다. 이 마을은 노촌과 또 다른 청백리 최선문 등 3판서 6좌랑을 배출했다고 한다. 그들은 관직에서 은퇴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그때마다 환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로’란 지명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동재인 염수료로 들어갔다. 벽면에 제주도 비석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다. 비의 앞면에 ‘牧使李約東先生/ 漢拏山神壇紀蹟碑(목사이약동선생/ 한라산신단기적비)’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제주목사 시절 노촌의 대표 업적을 기리는 돌이다. 그는 당시나 지금이나 실상 육지보다 제주도에서 더 유명한 인물이다.

이약동은 1416년(태종 16) 김천 하로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중반 대학자 강호 김숙자의 문하에서 배웠고 그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 매계 조위 등과 교유했다. 이들은 성리학의 기반 위에서 도덕의 실천을 중시했다. 이른바 사림파(士林派)의 태동이었고 하나의 새로운 정치세력이 됐다. 이약동은 1442년(세종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산·안동 등지 향교 교수를 지내다가 1451년(문종 1)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그 뒤 사섬시 직장을 거쳐 1454년(단종 2) 사헌부 감찰과 황간현감 등을 지냈다. 1458년(세조 4) 노촌은 유학자이면서 장수인 이른바 유장(儒將)으로 천거돼 사헌부 지평에 오른다. 이듬해 그는 청도군사(淸道郡事)로 나갔으며 1462년 모친상으로 휴직한다.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고 1465년(세조 10) 사헌부 집의를 거쳐 이듬해 종부시 정이 되고, 당상관으로 승진해 구성부사로 나갔다가 2년 뒤 병으로 사직한다.

여기까지 노촌의 관력(官歷)에서 주목할 부분은 43세에 유장으로 뽑힌 것이다. 그는 유학자 출신이면서 무예에도 능해 무관직도 여러 차례 지낸다. 가문의 무관 전통을 이어받아 문무를 겸비한 노촌은 임금의 심복 역할을 하는 선전관 등을 지내면서 훗날 국방과 군사 정책에도 관여한다.

노촌이 제주목사로 부임한 것은 1470년(성종 1) 8월. 그는 1472년(성종 3)까지 3년간 제주에 머물면서 목민관으로서 꽃을 피운다. 제주목사는 제주목의 행정뿐만 아니라 제주병마수군절제사로 제주읍·정의현·대정현 등 3읍을 아우르는 육군과 수군의 지휘관을 겸했다.

공납 줄여 아전의 부정을 원천 봉쇄


▎노촌의 위패가 모셔진 하로서원의 사당인 청백사. / 사진:송의호
노촌은 제주에서 먼저 도민의 과중한 공물 수량을 더는 일에 착수한다. 그는 백성에게 부당하게 내려지는 폐단을 논하고 세금을 줄여줄 것을 간곡히 청한다. 성종은 기꺼이 수락한다. [성종실록] 1472년 2월 조에 그 하서(下書)가 나온다. “공진(供進)하는 모든 물건을 민간에 강요하니, 그 폐단이 적지 않다. 이제부터 회실(灰實)이 없는 패자(貝子, 조개)는 올리지 말고, 노루 모피는 50장(張)으로 정했으나 이제 40을 감하고 단지 10장만 올리고, 진주(眞珠)·앵무배(鸚鵡杯) 같은 것은 얻는 대로 올리는 게 옳다.”

사냥을 나갈 때의 폐단도 시정한다. 당시 제주 3읍 수령은 군사훈련을 겸해 자주 사냥을 나가면서 야영하는 경우 그때마다 백성을 동원해 임시 거처할 집을 짓게 했다. 사냥은 군사훈련이어서 노촌은 이를 폐지할 수는 없었으나 도민의 고통을 줄이도록 임금에게 건의한다. 이에 성종이 지시한다. “임금의 거가(車駕)가 가는 곳도 장막을 설치할 뿐인데 신하들이 이럴 수 있나? 앞으로는 이같이 하지 말라.”

제주목사 노촌은 다시 한라산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는 한라산 산신제를 지내는 산천단을 옮긴다. 적폐 청산의 결정판이었다. 이 업적은 [탐라지(耽羅誌)] 등에 전한다. 산천단은 고려시대 처음 조성돼 조선 초까지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봄과 가을 제사 때는 많은 관리와 군인이 동원돼 제물을 지고 며칠씩 산을 오르고 야영을 해야 했다. 봄과 가을 한라산에는 눈과 비가 자주 내리고 일기가 나쁠 때가 많아 야영하는 군사와 도민의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심지어 동사자도 발생했다. 노촌은 이러한 폐단을 조정에 보고한 뒤 산천단을 한라산 중턱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했다. 제주시 아라동 곰솔(소나무)공원이다. 그 뒤 산신제로 고통을 겪는 폐단은 사라졌다. 그 업적이 김천 하로서원 벽면에 사진으로 걸린 것이다. 그와 함께 관리·아전의 횡포와 부정도 단속했다. 이영춘 한중역사문화연구소장은 “제주목사 노촌의 이러한 위민 행정은 제주 도민들에게 큰 혜택이었지만 그 역시 이 일로 임금과 조정의 주목을 받아 승승장구하는 전환점이 됐다”고 평가한다.

