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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사회 초년생 50여 명 울린 서울 강북 전세사기 사건 전말 

일가족 사기단, ‘빚더미 빌라’로 보증금 챙기고 일제히 파산… 2차 사기 범죄까지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빌라 5채 보유한 일가족, 변제능력 과장… 파산 전까지 세입자 받아
중개업자는 잠적… 집주인 사정 알고서도 ‘브로커’ 역할 했을 가능성


▎서울의 선모(77) 씨 일가는 ‘빚더미 빌라’로 임대사업을 벌여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뒤 재계약 날짜가 다가오자 일시에 파산해버렸다. 사진은 선씨 일가가 보유했던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빌라. / 사진:제보자
전세사기 수법이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다. 서울의 한 일가족이 ‘빚더미 빌라’로 임대사업을 벌여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뒤 재계약 날짜가 다가오자 일시에 파산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50여 명, 피해액수는 100억원대로 추정된다. 월간중앙 취재에 따르면 이들은 임대차 계약 과정에서 건물의 실제 가치보다 시세를 높게 설명하고, 선순위 임대보증금 액수 등 자금 사정을 속이는 수법으로 세입자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파산 직전까지도 세입자와 계약했다고 한다. 피해자들의 계약을 유도한 중개업자도 이들 일가족과 사전에 공모한 ‘브로커’로 의심된다. 중개업자는 피해자들에게 임대인의 변제 능력을 과장하거나 전세보증보험(HUG)에 대한 허위 정보를 제공했고, 일가족이 파산하자 폐업하고 잠적한 것으로 확인됐다.

전세사기범 일가족이 보유했던 빌라는 총 5채다. 서울 은평구 수색동·응암동·역촌동, 도봉구 방학동·쌍문동 등지에 포진해 있었다. 모두 경매로 넘어갈 수순에 처했으며, 통상 감정가의 60~70% 수준에 값이 책정되는 점을 고려하면 세입자들이 온전히 보증금을 되찾을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여기에 빌라에는 수억원대의 근저당까지 설정된 상태다. 계약 관련자들이 ‘깡통빌라’로 전세사기를 벌인 뒤 고의로 파산한 것으로 의심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집주인 일가의 파산 피해자 박모(30) 씨가 어렵게 운을 뗐다. 2021년 11월 박씨 부부는 신혼집을 알아보던 중 강북구 수유동의 한 부동산에서 도봉구 방학동의 빌라를 추천받았다. 당시 아파트를 알아봤으나 집값 폭등으로 도저히 전세 매물이 안 나오던 터였다. 당시 중개업자는 “여기서 거리가 좀 있지만 워낙 좋은 매물이라 소개드린다”면서 박씨 부부를 차에 태우고 방학동으로 향했다. 20년 된 구축 빌라가 즐비한 동네에 유일한 신축 빌라에다 내부 인테리어도 깨끗해 마음에 든 박씨 부부에게 중개업자는 이렇게 말했다. “9억원의 근저당이 잡혀 있는데 집주인이 3억원은 변제했다. 워낙 돈이 많은 집안이다. 걱정하지 마시라.” HUG 미가입 빌라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당시만 해도 전세사기 사태가 공론화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며칠 뒤 부동산에 계약하러 갔을 때 임대인이 벤츠사의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를 몰고 온 것을 보고 ‘자산가’일 것이라 단정 지은 게 화근이었다.

해당 빌라의 원룸을 전세 계약한 또 다른 세입자도 임대인이 몰고 온 외제차에 “괜찮겠다 싶었다”고 계약하던 때를 회상했다. 중개업자는 선순위 임대보증금 액수가 6억원이라면서, 설령 빌라가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보증금을 받을 수 있다며 이 세입자를 속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6억원이 아니라 9억원이었다. 중개업자는 다른 세입자인 김모(30) 씨와의 계약에선 ‘임대인이 고지하지 않음’이라며 선순위 임대보증금이 얼마인지 아예 알리지도 않았다.

