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을 쉽게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개념조차 잡히지 않는 이들 이론이 맞는지 의심하는 사람도 없다. 반면 진화론은 쉽게 이해되면서도 아직까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화론을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오해하는 경우도 보인다.
『다윈이 들려주는 진화론 이야기』를 쓴 김학현씨는 “흔히 진화라고 하면 어떤 한 개체가 모양이나 모습이 바뀌어 다른 형태로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한다. 그는 개체의 변화는 성장이나 변태지 진화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자연에서는 부모와 같지 않은 새로운 개체가 나오고, 여러 새로운 개체 가운데 환경에 가장 적합한 개체가 선택되며, 이렇게 자연에 의해 선택된 개체의 특성이 유전되면서 그런 개체가 늘어나 새로운 종으로 자리 잡는 순서로 진화가 일어난다. 자연계에서뿐 아니라 시장에서도 진화가 일어난다.
시장에서 일어나는 제품의 진화와 관련해 많이 예시되는 품목은 자동차. ‘시발 자동차’ 로 출발한 한국 자동차는 진화를 거듭한 끝에 쏘나타, 오피러스, 에쿠스에 이르렀다. 이처럼 시장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상당 부분 진화론의 틀 속에서 설명된다. 그렇다면 진화론을 경영에 적용한, 이를테면 ‘진화 경영론’이 있지 않을까. 경제학 분야에서는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행동경제학이라는 ‘종’이 새로 등장했으니….
행동경제학이란 경제주체가 정통 경제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합리적인 게 아니라 탐욕과 공포, 자기기만, 주먹구구, 군집행동으로 인해 치우친 결정을 내리기 쉽다는 전제에서 출발해 경제 현상을 분석한다. 행동경제학은 세계경제 침체로 번진 서브프라임 사태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경영학계는 진화론이 시사하는 바를 아직 본격적으로 접목하지 않은 상태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이런 현황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진화론은 생물이 환경에 맞춰 변화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생물에 변이가 일어나고 자연이 선택하면 그 선택된 개체가 유전을 통해 증식하면서 새로운 종으로 자리 잡는다는 게 진화론이다. 따라서 진화론은 기업이 능동적으로 변화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즉 기존 기업이 기술을 혁신하고 사업모델을 바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업이 신기술과 사업모델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기존 기업이 미세한 측면에서 변신하는 건 가능하더라도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나 사업모델을 갖춰 탈바꿈하는 것은, 즉 DNA를 바꾸는 일은 99.9%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 김용범 이사는 신 교수와 의견이 다르다. 김용범 이사는 “조직이 자체적으로 변하기 어렵다는 점은 공감하지만 불가능하진 않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첫째 외부 경영환경 변화나 부도 등 강력한 계기가 주어지고, 둘째 새로운 경영진이 들어서 리더십을 발휘하면 혁신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애플이 매킨토시컴퓨터의 시장 입지가 줄어드는 위기를 딛고 아이팟과 아이폰이란 혁신을 이룬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김 이사는 “많은 최고경영진이 이번 세계경제 침체도 그런 계기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김태규 한남대 경상대학장은 “진화는 우리가 체감하지 못하는 수십만~수백만 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나지만 결과는 놀랍다”며 “그래서 진화론에서 증거로 제시하는 종의 변화에 비춰볼 때 기업이 단기적으로 만들어내는 변화는 미미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학장은 그러나 “제품, 공정, 기술 등에서 혁신에 성공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고 지적했다. 자연을 시장으로, 개체를 제품·서비스로 치환하면 진화론은 그대로 경영에 적용된다. 제품·서비스가 스스로 변화에 따라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제품·서비스가 아니라 기업이 환경변화에 맞춰 제품·서비스를 바꾼다.
