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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 (44) 일본 대마도 '유명산'에 올라 

 

이만하면 수지맞는 장사가 아닌가!

오욕의 역사와 아픔에 울부짖는 듯 대마도(對馬島.쓰시마)로 가는 쾌속선이 심한 파도에 흔들렸다. 밤 11시 50분에 서울 강남 신사역을 출발한 버스는 다음날 새벽 5시 부산의 어느 바닷가 산기슭에 멈춰 섰다. 달맞이언덕과 청사포, 다릿돌전망대, 송정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5㎞의 달맞이길을 산책한 후 7시 40분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오전 9시 10분에 부산항을 출발한 여객선은 대한해협을 건너 오전 10시 40분 드디어 대마도 히타카츠항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최단거리 49㎞. 일본 후쿠오카까지는 145㎞다. 우리가 훨씬 대마도에 가까운데 왜 일본 땅이 되었을까? 대마도주(對馬島主) 양아들과 결혼했던 덕혜옹주의 슬픈 역사는 대마도에 어떤 자취를 남겨두고 있을까? 일본이 세계무대에 확실한 강자로 이름을 떨치게 된 러일전쟁의 가장 큰 승부수였다는 대마도 해상전투에서 일본이 발틱함대에 승리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와 관련된 역사가 많아서인지 대마도와 관련해 궁금했던 것들도 많았다. 그 현장들을 직접 찾아가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렜다.


항구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처음 눈에 들어온 대마도는 울창하고 아름다운 산림의 나라였다. 대마도는 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해 있다. 섬 면적은 총 695.74㎢.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거제도의 1.8배 정도다. 원래 하나의 큰 섬이었으나 1672년 에도시대 때 오후나코시 운하, 1900년 메이지시대 때 만제키 운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면서 3개의 큰 섬으로 분리됐다고 한다. 섬의 대부분이 고도 400m가 넘는 산지라서 마을은 해안 지대를 둘러가며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다. 개발을 한다거나 농지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토지가 많지 않아 부산광역시와 비슷한 크기에도 인구는 2만8000명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석유나 가스 같은 자원이 펑펑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일본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그저 그런 촌동네다. 현재는 관광업이 번성해 주로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고, 일본 본토, 중국 등에서도 관광하러 온다고 한다.

실제 만나본 대마도는 첩첩산중 산골이면서 한적한 어촌마을이었다. 신기한 것은, 산 대부분이 정상이 뾰족하지 않고 어머니 가슴처럼 포근하고 둥근 모양이라는 점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돌보아 키운 듯, 모든 산의 나무들이 크고 울창했다. 알고 보니 대마도에 있는 나무들의 12%는 자연조림, 88%가 인공조림이란다. 삼나무, 편백나무들이 울창한 산림에다 청정 바다와 깨끗한 공기를 접하니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듯 했다.


우리는 히타카츠 항에서 가까운 러·일 우호의 언덕부터 찾았다. 러일전쟁(1904년~1905년)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곳이라고 했다. 미국과 영국이 수에즈운하를 봉쇄하자 세계 최강 발틱함대는 무려 6개월여 동안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대마도를 지나다 기습을 당하고 만다. 일본이 대마도 허리 부분을 잘라 운하를 뚫어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긴 항해에 지친 데다 보급품이 부족했던 러시아 함대는 학익진 전법을 구사한 일본 해군에 포위되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대패하고 만다. 당시 전투로 러시아군은 사망 5000여명에 포로가 6000여명에 이르렀지만 일본군 전사자는 147명에 불과했다. 이 해전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결정적 발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전쟁의 상흔이 배인 그 역사적 현장은 벽화와 비석으로 박제된 채 지금 이렇게 산 중턱에 외롭게 서 있었다. 역사란 가정이 없다지만,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대마도 해상에서 기습을 받지 않았다면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러·일 우호의 언덕을 내려와 에보시다케 전망대에 올랐다. 와타즈미 신사(神社) 뒤로 우뚝 솟은 에보시다케 산은 아소만을 북쪽에서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일본 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의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을 전후좌우 360도로 전망할 수 있었다. 저 멀리 한국의 제2도시 부산이 희미하게 보였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크고 쭉쭉 뻗은 나무들로 가득한 멋진 산과 아름다운 쌍무지개 사이로 펼쳐진 104개의 섬들이 올망졸망 보였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전망대를 떠나 옛날 옛적 자연 그대로의 길을 따라 대마도에서 제일 큰 마을이자 도회지를 향해 버스로 달렸다. 대마도를 남북으로 오가는 내내 아름드리 산과 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민가나 농사짓는 사람들은 보기 힘들었다. 아니 논과 밭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신라시대에도 우리 땅이었고, 1419년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했을 그때에는 수산자원과 땅속 깊은 곳에 묻혀있는 광물자원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농경지가 부족해 사람이 살기에 힘들다는 이유로 방치해버렸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일본이 무혈입성해 실효적 지배를 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해마다 춘궁기가 되면 굶어죽을 수 없었기에 동해안과 남해안을 침범해 노략질해갔을 것이다.