전세대출 피해자, 사회초년생들이 다수


▎서울 도봉구 방학동 일대 주택가. 주변에는 구축 빌라가 대다수다. / 사진:안덕관 기자
오모(35) 씨는 중개인의 좀 더 과감한 거짓말에 넘어간 사례다. 가게를 오픈한 오씨는 급하게 월세를 구하던 시기에 해당 중개업자에게 전세를 적극 권유받았다. 하지만 전세는 월세보다 보증금 액수가 큰 데다 해당 빌라가 HUG 미가입 주택이란 점에 발길을 돌리려 했지만, 중개업자는 “잘 아는 은행원을 연결해 주겠다. 그쪽에서 대출부터 보증보험까지 책임질 것”이라고 권유했다. 실제로 은행원은 오씨에게 은행 자체에 보증보험이 있으니 HUG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대출을 끼고 계약한 뒤 은행 서류를 다시 확인했을 때 보증보험료 액수가 2만원에 불과한 것이 이상했다. 은행에 문의하자 해당 은행원은 다른 지점으로 전출 간 직후였다. 다른 은행원한테서는 “보증보험료 명목으로 빠져나간 금액은 대출에 대한 보증보험료이고 주택에 대한 보증보험이 아니다”라는 황당한 설명을 들었다.

집주인 일가가 파산하고 나서 중개업자는 부동산을 폐업하고 잠적했다. 취재 결과 현재는 새로운 대표가 기존의 영업장을 대신하고 있었다. 새 대표는 “세입자들로부터 수차례 문의를 받아 내용은 알고 있다. 하지만 계약을 진행한 중개업자가 누군지는 전혀 모른다”고 했다.

세입자들은 지난 8월 초에야 집주인의 파산 신청을 알게 됐다고 한다. 대부분 재계약을 마친 직후였다. “퇴근하고 집에 와보니 법원에서 편지가 와 있었다. 안 그래도 전세사기 사건이 몇 달간 휘몰아친 터라 불안했는데 집주인이 파산했다는 법원 통보를 받고 눈앞이 노래졌다.” 오씨의 회고다.

임대인은 올해 초 재계약을 거부하는 세입자들에게 “현재로썬 보증금을 돌려줄 돈이 없다. 다음 세입자를 구할 때까지 대출 이자를 갚아주겠다”고 제안했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처지에 대부분 울며 겨자 먹기로 구두 계약을 이어갔다. 하지만 2개월 정도가 지나자 대출 이자 지원은 끊겼다. 그리고 파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인근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김씨는 집주인의 파산 사실을 모른 채 재계약을 맺었다. “나중에 집주인에게 전화해 따지니 ‘내가 왜 그런 것까지 알려줘야 하느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저더러 ‘너는 젊으니까 괜찮다. 회생하면 된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내가 알려주겠다’고 했다. 너무 뻔뻔하다.” 김씨의 말이다.

세입자 받은 뒤 집주인 일가 다 파산 신청


▎세입자 김모(30) 씨에게 선모(77) 씨 일가가 보낸 문자. 일가 측은 파산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김씨와 재계약을 이어간 뒤 뒤늦게 파산 사실이 들통나자, “너는 젊으니까 회생하면 된다”고 김씨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 사진:제보자
피해를 당한 빌라 세입자 50여 명은 이들을 경찰에 고소한 상태다. 방학동 거주자 10여 명은 서울 도봉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했고, 응암동 건물 세입자 10여 명도 서울서부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수색·역촌동 거주자 20여 명과 쌍문동 세입자 5명 또한 고소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 일가족은 선모(77) 씨와 50대 큰딸 부부, 50대 작은딸 부부 등 5명이다. 이들 가운데 작은딸 김모 씨가 8월 7일 파산 신청을 했고, 8월 16일 김씨의 남편, 큰딸 부부, 선씨 등 일가족이 모두 파산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이들은 법원에 “대출이자 등 금융 비용 부담, 사업 실패, 주식 등 투자 실패”라고 파산 경위를 설명했다. 구체적으로는 “부동산 신축 판매 및 임대 사업을 운영했으나 정부의 전세보증보험 가입 기준 강화로 기존 세입자들의 임대보증금을 반환해주지 못해 채무가 증대됐다”고 했다. 하지만 HUG 가입 여부와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보증금을 돌려줘야 하는 입장에서 파산 원인을 정부의 정책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일가족 측에 문의하자, “왜 그렇게 쓰여 있는지 모른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이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고금리와 부동산 경기 악화로 보증금 지급이 어려워진 만큼 전세사기는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기자에게 “방학동 빌라의 경우 최근 감정사에게 의뢰한 결과 24억원으로 추산되니 세입자들은 경매 낙찰금으로 보증금을 회수하면 된다”고 답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사정을 고려하면 이들의 주장은 비현실적인 얘기다. 방학동 빌라의 채권최고액은 6억8000여 만원이다. 이 가운데 12명의 세입자에게 최우선변제금 3700만원이 나가면 최소 11억여원이 빠져나간다. 세입자들의 보증금이 안정적으로 마련되려면 경매에서 최소 20억원에 낙찰돼야 하는 실정이다. 게다가 분쟁에 휘말린 건물은 기피 대상이다. 한 번에 낙찰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안 나가고 버티는 세입자도 있어 통상적으로 유찰이 거듭되며 집값은 우후죽순으로 떨어진다. 일가 측의 주장과 달리 “계약 당시 빌라 시세가 16억원 정도라고 했다”는 세입자들의 주장을 고려하면 경매 시작 가격은 10억원대일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이 때문에 세입자들은 경매 절차를 최대한 지연시키고 있다. 현재는 도봉구 쌍문동 빌라만 경매가 진행 중이다.