여러 기업이 내놓은 다양한 새 제품·서비스 가운데 어떤 게 적합한지는 시장이 선택한다. 진화 경영론의 핵심은 혁신이다. 시장에서 채택될 혁신을 내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태규 학장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며 “그 분야에서 시선을 단기에 고정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며 통찰하는 접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영의 본질은 혁신의 흐름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명제가 있다. 이런 명제에 따라 주요 혁신 사례를 분석한 『이노베이션 스토리』에서 박영택 성균관대 시스템경영공학과 교수는 “혁신을 세 가지 축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박 교수는 고객(who), 고객의 요구(what), 어떻게(how)가 그 세 가지 축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장 급격한 혁신이 고객을 바꾸는 것이고 ‘어떻게’는 변화가 가장 적다”고 말했다. 고객을 바꾸는 혁신으로 성공한 사례가 닌텐도의 ‘위’다. 닌텐도는 DS에 이어 위를 히트시키면서 플레이스테이션의 소니와 X박스의 마이크로소프트(MS)가 양분하리라고 예상됐던 게임기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전 게임기는 주로 젊은 층을 대상으로 삼았다. 반면 닌텐도는 가족 전체를 고객으로 잡았다. 고객을 바꾸자 고객의 요구도 바뀌었고, 어떻게 그 요구를 충족시키는가 하는 방법도 변했다. 다른 게임기와 달리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야구·볼링·골프 같은 스포츠를 게임으로 구현했다. 이런 게임을 즐기는 도구는 조이스틱이나 마우스가 아니라 리모컨이다. 닌텐도 ‘위’를 즐기는 리모컨은 이제 ‘위모컨’으로 불린다.
고객의 요구에 맞춰 혁신한 사례로 박 교수는 일본 홋카이도의 아사히야마동물원을 들었다. 아사히야마동물원은 1995년부터 혁신을 추진했다. 구성원들이 머리를 맞댄 끝에 ‘행동전시’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관람객이 동물원에서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은 희귀한 종 자체가 아니라 그런 생물이 자연 그대로 실감나게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데 착안한 것이었다.
고객을 새로 발견하는 게 가장 중요
아사히야마동물원에선 이런 고객의 요구를 반영해 펭귄관엔 관람객 머리 위에 투명수조를 만들어 펭귄이 하늘을 날 듯 씽씽 헤엄치는 장면을 연출했다. 바다표범은 투명 원형기둥에서 수직 상승하는 묘기를 보여줬다. 인구 35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 아하시가와에 자리 잡은 이 동물원은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생태체험관이 됐다.
‘어떻게’를 바꾼 사례는 리츠칼튼호텔이 있다. 리츠칼튼은 고객만족을 높이기 위해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미리 알아서 대응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예를 들어 한번 리츠칼튼호텔에 투숙한 고객이 “푹신한 베개를 딱딱한 것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고 하자. 리츠칼튼호텔의 전 세계 가맹점은 이 고객의 취향을 공유한다.
이 고객이 다음에 세계 어느 리츠칼튼호텔에 묵더라도 침대엔 딱딱한 베개가 놓인다. 진화는 ‘대진화’와 ‘소진화’로 나뉜다. 소진화는 말 그대로 작은 진화를 뜻한다. 대진화는 소진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결과 나타나는 큰 진화, 즉 새로운 종이 나오는 것이다. 박영택 교수는 “경영에서는 대진화는 ‘Big I’(큰 혁신), 소진화는 ‘Small i’(작은 혁신)로 불린다”며 “고객을 바꾸는 것이 Big I에 해당하고, 방법에 변화를 주는 건 Small i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고객을 바꾸면 고객의 요구도 달라지고 그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법도 달라야 한다”며 “따라서 혁신의 사이클은 Big I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기업은 잘되든 못되든 혁신을 추진한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다른 기업들보다 앞서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객을 새로 설정하는 것과 같은 Big I에서 성공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박 교수는 이와 함께 “Big I에서 Small i를 거쳐 다시 Big I로 순환하는 혁신 사이클의 주기를 단축해야 한다”는 말로 ‘진화 경영론’을 매듭지었다.