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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울주 선영에 추모 발길 이어지는 이유 

지극했던 고향 사랑 뜻 잇는 롯데삼동복지재단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껌 하나로 재계 5위 대기업 일궈낸 거인 기리는 지역민들
신동빈 롯데 회장 등 가족들도 틈날 때마다 찾아 고인 추억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 자리한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생가와 그의 묘소. / 사진:롯데그룹
"‘수구초심’이라는 말이 있다.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이다. 나 역시 세월이 흐를수록 어린 시절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눈을 감으면 울주군 삼동면 둔터마을이 아른거리기도 했다.”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의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 중 일부 내용이다. 회고록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신 명예회장의 고향 사랑은 유독 각별했다. 신 명예회장은 생전에 자신이 태어난 울산광역시 울주군을 돕는 일이라면 늘 발 벗고 나섰다. 지역민들은 신 명예회장이 타계한 지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지난 3월 초 찾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신 명예회장 생가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본 신 명예회장의 생가는 그의 생전 모습처럼 여느 소박한 시골집 모습이었다. 그런데, 생가 가까이로 발걸음을 옮기자 싸리나무 담벼락 위에 롯데 껌 몇 통이 놓여 있었다.

롯데 관계자는 “작은 껌 한 통으로 시작해 한국과 일본을 연결한 거대 기업을 일군 재계 거인을 추모하는 시민과 동네 주민들의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담벼락 위에 놓인 껌들은 신 명예회장을 기리는 마음에서 시민들이 두고 간 분향 물품이라는 것. 이어 찾은 신 명예회장의 묘소는 작은 봉분에 와석 하나가 전부였다. 화려함을 멀리했던 신 명예회장의 마지막 자취다운 모습이다.

생가 담벼락 위에는 롯데 껌 몇 통이…

울산의 작은 산골짜기 둔기리 마을의 소년에서 롯데그룹을 재계 5위 대기업으로 일궈낸 거인. 고향을 너무나 사랑했던 고인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렇다. 신 명예회장은 1921년 음력 10월 4일 둔기리 한 농가에서 5남 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울산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18세 나이에 경남도립종축장에 취업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배움을 열망하던 청년 신격호는 1942년 부관 연락선을 타고 도일했다.

일본에서 소규모 식품업으로 시작한 젊은 사업가는 근면과 성실, 타고난 감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일본으로 건너간 지 20여 년 만에 귀국한다. 사업에 성공한 신 명예회장은 1971년부터 매년 5월마다 고향인 둔기리에서 마을 주민을 초청해 잔치를 열었다. 이 잔치에는 숨은 사연이 있다. 1970년 울산공단 용수 공급을 위해 대암댐이 건설되면서 신 명예회장의 고향인 둔기리 지역이 수몰된 것. 이에 신 명예회장은 이듬해 마을 이름을 딴 ‘둔기회’를 만들어 고향을 잃고 곳곳으로 흩어진 주민들을 초청해 잔치를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십 명만 참여하던 마을잔치는 점점 성대해졌다. 집과 논밭을 포기하고 인근 도시로 떠나야 했던 둔기리 주민들은 이 잔치 덕에 매년 고향 사람들을 만나 옛정을 나눌 수 있었다. 신 명예회장은 평소 자신을 드러내거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날만큼은 서로 안부를 묻고 활짝 웃으면서 옛 주민들과 어울려 사진 촬영을 했다고 한다.

40여 년을 이어오던 이 행사는 2014년 세월호 사고가 발생하면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국민적 애도 분위기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취소됐다. 이후 둔기리 마을잔치를 운영해 온 롯데삼동복지재단은 오랜 고민 끝에 행사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마을잔치는 끝났지만, 신 명예회장의 고향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2009년 12월 설립된 롯데삼동복지재단은 그의 뜻을 이어 울산을 본거지로 고향 사랑과 이웃과의 나눔을 실천하기 위한 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신 명예회장 생가와 묘소를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은 1년 넘게 발길 ‘뚝’

당연한 얘기지만, 신 명예회장을 그리워하는 가족들의 발걸음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16일엔 신영자 롯데재단 의장과 장혜선 롯데장학재단·롯데삼동복지재단 이사장, 이승훈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롯데 전직 임원진 30여 명이 신 명예회장 선영을 참배했다. 2월 7일에는 장혜선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통일 안보지원단 평화포럼 임원진과 함께 추모식을 가졌다. 신동빈 롯데 회장도 바쁜 국내외 일정 중 시간을 쪼개 매년 2회 내외로 신 명예회장 선영을 찾는다. 특히 부산 등 지역 출장 일정이 있을 때면 울산도 꼬박 들러 부친을 기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신 명예회장 생전에 유독 부친에 대한 효심을 내세웠던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울산 선영 방문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국내 행적이 묘연하던 신 전 부회장은 최근 한 시사지와의 인터뷰에서 “일정상 어려움이 있어 2022년 11월에 찾고는 못 가봤다”고 답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신 전 부회장이 1년 넘게 부친 선영을 찾지 않은 이유로 ‘일정상 어려움’을 얘기한 것은 납득이 되질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신 전 부회장이 일본 롯데 임원진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몰래카메라 기반 풀리카 사업은 2014년 사업 실패 뒤 그해 11월 이례적으로 감사까지 받았다. 비정상적 상황에 대한 처분을 결의한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회는 신 명예회장에게 그간의 상황을 보고했고, 신 명예회장은 신 전 부회장의 이사직 해임을 결정했다. 14년 전 손수 작성한 유언장 내용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이었다.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2000년 3월 4일 일본 롯데 집무실에서 자필로 유언장을 작성했다. 일본 집무실 금고에 보관돼 있던 유언장은 그의 사후 공개돼 알려졌다. 두 아들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동주는 연구 개발을 돕고 경영에 관여하지 않을 것.”, “한국과 일본, 그 외 지역의 롯데그룹은 신동빈이 승계한다.”

- 최은석 월간중앙 기자 choi.eunseok@joongang.co.kr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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