1472년 노촌은 제주목사로서 3년 직임을 마치고 제주도를 떠난다. 그는 재임 중 착용하던 의복이나 사용하던 기물을 모두 관아에 반납한다. 그리고 육지로 떠나는 나루터로 향했다. 그가 한참 말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손에 든 말채찍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것도 관아의 물건인데…. 그는 다시 관아로 돌아가 성루(관덕정)에 말채찍을 걸어 놓았다. 정약용이 [목민심서]에 기록한 그 이야기다. 노촌의 후임자들은 이를 미담으로 받아들여 채찍을 치우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두었다. 세월이 지나 그 채찍이 썩어 없어지자 도민들은 바위에 그 채찍을 그려 놓았는데 이후 그 바위는 괘편암(掛鞭岩)으로 불렸다. 청렴한 자기관리 이야기는 다시 이어진다.

섬사람들, 살아있는 노촌의 사당 영혜사 지어


▎김천시 구성면 양각리에 있는 이약동의 묘소(비석 오른쪽). / 사진:송의호
노촌은 이제 육지로 떠나는 배를 탔다. 배를 타고 돌아오는 중에 갑자기 광풍이 불고 파도가 일어 파선 위기에 처한다. 그러자 노촌이 일어나 말한다. “나는 제주도에 와서 사리사욕을 취한 게 없다. 우리 막료 중 누구라도 섬 물건을 챙긴 자가 있으면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은 뒤에도 섬사람들이 우리를 탐관오리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한 군졸이 이실직고한다. “행차가 막 떠나려는데 섬사람 하나가 갑옷 한 벌을 바치면서 바다를 건넌 뒤 사또께 전해 달라고 해 숨겨 왔습니다.” 이약동은 “그 정성은 알았으니 그 갑옷을 바다에 던지라”고 지시했다. 갑옷이 바다에 던져지자 파도가 잠잠해졌다. 갑옷이 던져진 곳은 투갑연(投甲淵)으로 불렸다. 섬사람들은 이후 제주에 살아 있는 노촌의 사당인 영혜사(永惠祠)를 짓고 춘추로 기렸다고 한다.

노촌은 1474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사간원 대사간에 오른다. 그는 제주목사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임금에게 간한다. “제주 사람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자가 많으나, 스승이 없습니다. 신이 목사 시절 여가에 경서(經書)를 가르쳤습니다. 지금 세 고을 수령을 문무로 교차하여 보내 다스리고 가르친다면, 인재가 나올 것입니다.” 성종이 이를 기꺼이 수용했다. 서거정은 대간으로 충간(忠諫)하는 노촌을 지켜본 뒤 “태평성대에 당당히 언로가 열리니/ 간관(諫官)의 자리에 다시 어진 이를 얻었네”라고 칭송했다. 이후 노촌은 성종의 신임을 얻어 중국 사신 천추사, 경주부윤, 호조참판,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낸다. 1487년(성종 18) 이약동은 이조참판에 올라 3년간 재임하는데 이 기간 청백리로 녹선(錄選)됐다.

그는 이후 개성유수까지 승승장구한다. 대기만성이다. 1491년(성종 22) 76세 노촌은 지중추부사로 관직을 마감한다. 그는 하로마을로 낙향했다. 그러나 집은 비바람을 겨우 막을 만했고 생활은 아침저녁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

종손의 안내로 하로서원 강당인 노촌당을 돌아본 뒤 사당 ‘청백사(淸白祠)’에 참배했다. 사당에는 노촌의 위패와 함께 그가 후손에게 남긴 시 한 편이 걸려 있다.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줄 것은 없고/ 있는 것은 오직 낡은 표주박과 질그릇뿐/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 자손들에게 청백을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

