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s

“멀리서 온 손님에 야멸찬 박대 없다” 

유원지의(柔遠之義)! 병인박해 와중 표착한 미국 상선 ‘사불호’ ‘서프라이즈호’ 선원 환대
조선 개화기 100가지 경제풍경 ①
전봉관의 근대사 가로보고 세로읽기 

고종 3년(1866, 병인년) 2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이양선 한 척이 출현했다. 대원군이 프랑스인 신부 9명을 포함한 천주교도 수백 명을 학살한 병인박해를 단행한 지 불과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대한민국 근대에 관한 다양한 글 발표로 화제몰이를 계속 중인 KAIST 인문사회과학부 전봉관 교수가 이코노미스트를 위해 아주 특별한 펜을 들었다. 그 첫 번째.
1. 1900년 부산 초량 부두. 사불호가 출현한 것은 이보다 35년 전이다.
2. 신미양요(1871)에 참전한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 기함 콜로라도호.

이양선이 출현했다는 보고를 받은 부산 첨사 윤석만은 훈도(訓導) 이주현을 문정관(問情官: 이양선이 항구에 들어왔을 때 그 사정을 알아보던 임시 관리)으로 파견했다.

이양선이 프랑스 군함으로 밝혀진다면 한바탕 결전은 불가피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20여 년 전인 헌종 5년(1839, 기해년)에도 조선 조정은 프랑스인 신부 3명을 참수한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헌종 12년, 프랑스 정부는 자국민을 참살한 책임을 물어 군함 3척, 870여 명의 수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함대를 조선으로 파견했다. 프랑스 함대는 마카오에서 출항해 제주도를 거쳐, 전라도 외연도에 정박했다. 세실(Cecille)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해협을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면, 조선 조정은 대혼란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실 제독은 조선 해안의 지세에 어두워 서울에 이르는 강화해협 수로를 찾지 못했다. 영의정과 만나 담판을 벌이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 영의정에게 보내는 친서를 써서 외연도 주민에게 건네며 조정에 전달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외연도는 절해고도인데다 서울과는 천 리나 떨어져 있어 편지를 전달하기 곤란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세실 제독은 하는 수 없이 친서를 궤짝에 넣어 외연도 해안가에 던져 놓고 떠났다. “프랑스인을 보호할 임무를 띠고 있는 본관은 덕망 높은 프랑스인 신부 3명이 귀국에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체 그들이 무슨 대역무도한 죄를 저질렀는지 알아보고자 달려왔다. 귀국이 법률로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처형했다면 중국인, 만주인, 일본인이 귀국에 입국해도 처형하지 않고 본국으로 호송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프랑스인도 그들과 똑같이 대우해주기 바란다. 귀국은 프랑스 황제의 위엄을 모르는가. 무고한 프랑스인을 학살하는 것은 실로 프랑스 황제를 모욕하는 것이다. 이후 귀국이 프랑스인을 학대하는 일이 있으면 큰 재화(災禍)를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듬해 또다시 군함 2척, 560여 명의 수병으로 구성된 함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라 피에르(La Pierre)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난파되었다. 수병 2명이 익사하고 나머지는 고군산도로 가까스로 대피했다. 프랑스 함대가 고군산도에 표착(漂着)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선 조정은 양식과 구호물자를 제공하는 한편 1년 전 세실 제독이 보낸 친서에 대한 회신을 보냈다.

“표류민을 구제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법이지만, 이 법은 잠입자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프랑스인 신부는 우리나라에 밀입국했기 때문에 법에 따라 처형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들이 프랑스인인 줄 몰랐고, 설령 프랑스인임을 알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

초라한 조난자 신세로 전락한 프랑스 수병들은 구제를 위해 상해에서 긴급히 파견된 영국 군함 2척에 나눠 타고 허겁지겁 조선을 탈출했다. 조선 조정의 회신은 프랑스 수병들이 탈출한 이후에야 고군산도에 도착했다. 회신은 이후 고군산도를 탈출해 마카오에 체류하고 있던 라 피에르 대령에게 북경을 경유해 전달되었다.