한말 비운의 공주인 덕혜옹주가 결혼식을 올렸다는 역사의 현장도 찾아보았다. 대마도에서 아름답고 풍수가 뛰어나다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국운이 기운 나라의 힘없는 왕이었던 60살의 고종과 수라간에서 일하던 20살의 궁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덕혜옹주는 고종과 황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지만 나라를 잃은 뒤에는 일본에 반 볼모로 끌려가서 갖은 수모를 당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조선의 옹주라는 사실을 늘 잊지 않았기에 의젓하고 기개와 품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이후 평생 우울증을 앓았고, 독살당할까 무서워 평생 물 한모금도 마음 편히 못 먹고 살았다고 한다. 대마도주 양아들과 정략결혼해서 일본에 살다가 조국을 떠난 지 무려 50여년 만에, 나이 60이 넘어서야 꿈에 그리던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전제군주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슬픈 뒤안길로 사라져가야만 했던 비운의 덕혜옹주. 그녀는 대마도에서 실제로 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결혼식을 올린 장소는 역사의 유적이 되어 지금도 후손들을 불러들여 우리의 아픈 가슴을 소환하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우리는 대마도에서 제일 높다는 유명산(아리아케산, 558m)을 오르기로 했다. 새벽 3시, 사방이 칠흑같이 캄캄했다. 주룩주룩 비가 내렸고, 달빛도 별빛도, 그 흔한 개똥벌레 빛도 없었다. 전날 저녁, 일행 중 20여명이 철석같이 산에 함께 오르기로 약속했는데, 등산 채비를 갖추고 나온 사람은 나를 포함 딱 3명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산길을 오르기로 했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낯설고 왠지 섬뜩한 기운에 무섭기도 했다. 모두 우의를 걸쳤지만 세찬 빗줄기에 이미 속옷까지 젖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한발 한발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이상하게도 무서움과 두려움은 차츰 사라지고, 어떤 오기와 희열, 기쁨이 샘솟았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다는 뿌듯함,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는 어떤 소명감이 요동쳤다. 남들이 잠들어 있는 이 시간,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라도 더 보고, 더 감상하고, 더 깨닫는 것이 더 알차고 보람되게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것조차도 나중에 한줌의 모래알이나 이슬처럼 부질없고 허망하게 사라져갈지라도 말이다.

드디어 우리 3명은 유명산 정상에 올랐다. 짙은 먹구름과 안개, 어둠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저 멀리 시나브로 찾아올 그 무언가를 기대하며 전후좌우 눈이 뚫어져라 보고 또 보았다. 참고 이겨내면 반드시 피어날 그 여명을 우리는 그렇게 기다렸다. 30여분이 지나고 어느 순간 비가 그쳤다. 그리고 저 멀리서 그렇게 바라던 여명이 몰려왔고, 희망이 현실이 되었다. 아무 산에서나 쉽게 볼 수 없는 하얗고 빨갛고 노란 버섯들이 눈앞에 있었다. 쭉쭉 곧게 자란 나무들과 여명의 기운이 내 가슴에 살포시 자리를 잡는다. 그래, 이만하면 이번 산행은 수지맞는 장사가 아닌가!

캄캄한 밤, 비가 오는 가운데 유명산을 올랐을 때 느낀 것처럼 우리 인간은 나약하기 그지없고 미래는 불안하다. 일본은 특히 지진과 천재지변 등 자연 재해가 많다고 한다. 더불어 옛날에는 사무라이들이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몰랐다. 그런데 결국 그 불안감을 이겨내고 한발 한발 나아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넘어지지 않고 땅을 딛고 일어설, 등산할 때 스틱 같은 그 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가진 그 무엇이 바로 수많은 산마다 자리 잡은 신사(神社)와 신(神)이 아닐까? 그래서일까? 일본인들은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자는 생각, 내일은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의식이 강하다고 한다. 그런 긍정성이 내면화되어 일본이 지금 강대국이자 세계최고 장수국이 된 것이 아닐까!


아침 7시, 새벽 운동으로 등산을 했던 터라 더 없이 맛있는 아침을 뚝딱 먹었다. 천혜비경의 자연공원과 딱따구리 공원 등을 감상하고 3시50분 귀국하는 배에 올랐다. 다시 1시간 30여분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항에 5시 20분에 도착했다. 짧은 1박2일이었지만 대마도에서 역사의 현장과 대자연을 보면서 우주의 순리와 역사의 수레바퀴를 경험했다. 이 넓은 우주 속에 나 역시 또 하나의 작은 우주로서 한 번 사는 인생, 멋지고 아름답게 물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대마도 여행은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역사, 인문, 자연여행으로 기억될 것 같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2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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