법원·경찰, 일가족 은닉 자산 추적 나서


▎2차 사기 범죄도 벌어졌다. 손모(23) 씨는 선모(77) 씨 일가의 은닉 자산 18억원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서 세입자들에게 접근했다. 손씨는 자신이 일하는 캐피털의 로펌을 통하면 보증금을 회수해주겠다고 했지만, 그가 세입자들에게 제시한 캐피털 명함과 로펌의 문서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로펌은 손씨를 사문서위조와 위조사문서행사 등 혐의로 고소했다. / 사진:제보자
신혼부부인 박씨 부부의 경우 최우선변제금조차 건질 수 없는 상황이다. 보증금이 2억5000만원으로 소액 임차인이 아닌 까닭이다. 박씨의 남편은 “서울시의 대출 심사팀이 통과시킬 정도면 계약 당시만 해도 문제가 없었던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최근 인근 부동산 업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본인들은 사고 위험성이 커서 손님들에게 소개를 안 해줬다고 한다. 작정하고 파산한 느낌이 강했다고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취재에 따르면 선씨 일가는 지난 10월 파산 결정을 받았다. 하지만 세입자들의 이의 제기로 파산에 따른 면책은 받지 못한 상황이다. 세입자들은 지난 11월 채권자 집회에서 “선씨 일가가 파산 신청을 하기 1년 전부터 채무 초과 상태인 데다 세입자의 보증금을 반환해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증금 상당 부분을 빼돌린 뒤 파산 신청을 한 게 분명하다”고 입을 모았다.

세입자들을 대리하는 천호성(38·법률사무소 디스커버리) 변호사는 선씨 일가의 사기 혐의가 인정되면 파산 면책을 받기 어려울 것으로 관측했다. “한날한시에 일가가 파산 신청을 한 정황이 이상하다. 애당초 보증금을 빼돌리고 날릴 생각으로 임대사업을 벌였을 공산이 커 보인다”면서 “이들의 사기혐의가 드러나면 보증금은 비면책 채권에 해당하므로 임차인들로서는 면책 여부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법원 측의 파산관재인은 선씨 일가가 은닉한 재산이 있는지 조사 중이다. 경찰도 “선씨 일가에 대한 부동산 자금 흐름을 추적 중”이라고 했다. 2차 채권자 집회는 2024년 1월 9일 열릴 예정이다.

한편 이 사건에선 세입자들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악용한 2차 사기 범죄도 벌어졌다. 손모(23) 씨는 세입자들에게 접근해 “선씨 일가의 5촌이 일가의 은닉 자산 18억원을 제가 일하는 캐피털에서 보관하고 있다. 우리 회사를 대리하는 로펌에 사건을 맡겨 보증금을 회수해주겠다”고 설득했다. 당시 손씨가 캐피털사의 명함과 로펌의 로고가 있는 서류를 제시한 만큼 세입자들은 손씨만 믿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손씨가 캐피털이나 로펌과의 소통을 일절 금지하는 각서를 쓰게 하고 사건 해결을 계속 미루는 것에 의심을 품은 세입자들이 확인한 결과 손씨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결국 세입자들로부터 사안을 파악한 로펌이 손씨를 사문서위조와 위조사문서행사 등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면서 진상이 드러났다. 손씨는 대신 수고비 명목으로 세입자 1인당 60만~200만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한 세입자는 “알고 보니 손씨는 캐피털사의 전단지 알바였다. 한순간 희망이 보였다고 여기고 매달렸는데 모두 우스워졌다”고 씁쓸해했다.

-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ahn.deokkwan@joongang.co.kr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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