문정관 이주현이 작은 배를 타고 이양선으로 접근하자, 이양선 선원들이 사다리를 던져주었다. 선원은 모두 8명이었는데, 동양인 2명을 제외하면 모습이 하나같이 고괴(古怪: 예스럽고 괴이)했다. 두발은 더벅머리인데다 머리 색깔은 황색 아니면 적색이었다. 콧대는 높고, 수염은 없으며, 눈동자는 황색 아니면 적색이었다.

부산에 온 이유를 물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글을 써서 물었다. 하지만 그들이 쓴 글씨는 구름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것(如雲如畵)이, 언문도 아니고 한문도 아니어서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다행히 고괴하지 않은 선원 2명이 동승하고 있었기에 글을 써서 물어보니 중국인 통역 풍남산(馮南山)과 그의 조수 요제(姚第)였다.

그들은 광동성(廣東省) 상해현(上海縣) 사람으로 10여 년 전부터 미국 상선에서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양선 ‘사불호(士佛號)’는 지난해 10월 나가사키에 기항해 총포, 비단 등을 판매하고, 대모갑(玳瑁甲: 거북이 등껍질)을 사서 올해 2월 중국으로 귀항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식량이 떨어져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부산항에 기착한 것이었다.

중국인 통역 2명을 제외한 선장과 선원은 모두 미국인이며, 선박의 국적 역시 미국이었다. 사불호 선장 나불(羅佛)은 중국에 돌아갈 때까지 배에서 먹을 닭과 생선을 사고 싶으며, 자신이 선적해온 총포, 비단 등을 조선의 말린 해삼이나 건어물 등과 교역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문정관 이주현은 외국인과 교역은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고 거부하면서도, 인도적 차원에서 과일, 생선, 닭 등은 아낌없이 제공했다. 식량을 보급 받은 사불호 선원들은 손을 모아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며 부산항을 떠났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는 바람에 우연히 즉흥적으로 제안된 것이었지만, 사불호의 교역 시도는 조선과 미국 사이에 이루어진 첫 번째 교역 시도였다.

사불호가 부산항에 표착한 지 석 달이 지난 고종 3년 5월 12일, 평안도 철산부 선천포에 양괴자(洋魁者: 서양인) 6명과 동양인 2명을 태운 구명정 한 척이 풍랑에 떠밀려 왔다. 수시로 출몰해 해안가 주민들을 놀라게 하던 거대한 이양선의 위용은 오간데 없었다. 갈증과 허기에 지친 초라한 몰골의 양괴자들을 발견한 수군방어사(水軍防禦使) 이남보는 물과 음식을 제공하고, 평안 감사 박규수에게 양괴자의 표착 사실을 보고했다.

박규수는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양괴자의 신변을 보호하되, 인도적으로 음식을 제공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철산 부사 백락연을 문정관으로 보내 그들이 표착한 사정을 묻게 했다. 양괴자 6명은 모두 무식해 필담이 불가능했고, 무슨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지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백락연은 중국어 역관의 도움으로 이양선의 중국인 요리사 화금경(華金京)에게서 표착한 사정을 들었다.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호는 5월 7일 산동성(山東省) 지부(옌타이)에서 감초를 싣고, 일본 오키나와를 향해 출항했다. 배에는 뉴욕 출신 매카슬린(McCaslin) 선장 외에도 미국인, 영국인, 네덜란드인, 중국인 등 4개 국적의 선원 7명이 타고 있었다.