청백사를 나오며 종손이 덧붙였다. “이곳 사당엔 줄잡아 연간 4000명이 참배합니다. 김천혁신도시에 들어온 공공기관 임직원, 경상북도 감사관 모임, 경찰서·세무서 직원 등과 제주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게다가 청백리 백일장이 열리는 등 서원은 청렴을 교육하는 현장이 되고 있다. 종택은 따로 없었다. 이어 후손의 안내로 서원에서 7㎞쯤 떨어진 구성면 양각리 묘소를 찾아갔다. 1㎞가 넘는 묘소 진입로는 자동차 1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아 운행이 아슬아슬했다. 사방은 자두 과수원이다. 마침내 노촌의 신도비(神道碑)가 나타났다. 묘소는 경사 45도가 넘는 가파른 산 중턱에 있었다. 분묘는 화려하지도 조촐하지도 않았다. 오르기가 힘들지만 이곳 역시 제주 사람들이 수십 명씩 들르는 답사지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노촌은 50년 관료 생활 중 탄핵이나 견책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딱 한 번 사헌부의 비판을 받았었다. [성종실록]은 노촌의 졸기(卒記)를 실으면서 마지막에 사관의 논평을 붙이고 있다. “(이약동은) 이조참판이 되어서는 마침 판서가 오랫동안 외방에 있게 되자 혼자 정병(政柄, 인사)을 맡아 관리를 추천할 때 청탁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무슨 말인가? 노촌이 참판으로 있을 때 판서와 참의가 여러 달 평안도로 출장 간 사이 그가 인사 행정을 맡아 몇몇 관리를 승진시킨 일이 있었다. 사헌부가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이에 대해 성종은 “그러면 외방에 있는 사람을 다시 불러오란 말이냐”며 노촌을 두둔했다. 물론 졸기의 평가가 실상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최남선이 선정한 조선 최고의 청백리


▎제주시 아라동 곰솔공원에 세워진 제주목사 이약동 사적비. / 사진:김천문화원
근세에 들어 육당 최남선은 새로운 방식으로 노촌을 재평가했다. 육당은 1914년 창간된 잡지 [청춘]에 ‘조선 500년 대표 인물 100인’을 분야별로 선정했다. 여기엔 ‘덕목-이황’을 시작으로 ‘절개-성삼문, 용맹-남이, 지혜-김시습’ 등에 이어 ‘청렴-이약동’이 소개된다. 노촌을 조선 최고의 청백리로 뽑은 것이다.

공직자의 청렴은 시대와 무관한 의무이다. 국민의 심부름꾼 공복(公僕)이 특정인에 불공정하게 특혜를 주거나 불법이나 비위를 묵인하는 것은 무거운 배임에 해당한다. 500년 전 제주에서 말채찍 하나까지 엄정하게 자기를 관리했던 청백리를 떠올린 까닭이다.

[박스기사] 조선, 청렴한 관리 선발 ‘청백리 제도’ 운영 - 황희·맹사성 등 당대의 고관들 이름 올려

조선은 청렴한 관리를 선발하는 청백리(淸白吏) 제도를 운영했다. ‘청백’은 ‘청렴결백(淸廉潔白)’을 줄인 말이다. 청백리 또는 염근리(廉謹吏)로 뽑히면 당사자는 승진이나 보직에 우대를 받고, 죽은 뒤에는 자손이 벼슬을 받았다. 또 청백리는 관료로서 큰 명예였으며 가문을 빛내는 일이었다. 반면 부정부패한 탐관오리로 지목되면 탄핵을 받아 본인의 관직 생활이 막히는 것은 물론 그 자손은 과거시험도 볼 수 없었다. 그만큼 조선은 청백리와 탐관오리를 엄격히 관리했다.

조선은 태조 시기 안성 등 5인을 청백리로 뽑은 이래 태종 시기 8인, 세종 시기 15인, 세조 시기 8인, 성종 시기 20인 등 모두 217명을 청백리나 염근리로 선발한 기록이 있다.

조선 전기에는 대체로 현직 관리 중 청백리를 선발했는데, 예조에서 후보자를 뽑아 올리면 의정부의 대신이 심의해 임금에게 보고했다. 때로는 서울의 2품 이상 재상급 고관과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등이 후보자를 추천했다. 조선 후기에는 주로 비변사가 이 일을 맡았는데 생전에 염근리로 뽑혔거나 사망한 인물 중 청렴으로 칭송받은 관료를 청백리로 선정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는 세종 시기 황희·맹사성, 성종 시기 허종, 선조 시기 이원익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청백리에 선발됐지만 논란이 된 인물도 없지 않다. 반면 태조 시기 심덕부처럼 청백리로 선발되지는 않았으나 당대에 칭송을 받은 청렴한 인물도 있었다. 이들도 청백리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요건에는 청렴뿐만 아니라 능력이나 업적도 중요한 평가 기준이었다. 그래서 나라에 상당한 공적이 남을 만큼 직무를 수행하는 능력이 돋보이고 동료들로부터 칭송받을 정도가 돼야 청백리로 뽑혔다. 청백리나 염근리로 선발된 사람들이 당대에 고관을 지낸 이들이 많은 이유이다.

조선시대 관리 중 특히 지방관은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개별 품성에 따라 백성들에게 주는 혜택이나 고통은 그 정도가 크게 달랐다. 때문에 지방관에 대한 청렴도는 더욱 강조됐으며, 그 주된 과제는 백성에 대한 직접적인 수탈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02호 (202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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