항해를 시작한 지 4일째 되던 5월 10일 거센 풍랑을 만나 선체가 난파되었다. 매카슬린 선장과 선원들은 구명정에 옮겨 타고 먹다 남은 빵 몇 조각으로 연명하며 3일 동안 표류하다 철산부 선천포에 표착했다. 매카슬린 선장은 타고 온 선박이 전파되었으므로 중국까지 육로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조선에는 어려움에 처해 조선을 찾은 외국인을 국적에 상관없이 후대하는 유원지의(柔遠之義)의 전통이 있었다.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 9명의 프랑스인 신부가 참수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서프라이즈호 선원들은 조선 관리를 만났을 때, 자신들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미국인임을 애써 강조했다.

하지만 조선 관리들은 그들이 미국인이 아니라 프랑스인이었다 하더라도 기꺼이 도울 준비가 돼 있었다. 병인박해 때 조선 조정이 외교적 분쟁을 감수하고도 프랑스인 신부를 참수한 것은 그들이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의 국법을 유린했기 때문이었다. 서프라이즈호 선원들이 철산에 머물렀던 24일 동안 조선 관리들은 좋은 음식과 담배, 약까지 제공하면서 초대하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따뜻하게 대했다.

조선 관리는 서프라이즈호 선원들을 중국으로 송환하기 전, 선원들이 몸에 지니고 갈 수 없는 물품들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조리 불살랐다. 호송관은 선원들이 편안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말까지 제공했고, 각 고을 수령들에게 길가에 구경꾼들이 모이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평안도 철산에 표착한 ‘서프라이즈호’

서프라이즈호 선원들은 조선 관리들의 물질적 후대보다도 세심한 곳까지 신경 쓰는 그 따뜻한 마음에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쇄국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던 대원군 집권기에도 외국인을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거나 박해하지는 않았다. 조선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모르고, 구름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글을 쓰는 고괴(古怪)하게 생긴 서양인을 야만인처럼 여기면서도 그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따뜻한 마음으로 도울 줄 알았다.

초대해서 찾아왔건 오지 말라는 데도 억지로 찾아왔건 이 땅을 찾아온 손님은 따뜻하게 대했지만, 일단 그들이 국법을 우습게 여기면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추상같이 처단했다. 어려움에 처해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야멸차게 박대하고, 국법을 우습게 여기는 강한 나라 사람에게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사람들과는 근본이 달랐다.

러시아 위협 대항 수단…서원철폐 명분 쌓기 설도
대원군이 천주교의 배후?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박해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집권 초기(1863~1865)까지만 해도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다.
대원군 집권기(1863~73)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가장 가혹한 시련기로 알려져 있다. 1866년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이후 알려진 순교자만 해도 무려 1092명에 달한다. 그러나 정작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였던 부대부인 민씨와 고종의 유모 박마르타는 천주교 신자였고, 젊은 시절 대원군 자신도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대원군의 집권으로 전도의 자유가 허용될 줄 알았고, 집권 초기 대원군은 천주교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하려 했다. 1860년 북경조약의 체결로 러시아는 연해주 지역의 영유권을 확보했다.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는 수시로 두만강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했다.

남종삼, 홍봉주, 김면호 등 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웠던 사대부 천주교 신자들은 대원군에게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해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할 것을 건의했다. 소위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치는(以蠻功蠻) 전략이다. 철종 때 승지(承旨)를 역임한 남종삼이 대원군을 방문해 영국·프랑스 동맹안을 설파하자 대원군은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대원군은 국경을 접한 러시아보다는 영국·프랑스가 덜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대원군은 남종삼과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눴는데, 천주교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점을 제외하고는 교리가 좋고 진실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대원군은 천주교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주교와 면담을 주선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집권 초기 대원군과 천주교 교단의 밀월 관계는 러시아의 위협이 약해지고, 안동 김씨 세력이 “운현궁에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며 대원군을 공격하면서 틀어졌다. 1866년 1월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면서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던 프랑스 신부 12명 중 9명이 참수되었고, 수백 명의 조선인 교인이 학살되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는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서원 철폐를 위한 명분 쌓기였다는 견해도 있다.


973호 (2009.02.10)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